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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포스트논단] 80년 광주 상무대 보병학교 5.18광주사태 계엄군경계군이었던 내 기억으로서의 시각 : 지만원과 당시 군지휘관 등의 북한군개입 주장은 역사날조이자 새빨간 거짓말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9/01/13 15:53:38)

[서울포스트논단] 80년 광주 상무대 보병학교 5·18광주사태(5.18광주민주화운동) 계엄군경계군이었던 내 기억으로서의 시각 : 지만원과 당시 군지휘관 등의 북한군개입 주장은 완전한 사기행위이자 역사날조
-SPn 서울포스트, (마이 네임 이스) 량기룡(梁奇龍) 기자

 

먼저, 어떤 일에 진상조사를 종합한다해도 일부분을 확일 할 뿐, 전체를 아무도 완전히 밝힐 수 없다. 상당한 세월이 흐른 5.18광주사태, 당시 계엄군이나 5.18관련 총괄 지휘부 역할을 했던 공무원이나 민간인이라도 다 알거나 기억하기 어려우며, 더군다나 특정 임무와 장소에만 있던 사람은 지엽 정도에 국한된다. 즉, 나무 한 그루가 숲을 만들어 낼 수 없고, 나무 잎 하나가 나무의 줄기나 뿌리를 알 수 없는 것이다.    

 

↑ 1979년 10월 무렵. 상무대 보병학교 영내에서 필자. 일상업무 중 폼 잡고 찍은 사진. 정말 우연하게도, 여기 창고와 연병장은 1972년 내가 국민학교 6학년때 군부대견학을 왔었던 바로 그 장소다. ⓒ서울포스트 양기용
   

2005년부터 인터넷신문 서울포스트 를 운영하면서 여기저기 사람들도 만나보고 무슨 목적으로 모임(단체)도 주도한 적이 있었지만, 다 부질없었다. 주최자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 별 볼 일 없게 되었기 때문. 수 년 후 그 당시 보수언론협회모임에서 지만원씨 언행을 접했다. 그는, 광주사태에 북한 특수부대원이 수 백 명 침투해 시위대와 섞여 있었다는 것.  

 

▲ 보병학교-전투병과학교 복무시절 필자. 탄약 일상검사 - 대전차 토우미사일부터 육군에서 쓰는 모든 총포탄약, 자주포탄, 전차포탄, 발칸포탄, 해군함포탄(40mm) 등 ⓒ서울포스트
필자는 아주 단편적으로나마 광주사태를 직접 겪은 당시 현역군인(RNTC기술하사관으로 입대, 중사 전역)으로, 누구의 말들이 근거가 있다없다는 진단할 수 있었기에 그걸 무시했다. 즉, 미친 사람이 장난치는구나, 일갈했을 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노이즈마케팅 을 통한 불손한 목적이 있을 것으로만 판단했다. 당시 후방에 북한군세력이 집단 침투하여 사회를 교란할 허약한 군대도 아니었고, 이미 10.26,12.12,5.18등으로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는 군을 북한이 쉽게 볼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지씨는 시스템클럽사이트 를 운영하면서 모 극우인터넷신문을 통해 지속적으로 그 문제를 확대 재생산했다. 엉터리 조작질의 글을 대략 보면서 느낀 점은, 광주사태를 겪지도 않은 그가 십 수 년이 지난 후에 뜬금없는 북한군 타령을 한 이유가 분명해졌다. 첫째, 교도소,경찰서가 습격당해 총기가 탈취된 것은 보통의 시민들 능력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태생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빨갱이로 보며, 전라도인을 혐오,증오하는 극우주의자라는 것. 그런 그가 5.18진상조사위원이 되어야겠다고 한다. 시골사람 억지 논리에, '서울 갔다 온 사람이 안갔다 온 사람을 못이긴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최근 보도를 보니, 5·18 진상조사위원(518진상규명위원) 역할에 북한군 개입여부도 가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이 따위 항목이 목록에 추가된 것인지 의아하지만, 아마 자유한국당에서 태극기부대의 예비역군부 세력의 압력을 수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 안밖의 여론이 악화되자 나경원 대표는 당사자를 배제한 대신 후방에서 조언하는 쪽으로 요청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험담까지 하며 사태는 악화되었다.

 

이후 보도는 지씨 육사 22기 동기이자 5.18때 광주에 파견됐던 공수부대 지휘관 변길남 당시 중령(소장 예편), 또 다른 대대장 임수원 당시 중령(갑종196기, 준장 전역)을 진상조사위 위원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으나 나 대표가 면담을 했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고 했다. 자, 여기에서 그의 뜬금없었던 그간 북한군개입설은 답이 나왔다. 변길남(현 각군구국단체 총연합회회장 등)은 항상 5.18에 북한군이 개입됐고 그 근거로 시민군이 전라도 말씨가 아니라 북한쪽 말씨를 썼다는 것을 증거로 확신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에 그간 지만원 등이 그들과 교류하면서 북한군 개입을 기정사실인 것처럼 꾸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만약 계엄군이 주장한 의심스러운 불온세력과 북한군을 조우했다면 왜 체포하거나 사살하지 않았을까. 매우 비겁한 군인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혹시 처리해서 암매장하고 북한 소행을 덮었는가,에 의구심이 생긴다.  

 

현재 자한당 김진태 의원 등은 공개적으로 그들을 지지하고 있으며, 당 지도부가 그들 세력과 이미 카르텔 이 형성된 것같은 인상이다.  이미 태극기부태에 점령당한 나경원대표의 빼도박도 못한 이 지경은 군출신에 의한 신개념 예비역군부쿠데타 가 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큰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8에 대해서는 현장에 있었던 나도 할 말은 없다. 다만, 들은 것이 있고 원인을 유추할 수 있을 뿐 사실을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다. 굳이 말을 한다면, 소설 한 편 쯤은 써 볼 수 있다.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전라도 고향땅에서 스무살 소년병(?)이 보고듣고 겪은 짧은 시간에 대해.

 

↑ 광주-송정리간 도로에 있는 육군통합병원 앞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철수한 계엄군과 시민군들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필자인 서울포스트 발행인(양기용)이 80년 겪은 5.18에서 당시 익히 보았던 화정동 통합병원 앞 현장 사진을 우연히 발견했다. 중앙분리대 화단 끝 시커먼 부분은 시위대가 타이어 등으로 방어선을 만들고 불을 질렀던 광천동사거리, 이 쪽은 계엄군측에서 바리케이트 를 치고 서로 대치한 양상, 뒤쪽에 탱크 가 대기하고 있었다.]

ⓒ서울포스트 가 자료로 사용

↑ 5.18때 계엄군의 헬기 기총사격논란 사진 중 한 장. 그러나 필자(서울포스트 발행인 양기용)가 외곽지역에서 겪은 바로는, 헬기는 이동목적 과 시내 상공 등지에서 홍보방송,전단지 살포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총 쏠려는 헬기가 저 따구로 비행하겠나?

 

40여년이 지난 지금, 이미 공개된 내용들과 비슷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직접 보고 듣을 것 일부를 공개한다. 아울러 전두환 전 대통령(80년 당시 국가보안사령관)과 동기인 노태우 전 전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문민정부를 열면서 (1979년 12.12사태)로 1995년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사형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백담사로 들어갔다. 1997년 12월 22일에 사면·복권, 최고의 피해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2월 취임후 청와대로 초청하는 등 공식적으로 화해했다. 그리고 5·18특별법 등을 만들어 여러 차례 진상조사가 이뤄졌고 희생자들에게는 충분하지 않지만 상당한 보상도 이뤄졌다. 전두환청문회로 인해 노무현대통령도 만들어졌고, 현 문재인대통령도 만들어졌고, 이젠 5.18진상조사위원회도 만든다고 하는 한편, 5월단체로부터 고발당한 전 전 대통령은 현재 광주지방법원 재판에 회부된 상태다.   

  

내 개인적으로로 5.18민주화운동 이라는 명칭은 매우 어색해 아직도 5.18광주사태로 알고 있다. 그리고 총 든 계엄군이었던 난, 시민도 아니었기에 도대체 그 당시 사건을 뭐라고 불러야할지, 평생 풀지 못할 숙제다.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의 경계(警戒)군 임무였지만, 현 나의 사상은 경계(境界)인으로, 보수도 진보도 아니며 사안에 따라 때로 극우적이며 때론 급진적이다. 어쩜, 그 경계인적 시각이었기에 더 많이 보고듣고 더 많이 느꼈을지 싶다.    

 

지역적으로도 영호남이 고향같지만, 호남이기엔 영남스럽고 경상도이기엔 전라도스러운 딱, 그 짝 - 흑백의 중간 회색이기에 너무도 확실한 가운데 경계, 그러나 흑벽의 확실한 주변이다. 모두에게 내 손을 내밀 수 있으나 아무도 잡을 수 없다. 모두가 내 편이면서 동시에 적, 여기에 적확히 맞는 직업이 참언론임을 너무 늦게야 알았다. 그러기에 보혁의 진영논리에 식상하고 건건이 사안별로, 특히 집권세력을 향한 권력비판과 견제가 최우선되어야한다는 언론 본연의 생각에 변함이 없다.  

 

[※ 관련기사에 모은 5.18자료를 간추리면, 79년 10.26,12.12사태로 계엄령 하에서 정치권과 군부의 갈등이 격화하면서 80년 4월에는 학생들이 대규모로 가세했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서울 32개 대학에서 약 10만 여명의 학생과 군중들이 모였으나 공수부대가 왔다는 소식에 서울대 총학생회 심재철,유시민 등 지도부는 자진 해산을 결정했으나 17일자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새벽에는 전국 대학교의 학생운동권 관련 학생들을 모조리 검거한다. 정치인의 정치활동과 학원휴교령 등의 5.17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5월18일에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정치인이 연행되거나 연금 당한다. 

 

한편, 광주에서는 5월 14일 민주대성회가 열렸고, 이들은, 5월 15일 서울에서의 큰 시위소식을 접하고 16일 다시 거리에 모였으며 여기서 전남대학교(학생회장 박관현) 학생회측은 학교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학교에서 만나자는 행동지침을 마련한다. 광주학생운동은 서울의 학생시위대가 5월 15일 (군대개입을 우려해) 해산한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17일 저녁 10시경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이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한다...]

 

1979년 5월, 부산 병기학교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광주 상무대 보병학교로 배치받았다. 병기병과 주특기를 가진 장기하사로 열아홉살에 내무반장이라는 녹색견장을 찼다. 장교교육를 지원하는 본부근무대대에 배치되어 그해 10.26,12.12를 겪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고등학교 설립자이셨기에 학교 다닐때도 정신적 지주셨다. 동기라곤 전투병과교육사령부 병기근무대 1명, 포병학교 1명, 기갑학교 1명, 그리고 나. 보병학교는 5.18이후 포병,기갑학교와 함께 전투병과학교 로 일시 통합 운영되었다. 교육지원부대에서 보병학교만이 5.18에 개입했기에 동문,동기 통틀어 유일하게 그 현장을 경험한 셈이다.

 

※ 80년 5월 보병학교 및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상황

 

광주에는 동북부에 있는 31사단(사단장 정웅 소장 - 비육사출신)은 전남북지역 경계에 제한한 임무였고, 서북부에 보병학교(학교장 김윤호 소장, 육사10기 출신) 등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사령관 중장 소준열 - 5월에 부임한 육사10기 출신)는 광주지역 경계에 제한한 임무를 가졌던 것 같다.  

 

원래 보병학교장은 장군 전역예정자 가 마지막 임기를 마무리한 자리로, 전두환 소장(육사 11기)의 신군부 멤버 인 육사10기 김윤호 소장도 1979년에 그렇게 부임했다. 그러나 80년 광주사태가 터지자, 후방지원 학교에서는 보병학교 기간병만 유일하게 사태에 개입하게 되었다. 이후 논공행상으로 중장 진급, 1군사령관을 거쳐 대장 진급 후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까지 역임했다.    

 

80년 봄부터 시작된 광주 시내 소요사태에서 경찰 진압이 어려움을 겪자, 경기도 양평에 있는 20사단(사단장 박준병 육사12기출신) 충정부대가 투입돼 진압작전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상무대 영내에서 훈련하거나 대기하며 번갈아 시내를 오갔다. 벌써 전교사 연병장에는 탱크 대기, 헬기 가 수시 이착륙하고 있었다.

 

※ 필자 : 양기용(梁奇龍 량기룡)

 

1960년 3월 전남 보성 출생, 보성남초,중학교 졸업

1979년 2월 경북 구미 금오공고 4회 졸업(301학군단 RNTC4기)

1977,78년 여의도 국군의날 행사 학도호국단으로 참여 

1979년 2월 부산 병기학교 기술하사관 입대, 광주 보병학교 전입

1980년 5월 광주  5.18현장 계엄경계군 소대 선임하사

1982년 조선대 공대 입학,중퇴

1984년 2월 중사 제대

 

1990년대 수협중앙회(은행) 근무, IMF때 퇴직

2000년대 방통대 영문학과 수학

고건 전 총리 실용정책연대 전 사무국장

녹회회전국연합 전 홍보국장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경선 박근혜 후보 특보

2012년 대통령선거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특보 

 

전 유통사업 다향 운영

현 막노동일용직 생업  

인터넷신문 서울포스트 발행인,대표(2005년~현재) 

 

2016년 4월. 서울포스트 창간10년기획캠페인(광화문 대한민국1인혁명) 시행 - 현대사 최초 '혁명'이란 말 사용. '박근혜는 정치에서 손떼고, 새누리당은 쪽박차라!'

10월 최순실,박근혜게이트로 촛불집회 발발, 촛불혁명으로 발전, 박근혜 탄핵구속. 11월 '태극기집회'라는 용어 최초 사용.   

 

↑ 활동 종합 ⓒ서울포스트 양기용

▲ 이렇게 거리로 나가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지금 한국사회... 내가 미쳐가나보다!
ⓒ20160400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이렇게 거리로 나가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지금 한국사회... 내가 미쳐가나보다!
ⓒ20160400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이렇게 거리로 나가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지금 한국사회... 내가 미쳐가나보다!
ⓒ20160408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이렇게 거리로 나가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지금 한국사회... 내가 미쳐가나보다!
ⓒ20160408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이렇게 거리로 나가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지금 한국사회... 내가 미쳐가나보다!
ⓒ20160408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난, 1980년 5월 18일이 일요일로 확실히 기억한다. 그날 오후 금남로 시위가 극에 달한 정도였다. 통합병원 에 입원후송이 확정된 난 간부들까지 영내대기, 장병의 외출외박이 금지된 부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시골에서 책 등 입원물품을 준비하여 올라 온 길, 대인동터미널 에서 내린 난 우연히 몇 개 월 전 방위로 제대한 오일병을 마주쳤다. 대뜸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시민들이 흥분해 경찰과 군인을 보면 죽인다고 하니, 자신이 버스길까지 모시겠다는 것'. 평소엔 터미널 이나 금남로에서 상무대 가는 5번,6번 버스가 있었는데 이날은 광주천변으로 돌아 운행한 모양이었다.   

 

금남로를 가로질러 광주천변까지 걸으며 이날 시위현장을 처음 보았다. 자욱한 최루가스에 도로에 즐비한 보도블럭 파편, 진압군과 시위대가 대치하며 소리지르고 돌멩이들이 날았다.

 

귀대한 18일 저녁부터 부대내는 바빠졌다. 비상상태는 격상되고 모든 장병은 완전군장에 전투화착용 가면상태를 유지했다. 그날 보초병경계는 상무대 영내로 국한되었다. 밤에 이따금 총소리가 들리던 상황에서 우리는 외곽경계를 임무로 개인별 M16 소총에 탄약 420발(수루탄 2발씩은 통합관리한 것 같음), 위장용품을 지급받고, 19일 첫 경계지 화정동 505보안대로 들어가 오후에 광주통합병원까지 진입하고, 질퍽이는 참호속에서 비맞으며 식사를 해결했다. 야간에는 간헐적인 총소리가 들렸다. 다음날(20일) 오전, 영내 병원 응급실 앞에는 공수부대 전투복이 수북히 쌓여 빗물이 핏물이 돼 흐르고 있었다. GMC군용트럭 여러 대가 홀 이 쳐진 채 들락거려 부상자나 시체를 실어 나르는 것으로 나는 생각했다. 

 

통합병원언덕 광주-송정리간 도로는 철책과 바리케이트 로 막고 50기관총을 탑재한 탱크 가 광천동사거리를 향하고 있었다. 이미 방산업체인 아시아자동차에서 장갑차도 탈취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저쪽에선 시민들이 산더미만한 타이어를 쌓고 불을 놔 계엄군의 시내집입을 막고 있었다. (여기 너무도 생생한 그때 장면 사진을 발견해 싣는다.)   

 

벌써 사직동 광주방송국이 불타고, 교도소가 습격 당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폭도들이 교도소를 두고 공방한다는 내용도 전달되었다. 시위대가 경찰서 무기고를 탈취해 무장했다는 소식, 광주는 무정부상태로 폭도들이 강도행위까지 한다는 말도 들렸다. 광주를 통하는 모든 도로와 통신이 차단되었고 언론의 취재보도는 통제되었다. 지도에서 '광주 하나쯤은 없애도 된다'는 소리도 돌았다. 일본 신문 기자가 도청옆에서 사진취재를 하다가 계엄군에 얻어맞고 카메라 도 뺏겼다는 소식.. 어느날엔 광주시민들은 질서있게 (불온 세력과 싸우는) 계엄군에 협조적이며 시내에서 탈취,강도행위는 없다고 보도 되었다. 이때가 계엄군이 일시 퇴각한 21일 전후였을 것이다.

 

계엄군이 빠져 나간 도청에 시민군이 다시 몰렸다. 방송에서는 광주의 질서를 높이 평가했고 시민들 사이에서 북한 김일성은 오판하지 말라는 말도 나왔다. 시위대가 무기를 회수해 반납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이 23일 전후가 더 이상의 희생과 비극을 멈출 골든타임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군 사이에서 투항파와 결사항전파가 대립했고 끝내 해산하지 않은 세력들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광천동 야간 경계중에는 전두환 통닭이 보급되었고 우리는 그 일대와 백운동,주월동 야산으로 경계지역을 장갑차로 옮겨 다녔다. 나중에 전달 받았지만 우리 보병학교 조교들로 구성된 교도대원이 남평간 도로에서 야간경계 중 사전 통보없이 이동한 장갑차를 폭도로 오인해 90미리 무반동총(대전차 공용화기)을 쏴 공수대원 9명 전원이 사망한 사고도 있었다.    

 

헬기에서, 수시로 폭도들은 투항하라는 방송을 하였고 전단지가 살포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새벽, 정적을 깨는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날이 27일이었다고 한다.

 

※ 그간 들었던 여러 말들

 

- 유언비어이니 현혹되지 말 것 : 경상도공수부대가 전라도 사람 다 죽일려고 왔다. 

- 유언비어이니 현혹되지 말 것 : 계엄군이 산모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 냈다.

- 유언비어이니 현혹되지 말 것 : 공수부대원이 여고생 유방을 도려냈다.

 

- 근거가 모호했던 말 : 광주 하나쯤은 지도에서 없애도 된다.

 

= 하달된 전언통신문 : 폭도가 쏘지 않으면 먼저 쏘지 마라. 시민들을 우호적으로 대하라.

= 교도대(보병학교) 병력이 공수부대 장갑차를 (오인)사격해서 전원 사망.

 

내 주관으로,

= 계엄군의 북한군 개입은 거짓말. 일부 또라들만이 설정할 수 있는 가설임.

= 518단체가 최근 주장한 전일빌딩 기총사격 흔적은 거짓말. 헬기가 무력진압용으로 사용되지는 않음.

= 518단체가 최근 주장한 계엄군의 부녀자 성폭행도 거짓말. 죽음을 넘나든 작전에 개자지도 서지 않는 법. (더 자세한 설명 :) 계엄군에 의한 성폭행,강간 등은 당시 유언비어에도 없는 무고(誣告)에 해당된다. 당시 상황은, 계엄군이 일몰진압작전은 하지 않았고, 어디서든 경계지나 대열 이탈은 불가능했다. 또한 항상 시민과 대치한 지역에 있었기에 한적한 장소나 건물내부 등을 수 명이 어떤 경우에도 오갈 상황이 아니었다.       

 

사족, 현장의 계엄군은 세 부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출신지역을 떠나 적극 가담해서 자랑럽스게 영예(?)를 누린 사람.

둘은 비참한 현장의 주범으로서 황폐하게 망가진 사람.

셋은 그냥 그런 상황에서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 사람, 아무 할 말이 없는 부류다.

 

사태가 마무리 되었다. 영내에서도 지급된 탄약 등의 무기들이 입고되었다. 여름으로 가고 있는 날씨 탓에 신기루가 피어난 연병장 건너 콘서트막사에는 연행된 폭도들이 수 백 명 가두리 선 안에서 오갔다. 모두 흰 옷 차림이었다.

 

더더욱 악화된 치질로 만신창이가 된 나는 서둘러 통합병원에 입원했고 6월 2일인가 수술했다. 사태로 부상을 입은 병사들은 해당 지역으로 막 이송이 진행되는 중이었고 지역 부대 부상병과 603병동에는 시민군부상자 위주로 치료가 이뤄지고 있었다. 경계중 유탄에 맞아 내장을 잘라낸 사람, 근접 오발사고로 등뒤에서 폐만 뚫고 젖꼭지로 나온 탄흔에 멀쩡하게 살아 남은 병사도 있었다. 지금도 기억한 김선경 대위(601일반외과  병동과장),최은선 대위(간호장교)... 다시 영내로 복귀하고 진급했을 땐  그동안 잘 살펴 주셨던 선임하사 한 분이 수도통합병원으로 가시게 돼 지금은 국립현충원에 계신다.

 

↑ 1982년인가.. 80년 광주사태 때 탱크들이 대기하고 헬기들이 이착륙하던 상무대 전교사 종합연병장에서 보병학교 기간사병 중대대항 체육대회 축구결승전, 선임하사(중사)로 본부중대팀 을 이끌었던 필자(빨간 스트라이프 유니폼). 2-3으로 교도대 중대에 패했다. ⓒ서울포스트 양기용

 

전두환 대통령 취임 직후 1981년 3월 3일, 전군에 국난국복기장 이 배포되었다. 81년엔 육사 37기 박지만 소위와 동문 선배가 함께 교육 받았고, 83년에는 고등학교 동기와 동문들 소위(39기), 그리고 박근혜정부 때 수경사 장ㅇㅇ 중장도 소위 때 동기랑 조우했었다.    

 

▲ 상무대 보병학교 시절 체육대회 시상식, 우측은 배병노 장군 ⓒ서울포스트 양기용
김윤호 장군 후임 배병노 소장 때 탱크 가 주둔했던 상무대 잔디구장에서 중대대항 축구에 준우승했던 때도 있었고, 전투병과학교로 통합된 후 군수과 사무실은 사령부 뒤 측백나무 숲 테니스장과 수영장이 있는 별장같은 곳으로 옮겨졌다. 제대때는 사령관 표창상신이 있었지만 더 남아있을 사람을 위해 양보했다. 최선을 다한 군생활은 아니었지만, 좋은 하사관으로의 인상은 남긴 것 같다.

 

제대후 광주에서의 생활은 불편했다. 시내 양영학원에서 재수할 때 도청과 상무관앞, 전일도서관과 친구가 근무한 충장로 광주우체국, 은행나무 푸른 금남로를 수시로 다녀야 한 5월엔 더더욱 그랬다. 8,9년 단체생활이 해이해지면서 병을 얻어 시골 녹차밭 산속에서 2년을 생활하고 90년 상경했다.     

 

※ 기타, 소설에 쓸 나의 기억들

 

국민학교,중학교때 우리나라 전체 예산 1조5천억~2억 미만 기억, 사이다 2원 기억, 삼양소고기라면 15원 기억, 고정환율 450원대 기억, 의적 홍길동 국민학생 단체관람 10원 기억, 성웅 이순신 15원, 기억, 성인관람 50원 기억, 변동환율이 되고서 760원대 기억, 1997년 11월 신혼여행 출국시 860원대가 4일 지나서 귀국 후 2000원 육박, 현지에서 카드 로 쓴 돈은 1500원대에 결제, IMF때 퇴직. (60년대 부터 기록된 한국은행 환율자료를 보니 내 기억과 대략 비슷하고 1997년 11월은 960원대로 나온다.)  

 

1980년대 전두환,노태우정권 때 통신공사 등 민영화, 의료보험조합 설립, 각종 사무자동화 등등과 86아시안게임,88올림픽 등등등으로 경기 급팽창, 일자리 폭증, 부조리 청산 등등등등으로 국민경제는 호황이었고 서민은 천국을 맞았다. 박정희의 개발 독재의 이익이 민간에 본격 분배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 군부니까 일사천리로 가능했고 세계에서도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하에서 우리나라처럼 기적적 발전이 지속된 나라는 없다. 지나친 장기집권으로 죽음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 문민정부 김영삼 정부 때 (잘 한 점도 있다지만) 폼만 잡다가 imf를 맞았고, 노무현 참여정부 때 (잘 한 점도 있다지만) 사상 최고로 폭등의 부동산과 국민 홀리는 오락가락 언변에 서민들은 죽을 쒔고, 그 결과 스스로 죽음을 택한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는 이 땅의 역사에서 현재도 마구 뒤섞여 있는 소위 말한 '독재'라는 것과 '민주'라는 것을 잘 음미하고 적절히 사용할 때 나라 개판되지 않았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할 것이다. (龍)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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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8관련 기록 자료 첨부 :  

 

5월 1일 대학의 학원문제가 교외로 확산되면서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부산·대구·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배후에서 조종하던 비상국무회의가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金鍾泌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이러한 배경 아래 5월 18일부터 시작되었다.


[경과]


이 운동이 김대중의 배후조종이나 계획적인 무장봉기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외부의 지시나 조종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기에는 그 발단이 자연발생적이었다.

 

신군부를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이 국민을 억압하려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광주에서의 공수부대 중심의 무력진압이
학생과 시민의 분노를 유발하였고 진압의 강도가 높아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무력저항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로 다시 무력항쟁으로 상승되었다.

 

5월 13일 서울에서의 가두진출에 자극을 받은 광주의 대학생들은 14일과 15일 가두에 진출하였고, 5월 16일 다른 지역에서는 소강국면에 접어들었으나 광주에서는 야간에 횃불시위가 감행되었다.

 

5월 18일 0시 5분경 鄭東年 등 광주지역의 복적생과 총학생회 간부들이 예비 검속되었으며, 1시 경 광주 일원에 공수부대가 투입 되고 각 대학에 계엄군이 진주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결행된 5월 18일의 학생시위는 저항의 발단이었다.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은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였으며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하였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시민들이 군·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 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쳐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시위대는 전라남도 도청을 지키는 군경을 포위하고 접전을 계속하였으며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정보도를 못하였던 MBC와 노동청, 세무서 등이 시위대에 의해 불탔다. 도청과 광주역을 제외한 전 지역이 시민의 손에 장악되었으며 시민에 몰린 공수부대는 20일 밤 11시 경 시위군중을 향해 집단발포를 감행하였다. 광주역 앞의 시위대는 날이 밝자 이때 사망한 두 구의 시체를 리어카에 싣고 도청으로 향하였다.

 

20일부터 도시빈민과 노동자들도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양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계엄군에게 실탄이 지급 되었다. 많은 희생자를 냈던 20일 밤의 충돌로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21일 오전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와 군용차량을 탈취하였다. 이에 계엄군은 정오 경 도청에서 시위대에 조준사격을 하였으며 결국 시민들은 무장을 위해 오후 1시 경부터 화순 · 해남 ·  나주 등 광주의 인근 시외지역에 진출하여 무기를 탈취하였고 농민도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오후 3시 경부터 시민들에게 무기들이 지급되어 계엄군과 시가전이 벌어졌다. 시민봉기가 무력항쟁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생겼다.

 

21일 오후 5시부터 8시 사이에 계엄군은 광주에서 외곽지역으로 퇴각하였다. 5월 22일 아침부터 27일까지 광주를 장악한 시민군은 자치활동을 수행하였는데 23일 오후부터 매일 오후 2시에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어 투쟁목표를 재확인하려 하였다(26일에는 오전 11시 30분과 오후 3시 2차례 개최).

 

그러나 22일 오후 도청에서 도청간부까지 참여하여 구성된 수습대책위원회가 광주시민의 요구를 수렴하기보다는 미온적인 태도로 계엄사령부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원상복구와 사태회복에만 주력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무기 회수를 둘러싸고 수습위 내부는 물론 시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일부 시민은 무기를 반납하였으며 일부는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해 이러한 갈등은 결국 강·온 대립을 낳았다. 이에 강경파 학생들은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수습대책위원회를 비판하고 25일 밤 10시 새로운 투쟁지도부를 자처한 민주시민투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자발적인 시민단체들은 시민자치와 민주주의공동체 구현에 대해 새로운 시도를 하려 했으나 그 기간이 너무 짧았다.

 

27일 새벽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탱크 등으로 무장한 2만5000여 계엄군의 대대적인 무력진압이 감행되었다. 도청에 있던 시민군이 오전 5시 22분에 전원 연행됨으로써 광주지역은 계엄군에 넘어갔으며, 아침 7시 30분 경부터 밤 10시 50분 경까지 가택수색이 이루어져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가 상무대로 연행되었다. 결국 광주민주화운동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막을 내렸다.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검찰부의 1995년 7월 18일 발표에 의하면 그때까지 확인된 사망자는 193명인데 이 중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이다. 부상은 852명으로 확인되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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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 (2007년 3월 서울) 일상의 기록  양기용 기자 (2007.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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