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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박근혜를 조현병으로 조롱한 좌파들.. 그리고 문재인 정신분열증세(?)가 나와 국민을 미치게 한다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9/05/27 23:10:06)

[진단] 박근혜를 조현병으로 조롱한 좌파들.. 그리고 문재인 정신분열증세(?)가 나와 국민을 또라이로 만들고 있다
-SPn 서울포스트, (마이 네임 이스) 량기룡(梁奇龍) 기자

 

한동안 문재인 치매관련을 보도한 매체가 고소고발을 당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지금도 검색하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그의 정신분열증세 도 마찬가지.

 

지난 박근혜 탄핵정국에서 좌파들은 박근혜를 조현병(정신분열증) 환자로 까지 조롱했다. 하긴 나도 그의 정신상태를 매우 의심했다. 그런데 문재인을 보고 있노라니, 박근혜와 공통점이 너무 많다는 것. 즉 유체이탈화법까지 유사하다고 분석돼, 그의 심각한 정신병증이나 치매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을 최근에 할 지경에 이르렀다.

 

만약 문재인과 함께 백반정식을 먹는다면, 이 식사가 비빔밥인지 육계장인지 짜장 인지 스파게티 인지 모르겠다. 초장을 고추장이라고 해야하는가, 된장을 똥이라고 해야하는가... 나는 최근 엄청난 카오스 에 직면해 있다. 정의가 무엇인가, 자유가 무엇인가, 희망과 노력이 무슨 소용있는가. 이 나라가 가상세계인가 현실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코메디 인가, 평화인가 전쟁인가.

 

문재인 입으로, 화합을 외치며 학살 운운 분열을 선동하고, 법대로 하라면서 법을 무력화시키는 법을 만들고,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면서 김정은을 대변하고, 자본주의를 말하면서 기업을 조지고 있다. 북은 권력유지를 위해 김정은이 총을 난사하고 남에선 문재인이 집권연장을 위해 검찰의 칼춤으로 공포를 조성하고 있다. 그런 문재인의 망상적,망아적 상태에 유아적 행동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박근혜나 노무현의 여러가지 이미지 가 복합적으로 혼재해 그들은 서로가 샴쌍둥이, 아바타 나 복제인간 이 교차한다는 결론을 얻었던 차, 어제 문갑식의 진짜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 2012년 5월,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액을 기록한 노르웨이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의 대표작인 '절규(The Scream·1893년작)'. 2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 1억1천990만달러(약 1천355억원)에 낙찰됐다. ⓒ자료사용

 

의학에 대해 모르지만, 내가 정의한 '정신병 은, 자신 내 기존 가치가 전도,붕괴 상실된 상태' 를 일컽는다. 따라서 똥을 벽에 칠하는 행위는 치매로 정신병의 일종이다. 이 증상은 균이나 바이러스 에 의함이 아니라 외부적 물리화학 충격에 의한 뇌신경 변형이 가져 온 결과로, 정상인이 정신병자병동에 함께 갇히면 정신병자가 되기 쉽다. 전에, 에드바르트 뭉크 의 '절규' 라는 그림을 보고 무척 놀란 적이 있다. 그림 속 놀란 표정이 공포스럽게 만들었던 그때 나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 그러니까, 그 그림의 놀란 표정에 무의식적으로 공명했으니 심리적 현상과 치유에 그림이나 음악이 광범위하게 쓰인 예를 직접 체험한 턱이다. 

 

문갑식은 자신의 건강때문에 이웃 병원을 찾아 의사로 부터 '이중구속 메시지(Double bind Message)'를 접하고 문재인 예를 재미로 전달했으나, 이는 이 나라에 큰 재앙이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최근 필자도 문재인 정신상태를 비판하다가 자칫 나까지 공황상태에 놓인 또라이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그 내용을 찬찬히 찾아 봤다. 먼저 나 개인이 분석한 정신병리학적 이런 사회 현상을 언급하자: 

 

현대인은 누구나 정신병 증상을 가지고 있다고 누구나 말한다. 다분히 불완전하고 한계성을 가진 인간 스스로의 합리화지만 여기에 큰 '모순'이 있다. 그렇다면 잠시 건강한 상식과 정신상태를 가진 사람이 잠시 비정상인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은, 인간은 누구나 '모순'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바라 보는 것. 즉, 자기 자신 역시 하루 중 또는 어떤 사안에 정상과 비정상을 수없이 왔다갔다 하는 존재로 인식하면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은 당연히 Double bind(이중구속) 로 이뤄졌거나 그 이상의 다중구속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생물에서 하등동물일수록 단세포, 고등동물일수록 다세포로 이뤄진 것과 같다. 따라서 종의 최상위인 인간에게 이중구속적 언행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또한 세상의 본질은 혼란과 모순으로 출발해서 질서를 찾은 다음 다시 혼란과 모순의 순환이다. 

 

젊은 연애청춘을 겪은 남녀는 알겠지만, 대표적인 이중구속메시지 는 '사랑하니까 헤어지자'는 말. 성형수술을 하란 건지, 지참금이 적다는 말인지 헛갈릴 것이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모순된 행동속에서 살아간다. 공부하면 성공한 줄 알지만 공부를 안한다. 열심히 일하면 부자되는 줄 알지만 열심히 일을 않거나 돈을 까먹는다. 모순이다.

 

정치권으로 눈을 돌려보자. 야당 자유한국당이 문재인스톱을 외치면서 황교안은 황삿갓 남한방랑기를 쓸 동안 나경원은 이쁜 누나가 밥 잘사줄께 라며 여당대표 만나 핑크빛 담화를 한다거나, 경기도 안좋은데 국민세금으로 이인영,나경원,오신환이 호프 퍼마신 것을 역시 국민세금으로 운영하는 공영방송이 떠드니, 이런 당의 집구석이나 이 나라 집구석이 잘되겠는가,하는 것이 이중구속메시지 다. 또 서로 총질했던 남북이지만 같은 언어를 쓴 한민족으로 언젠가 통일을 이뤄야하나 계산과 체제가 너무 다른 것, 트럼프 가 자기 뒤통수에 미사일을 쏜 김정은에 내심 웃음 짓는 행위들이 이중구속에 해당된다. 

 

'이중구속 메시지(Double bind Message)는 우리가 사용하는 의사소통(전달)의 한 방식일 뿐이다. 그러나 이처럼 모순에 가득한 의사전달은 건강한 공동체의식을 파괴하고 이런 방식이 횡행하는 사회일수록 건전치 못하다. 화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청자가 어떻게 할지 모를 모호함 - 많은 사람은, 대화가 안통할 때 상대더러 미쳤다 라고 하거나 자신이 미칠 것 같은 상태를 경험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문재인을 보면, 내가 열거한 '모순이론'이나 기존 '이중구속'으로 합리화할 범주를 넘었다. 법은 아는데 경제는 모른다. 축구는 보는데 공은 못찬다. 귀는 있되 못듣는다. 말은 하돼 한 말이 없다.. 뭐, 이런 식일까. 분명한 것은 이중구속메시지 를 쓴 사람을 반드시 정신분열증 환자로 분류할 수는 없어도, 정신분열증 환자는 횡설수설하게 무의식적으로 이중구속메시지를 쓴다는 것, 그리고 그런 정신병자 와 한 공간에 있는 사람은 병이 전이될 가능성도 크다는 사실, 요즘 내가 또라이가 되는 것 같아서 써 본 말이다. 쓰벌...//

 

아래 인용한 심리의학적 정의나 관련 글(칼럼)은 노무현정부 때 써진 것도 있어, 벌써 우리 사회를 그때부터 경고한 것으로 판단한다. (龍)

 

= 아래 글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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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한 마디 두 지시’ [문갑식의 진짜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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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구속 메시지 (double bind message)| 우리들의 이야기

Scaramouche | 조회 322 |추천 0 | 2017.09.18. 14:50
 

이중 구속 메시지는 조현병(정신분열증)의 병태 생리로 제시된 가설의 하나로서, 듣는 이로 하여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지도록 만드는 메시지를 말합니다. 이중 구속이란 양쪽 손이 모두 묶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을 하면서 몸짓으로는 말과 상반되는 표현을 하거나, 혹은 말 속에 그 말의 본래적 의미와는 상반되는 메시지를 감추고 있는 것이 이중 구속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서로 상반되는 혹은 모순되는 내용을 동시에 지시하는 것입니다. 

 

이중 구속 메시지는 일상 생활에서 흔하게 경험하는 의사소통 방식의 하나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었는데 직장 상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들 이제 퇴근들 하세요. 피곤하지만 내가 야근할게. 어제도 야근했는데 너무 힘들구먼...” 이 말을 들은 부하직원은 퇴근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야근을 해야 할까요? 추석을 앞두고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통화를 합니다. “어머니, 입덧이 심해서 이번 추석에 못 내려갈 것 같아요.” “아니다. 괜찮다. 네가 편한 대로 하거라. 그런데 요즘 따라 왜 이렇게 서럽고 외롭고 눈물이 자꾸 나는지 모르겠구나.” 내려오라는 얘기입니까? 내려오지 말라는 얘기입니까? 

 

이중 구속 메시지는 듣는 사람을 긴장시키고 괴롭게 만듭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속마음을 표현해주면 좋으련만 진짜 속마음이 무엇인지 눈치를 살펴야 하기에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고 따라서 피곤해집니다. 자칫 속마음을 잘못 파악했다간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모든 이중적 메시지가 옴짝달싹 못하게 구속하는 이중 구속 메시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절하게 사용되는 이중적 메시지는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을 포근하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물론 이중적 메시지가 상대방에 대한 관용과 배려의 마음에서 출발하고, 또 그러한 마음이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될 경우에 그렇습니다. 반대로 악의에 가득 차서 상대방을 곤혹스러움에 빠뜨리고 괴롭히기 위한 이중적인 메시지는 그 의도가 상대방에게 간파 당하는 경우에 이중 구속 메시지 그 자체가 주는 괴로움에 더해서 심한 불쾌감을 추가로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말을 하면서 몸짓으로는 말과 상반되는 표현을 하거나, 혹은 말 속에 그 말의 본래적 의미와는 상반되는 메시지를 감추고 있는 것이 이중 구속 메시지의 일반적인 의미이지만, 또 다른 의미의 이중 구속 메시지가 있습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가 그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장난감을 망쳐놓은 동생을 때린 아이에게 폭력은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며 부모가 아이의 뺨을 때린다면 아이가 겪을 정신적 혼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러한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이중 구속 메시지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의 연설이나 설교, 혹은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서 써진 글에서 가끔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런 이중 구속 메시지가 가져다 주는 괴로움은 다른 종류의 이중 구속 메시지가 가져다 주는 괴로움에 비해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연설이나 설교를 듣거나, 글을 읽는 것 자체가 고문입니다.  

 

거짓과 속임수로 인생을 정면돌파(?)해 온 목회자가 인생을 정직하게 살라고 설교합니다. ‘한 영혼을 위해 나의 목숨조차 버릴 수 있는가?’라는 날 선 질문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하루하루를 시작한다는 목회자가 자리보존을 위해 자신의 잘못에 대해 회개를 외치는 성도들에게 이제 그만 나가주십사 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사랑과 용서에 대해서 설교하지만 성도들을 고소, 고발합니다. 이런 설교를 듣고 목사의 행동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다 못해 당혹스럽습니다. 그 성도들을 용서하고, 용납하자는 것인지, 쫓아내자는 것인지 헷갈리기만 합니다.  

 

누군가 그 목회자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글을 씁니다. 하지만 그 글 자체에서는 사랑이나 용서하는 마음은 전혀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그 목회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정죄와 미움이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글의 내용과 그 글이 은밀하게 드러내주는 글 쓴 사람이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중적입니다.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할 그 사랑과 용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군가 그 목회자를 정죄하지 말라는 글을 씁니다. 하지만 그 글의 내용은 정죄하지 말 것을 지시하면서, 그 글 자체는 정죄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글입니다. 그 목회자를 정죄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글입니다. 글의 내용과 그 글이 노골적으로 드러내주는 글 쓴 사람이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중적입니다. 그 사람이 주장하는 ‘정죄하지 말라’는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할 주님의 명령인 ‘정죄하지 말라’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의사가 하는 대로 따라 하지 말고,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의사들은 자신이 환자에게 충고하는 대로 살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런 말이 나올까 걱정스럽습니다. ‘천국에 가려면 목사가 하는 대로 따라 하지 말고, 목사가 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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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Double Bind: 사람을 미치게 하는 메시지| 심리학응용

류영석 | 조회 26 |추천 0 | 2009.12.03. 21:48
 

Double Bind (“이중구속” 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는 1956년에 인류학자이자 언어학자인 그레고리 베이트슨(G.Bateson)이 팔로알토 연구소에서 발표한 이론적 개념이다.

double bind(이후부터는 이중구속)는 간단히 말해서 상반되는 메시지(대부분은 요구)가 동시에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부모나 가족이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똥씹은 표정을 짓는다거나, 직장 동료가 말로는 “편하게 대하라”고 하면서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거나, 교수가 수업시간에 “자유롭게 발언하라” 고 하면서 정작 질문을 하면 씹어버린다거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요구
하면서 정작 그런 아이디어를 내면 더 많은 업무로 처벌을 내리는 회사의 회의실 장면이 그런 상황이다.

이중구속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늘 여러개의 정보채널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의사소통을 할 때 언제나 하나 이상의 채널을 사용한다. 문자로도 변환될 수 있는 언어메시지는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언어에도 어조가 있고 뉘앙스가 있으며 악센트나 기타 등등의 방법으로도 텍스트로 전달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게다가 얼굴을 보고 의사소통하는 경우에는 표정, 자세, 행동과 같은 더 뚜렷한 다른 채널들도 같이 사용한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자면 이 채널들이 온전히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대할 때만이 바로 그렇게 이구동성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하지만 만약 어떤 문제에 대해서 내적인 갈등을 느끼고 있거나,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거나, 인격에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위와 같은 이중구속 적인 메시지가 발생한다.

내 경우도 늘 말로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더 많은 질문을 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그 질문하는 학생들에게 과연 내 말과 온전히 일치하는 태도를 보여주는지 의심을 하게 된다. 가끔은 질문이 너무 멍청해보여서, 혹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심지어는 그냥 대답하기 귀찮아 할 때도 있고, 그럴 때면 분명히 내 몸의 어딘가에서는 “질문 자꾸 할래?”
라는 메시지를 흘리고 있을테니 말이다.

이중구속은 메시지 자체의 모순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순수해져라” 라는 말은 그 자체로 이중구속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순수는 순수해지려는 의도조차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순수해지기 위해서(혹은 순수해지라는 말을 듣고) 순수해진 것은 결코 순수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순수해지라”는 말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요구이며 이중구속이 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해”라는 말도 이중구속이다. 사랑은 자발적인 행동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명령이 되니까. 마찬가지로 “니가 알아서 좀 해” 라는 말도 굳이 따지자면 이중구속이다. 이미 알아서 하고 있었을텐데, 그게 마음에 안들때 이런 말을 한다. 따라서 알아서 하라는 말은 사실 "니 맘대로 하지마" 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이들이 이런 이중구속 상황에 민감하고 그래서 더 타격을 많이 받는다. 예를 들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는 아이를 지극히 이중구속적인 상황에 꼴아박는 질문이다. 애가 어느 쪽을 선택하란 말인가. 친척이나 손님을 불러다 놓고 아이에게 “너 평소에 하던 것 좀 해 봐라”라고 말하는 것도 지극히 이중구속적이다. 손님 앞이면 이미 “평소”가 아니거든. 이런 상황에 처한 아이들은 말 그대로 몸이 꼬이고 마음이 꼬여서 미칠려고 한다.

베이트슨은 실제로 어쩌면 정신분열증이 이 이중구속적인 상황에서 유발되는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신 주변에 말과 행동이 늘 어긋나는 인간이 있다고 치자. 그래서 그 인간의 말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치자. 어떻게 하면 될까? 그 인간을 안보고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면 된다. 하지만 만약에 그와 매일같이 마주쳐야 한다면? 그 믿을 수 없는 인간을 믿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라면? 예를 들어, 그 인간이 당신이 생존하기 위해 의존해야 하는 부모라거나, 당신이 믿고 지내야 하는 친구나 연인이거나, 당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상사이거나, 혹은 당신이 몸담고 있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믿을 수 없는 인간을 믿어야 할 때, 모순되는 말과 행동에 나 자신을 맞춰야 할 때, 우리는 미치고 팔짝뛰게 된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몇 개월, 몇 년, 혹은 평생 지속되어야 한다고 할 때 정신줄을 놓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최근에 누군가가 남에게 “세뇌되었다”고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어떤 면에서 이중구속이다. 이 말 속에는 "니가 만약 세뇌되지 않았다면 증명해봐"(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는데. 사실 어떻게 해도 자신이 세뇌되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세시대 마녀사냥의 논리가 딱 그런 이중구속이었다. 마녀를 감별하는 법은 마녀를 묶어서 강물에 던지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꽁꽁 묶인 채로도 물위에 뜬다면 그녀는 마녀이므로 죽여야 한다. 인간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녀가 물에 빠져 죽어버린다면, 그제서야 그녀는 마녀가 아니다. 어쨌든 일단 마녀로 찍히면 죽어야 끝났다.

누군가는 바로 그런 이중구속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그래도 여전히 그에 대해서는 이중구속 메시지를 보내는 인간도 있다. 죽지 않았을 때는 그렇게 살면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삿대질을 하다가, 그가 죽으니까 죽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삿대질이다. 어쩌란 말인가.

뭐 그런 이중구속은 워낙 많이 경험해봐서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면 다행이다.
둔감화. 그거야 말로 우리나라에서 정신줄을 놓지 않고 살아남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 참고: Double Bind와 종종 혼동되는 개념이 Double Blind(이중맹목) 이다.
Double Blind는 실험을 할 때 실험을 하는 사람이나 실험대상자 모두 그 실험의 정확한 목적이나 처치의 내용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실험자와 피험자 둘 다 모르기 때문에 더블이다. 왜 이런 짓을 하느냐 하면, 그 사람들의 주관적 기대가 실험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의대에서 약의 효과를 실험할 때도 (환자 뿐만 아니라) 약을 주는 의사도 지금 자기 환자에게 주는 약이 가짜약인지 진짜약인지 몰라야 제대로 된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환자가 플라시보 효과를 보일 수 있다면, 의사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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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을 조장하는 사회
하지현<정신과 전문의.의학박사>
기사입력 : 2003-07-06 19:51
 
‘Double-bind message'…정체성의 혼란

아이에게 친구에게 과자를 아낌없이 나눠주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너만 먹으라고 애써 사준 과자를 벌써 다 없앴냐면서 혼을 내면 아이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아이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몰라 허둥대가 결론을 못내리고 자아의 붕괴를 경험한다.

그레고리 베이트슨과 도날드 잭슨이 정신분열병의 원인을 사회심리학적으로 설명하며 가족내에 위와 같이 부모가 아이에게 행동, 태도, 감정에 대해 일관되지 않은 메시지를 주면 아이는 결국 자기만의 세계로 도망가 버려 그 때문에 정신분열증을 앓게 된다며 이를 ‘Double-bind message'라고 하였다. 지금이야 정신분열증은 생물학적인 모델로 설명을 하고 더블 바인드 메시지로 병인론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지만 지금도 그와 같은 방식의 메시지전달은 혼란을 야기한다는 면에서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이 개념이 요즘 의료계의 상황을 설명할 때 요긴한 것 같다. 한 쪽에서는 소신진료와 의학지식내에서 가장 최신의 최적의 진료를 하기를 원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과잉처방, 과잉검사를 하는 악덕의사로 몰아세운다. 그러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몰라 어리둥절해있다 보면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일진광풍의 두 장단에 미친년 널뛰듯 이리뛰고 저리뛰다 정신을 차려보면 수중에 든 것은 하나 없고, 속곳만 입은 채, 굶주린 배만 움켜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온전히 제 정신이 박혀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쪽에서는 클래식이 다른 한쪽에는 락 음악이 쿵쾅거리는 곳에 두 시간만 있으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또 고부간의 갈등이 있는 집안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서로의 입장을 듣다보면 나중엔 그저 도망가 버리고만 싶은 기분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물론 세상에서 어느 한쪽만 무조건 따르며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러기 힘든 게 사회의 룰이다. 그렇지만 너무나 다른 두 가지 요구조건이 결정권을 가진 쪽에서 오거나,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체계와 판이하게 다른 요구사항이 들어오면 선택의 문제가 생존의 문제, 삶의 질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 짓누르는 형국이 되면 그 갈등은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그게 한 개인의 결정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특정집단에게 전가되며 사회적 ‘희생양 만들기’를 통해 나머지 이해집단들이 전체 사회의 문제점을 봉합하려는 양상이 된다면 그 집단의 혼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이런 식의 더블바인드 메시지가 한 개인에게 반복적으로 가해지면 그 사람은 차후에 정신분열병에 걸릴 소지가 많다는 예전의 이론은 요즘 들어 사회의 집단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설명할 때 많이 쓰이고 있다. 이런 더블바인드 메시지로 개인은 정신세계의 붕괴와 함께 나와 남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정신증상을 경험하게 된다면 그런 메시지에 노출된 집단은 어떨까?

아마 먼저 크게 보면 집단 전체의 정체성의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집단내의 구성원이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며, 집단외부에서 그 집단을 평가할 때에도 모호하고 정체를 알 수 없다고 보게 된다. 뭔지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존재가 있을 때 인간은 두려움을 느껴 피하거나 파괴하려는 것이 인간본성의 하나다.

그래서 사회전체에서 의료계는 전체 사회와 동떨어져있는 이질적 집단으로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그 이질성이 우호적인 것이 아니라 모호함과 불확실성으로 채워져 있기에 회피하거나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며 바라보게 된다. 의료계가 국민보건전체를 생각하며 보편 타당한 의견을 아무리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단단한 콘크리트 벽에 못을 박듯이 튕겨져 나가기만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사회전체가 의료계를 바라보는 눈 때문이다.

다음은 집단내부로 보자. 이렇게 동시에 두 가지이상의 상반된 기준이 집단에 제시되고 반응을 해야 한다면 내부는 혼란에 빠지고 각각의 소집단의 이해관계의 차이에 따라, 또 각각의 구성원의 사회 문화적 배경, 가치관에 따라 기준을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집단 내에서 통합된 하나의 가치관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내부갈등과 분열이 야기될 수 밖에 없다.

지금 의료계가 바로 이런 형국이다. 분열이 조장되는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각개약진을 해서 나 하나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걸까? 호랑이에게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두 눈 부릅뜨고 견디고 있으면 될까?

이럴 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외부에서 더블바인드 메시지가 어떻게 들어오건 간에 집단내부의 통일된 가치체계의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 안에서 일관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조직내부의 동요도 줄어들 수 있다. 자극의 강도와 종류에 따라 일관된 반응을 보이는 것을 통해 내부의 구성원들 또한 각자의 반응수준을 결정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전체조직의 엔트로피가 낮아지며 안정화되면서 좀더 멀리 바라볼 여유를 갖게 된다. 또 그것이 선행 되야 그동안 잊고 있던 내부의 산적한 여러 문제를 차근차근 자기반성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외부에서 의료계를 바라보는 존재감이나 정체성도 점차 뚜렷하고 명확해질 수 있다. 어떤 대상이 좋은지 싫은지 보다 더 위험한 것은 무엇인지 모를때이다. 어떤 존재인지 명확해지면 필요이상의 공격성의 대상으로 노출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좋으나 싫으나 의료계를 대표해 외부환경과 교류를 하는 것은 의사협회다. 이 의사협회가 일단 외부의 이런 다종다양한 자극에 대해 어찌됐던 일관된 반응과 기준을 제시하며 칼리브레이션을 해나갈때까지 지켜보며 응원을 하는 것이 분열을 조장하는 이 사회에서 의료계가 내적 붕괴의 상황에 빠지지 않고 정체성을 굳건히 지켜나갈 길이다.

하지현<정신과 전문의.의학박사>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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