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진단] 사실상 미국 제국주의 식민지인 대한민국(남한)은 한반도 통일보다 영구분단으로 가는 중 (2016/09/08 글)
-SPn 서울포스트, (마이 네임 이스) 량기룡 기자
한반도 통일은 쉽지 않다. 김정은이 주변국들로부터 체제보장을 인정 받아 종신왕국을 꿈꾸기 때문. 따라서 한반도는 평화는 올지 모르나 통일은 까마득하며 분단고착 = 영구분단으로 갈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른바 '대한민국(남한, 한국)'과 '조선민국(북한,조선)' - 서울포스트 가 최초 명명 - 이 그것이다. 지구상 대륙세력(러시아,중국 등)과 해양세력(미국,영국 등)의 충돌지인 한반도는 강대국들이 양분해 위험회피수단으로 삼고 있어 더더욱 시간이 걸릴 문제다.
제2차 베트남 북미회담이 결렬된 것도 북한이 완전한 핵포기가 없는 한 UN제재를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면에 북한과 중국, 남한과 미국의 복잡한 셈법이 깔려 있다. 서울포스트 는 창간 때부터 종종 국제정세와 한반도 문제를 고민해 왔다. 여기 2011년에 쓴 글을 보면, 세상 일이 자기중심으로만 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2019년 3월 1일)
[먼저, 독자들은 제국주의라는 강대국들이 남의 나라를 먹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집요하게 대가리를 굴렸는지, 아래 파란 글씨 '미국-스페인 전쟁'을 읽고 한반도 문제를 생각하기 바란다. 해당 글은 스페인 제국주의를 무너뜨린 후 미국의 본격적인 제국주의시대가 열림을 말하고 있다. 현재 이데올로기 상 한국의 최대 우방국 미국에 대해 '미제,미제국주의'라고 말하는 것이 낯설지 모르나, '미국=제국주의국가'라는 말은 세계가 공공연히 인정하고 있어 전혀 이상할 것이 아니다.
필자는 얼마전부터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시리즈 로 논할려고 했었다. 이제 서울포스트 도 11월이면 정부에 의해 폐간(등록취소)된다. 그러나 미등록 언론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웹 으로 계속 남을 것이다.
1. 한반도는 통일보다 분단고착으로 가고있다
2. 미국과 중국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3.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지향하는 최종목표는?
4. 지구 인구폭발로 식량,자원고갈..세계가 미쳐가고 있다. 지구는 이미 3차대전 진입단계
5. 세계 여성 지도자 창궐시대.. 제3차세계대전은 여성들의 혀로부터
5. 정의는 결국 군사력.. 핵을 탑재한 무인기,드론.. 우주에서 지구로 발사되는 핵무기 시대
6. ....
등으로 엮어 볼 참이었으나, 생업으로 시간이 워낙 없고 인터넷언론 폐간을 앞두고 전문가 흉내를 낼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 포괄적으로 생각나는대로 이 말 저 말 쏟아낸다.] = 필자 주
지금부터 논의할 서울포스트 글은 아시아대륙의 한반도에서 영원히 살아가야 할 한민족이 한번쯤 깊게 고민해야할 글들이다. 이 글에서 일본과 미국의 숨겨진 발톱을 벗긴다고한들 필자가 애국자가 아니다거나 반일,반미주의자라는 얘기는 아니다. 한반도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격투장이 된 지금, 사실상 남한이 미국식민지,일본식민지가 된 지금, 왜 동양의 아시아에 위치한 한국이 서양의 유럽에 있는 미국의 꼭두각시 역할을 해야하는가 깊이 생각해 봐야한다.
남한은 미국군대가 주둔해 있고 전시 작전권도 그들에게 있어 사실상 미국속국이며 식민지배를 받고있다. 핵을 가지고 난동을 부리는 김정은이 큰 문제가 있지만 북한은 중국군대를 들여오지도 않고 오히려 중국에 주권을 당당히 주장하고 있다. 과거 우리 역사를 보더라도 분단된 후 통일까지 수 백년이 걸렸다. 남북한이 갈린지 이제 겨우 70년도 되지 않았고 최근 극렬해진 미국중국 힘겨루기는 한반도통일을 더욱 요원하게 한다.
객관적이어야 할 세계문제도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복잡미묘하며, 배운 게 쇄뇌일 수 있다. 2차대전후 전범국 독일을 동,서독으로 미,소 가 양분했다면, 같은 전범국가 일본을 분단시켜야지 한반도가 대상은 아니었다. 결과가 한반도가 양분되었기에 남한의 김구와 북한의 김일성의 한반도 하나의 국가론은 정당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친미독립운동가 이승만(리승만)을 앞세워 남한만 정부수립을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일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겨 남의 나라 중국 상해임시정부(1919년)때로 하느냐, 1948년으로 하느냐 지금도 논란이 한창이다. 이 문제는 매우 규정하기 어렵다.
독일의 히틀러 와 소련 을 함 봐보자. 히틀러 는 유태인을 대량학살한 인류의 죄인이라고 한다. 독일도 공식적으로 사죄와 사죄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인 전체가 나치주의에 대해 그토록 부끄럽게 생각할까? 당시 유럽은 유태인들로 인한 민족주의가 위협당하고 있었고 공산주의 볼셰비키(볼세비키)혁명에 성공한 소련의 팽창에 의해 전제군주주제가 위험할 지경이었다. 공산주의를 극혐오한 히틀러 가 소련을 침공하였고 이것이 2차대전의 백미 '독.소전쟁'이다. 독소전쟁은 인류가 만든 가장 처참한 전쟁이었고 가장 비극적이었다. 가장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지금도 내심 히틀러 를 존경하는 사람은 지구상에 많을 것으로 난 확신한다. 또한 따지고보면 히틀러는 자본주의의 대변자이고 수호신이었다. 대지주자의 자본주의 기원인 전제군주제가 혁명에 의해 전복된 나라는 소련과 중국,프랑스 등이며, 조선은 1894년 전봉준이 중심이 된 동학농민혁명이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념은 미국과 러시아,중국이 대결로 가서 전쟁을 벌이기 위한 명분일 뿐이지 사실상 국가통치와 경제,복지방식은 대동소이해졌다. 미국은 전쟁무기를 생산,소모하고 직업군인을 전장에 보내는 것이 국가경제를 위한 가장 큰 일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그들의 평화라는 웃음 뒤에 남의 나라 피와 눈물을 매우 사랑한다고 보면 무리가 없다.
다시 한반도문제로 와서, 미국 주도적으로 한국땅에 배치할 사드체계는 북핵 견제 뿐만 아니라, 국정책임자들은 대한민국(남한)을 미국제국주의에 파는 매국행위 - 미국의 아시아대륙 침략, 세계 식민지화 전략의 첨병이자 꼭두각시일 뿐이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작업이 진행될 때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판 당시의 '애국자'들을 우리가 지금 뭐라고 하는가. 그러니까 세월만 다를 뿐 일제시대(일본제국주의시대)나 미제시대(미국제국주의시대)는 그 목적이 다를 바 없다.
일제 때도 그랬다. 조선의 자주적 발전이 없었어도 일본에 의해 눈부신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지금 미제 때도 마찬가지다. 미국으로 인하여 한국의 경제성장은 눈부셔 G20국가에 들어 갔다고.
[※ G20 : G는 영어로 모임을 뜻하는 Group의 약자이며, 20은 회원국의 수를 의미한다. 즉 G20(Group of 20)은 선진 7개국(G7: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과 유럽 연합의 의장국각주주) , 신흥 공업 경제 지역에 속하는 12개국(한국,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멕시코,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터키)을 합한 20개국을 일컫는다.]
한반도 문제를 심층진단하기 위해서는 현재 국제관계에서 군사적 대립과 100여 년 이전의 제국주의가 창궐할 때 세계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미국은 러시아 를 견제하기 위한 명목으로 지구상 여러나라에 전략핵을 배치하고 러시아 인근 나라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지금은 노골적으로 중국까지 포함했다.
미국 핵 배치가 된 곳은 북극,알래스카, 터키,독일,네덜란드,이스라엘 등이 있고 잠재적으로 일본이나 동유럽국가에도 추정할 수 있다. 미국은 소련이 붕괴돼 이후 냉전이 화해된 가운데서도 핵과 군사력을 러시아 를 겨냥해 증강해 왔으며 타국의 핵보유는 금지해 왔다.
지금 나이들어 공정하게 생각해보니, 러시아 가 우리가 배운대로 악명 높은 나라가 아니다. 그간 국제적으로도 악행을 한 것도 뚜렷하게 없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러시아 의 경우, 주변국가간 연합을 하였지 자본주의라는 서구 국가나 미국처럼 바다 건너 외국을 공공연히 침략하여 식민지를 두지 않았다. 중국도 주변국을 잡아먹는 식민지정책 보다는 오늘날의 통일국가를 만들기 위해 내부적으로 싸웠을 뿐이다.
100년 전 상황을 볼까? 영국,스페인,프랑스,네덜란드 등 유럽의 제국주의가 팽창하면서 이들 나라들이 가장 먼저 아프리카를 나눠 먹고, 스페인이 필리핀 과 남미를 먹는 사이, 영국은 북아메리카에 미국을 건설했다. 이후 영국은 영연방국가를 만들어, 미국, 캐나다,호주 등의 형제국을 두었다. 유럽 국가들은 아시아에도 진출해 인도, 동남아는 이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유럽국가 중 식민지 정책에 별 신경을 쓰지 않은 이탈리아 와 독일은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유럽을 통째 먹을 구상을 했고, 아시아 제국주의임에도 조선반도만 먹고 동남아시장을 유럽에 빼앗긴 일본은 2차대전때는 아예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전체를 지배할려고 했었다.
이후 문제는 세계 식민지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미국이다. 이때 미국은 태평양이라는 해양을 지배하고 서진하여 아시아 대륙을 계획했다. 하여 1900년 하와이 를 합병하고, 이미 필리핀 에서 스페인 을 격파한 미국은 1905년엔 아시아 맹주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여, 미국이 필리핀 지배하는 것을, 일본이 조선반도를 지배하는 것을 서로 용인하기로 했다.
흥미로운 것은, 아래 미국-스페인 전쟁에도 우리나라 천안함같은 '메인호 침몰사건'이 나온다. 미국이 함선의 침몰을 스페인 에 둘러 씌워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은 결백을 주장해 왔다. 베트남전도 북베트남(월맹)이 '통킹만사건'으로 미함선을 공격했다며 미국이 베트남에 전면전으로 개입하지만 이것도 미국 조작으로 명백히 드러났다.
지금 미국의 세계화전략은 1.유럽에선 미국의 대리기구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두어 러시아를 견재하고, 2. 중동지역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이 활동하며, 3. 아시아지역에서는 미국 독자적이 작전을 수행한다는 전략같다.
3의 경우가 한반도에 직접적인 미국 영향이 미친 곳인데, 미국은 중국을 분할할려는 전략으로 중국과 국경을 접한 주변국에 친미정권을 심을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일본이 그 첫째고, 남한이 두번째다. 베트남은 실패했고, 미얀마(버마)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 최근엔 라오스 를 택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선 철저히 강대국논리가 적용된다. 가장 강력한 군대와 무기를 소유한 나라가 강대국이라는 얘기는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龍)
미국-스페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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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아메리카-에스파냐 전쟁, 미국-에스파냐 전쟁, 미서전쟁 등으로도 검색해도 모두 들어올 수 있다.
Spanish-American War
Guerra Hispano-estadounidense(스페인어)
美西戰爭 한자
米西戦争일본어
목차
1. 개요2. 배경
2.1. 미국과 스페인의 쿠바 대립2.2. 쿠바 독립전쟁2.3. 메인호 사건
3. 경과
3.1. 카리브 해 전역3.2. 필리핀 전역
4. 결과
1. 개요[편집]
1898년, 미국과 스페인간에 벌어진 전쟁. 제국주의의 시대를 열었던 스페인이 신흥국가의 대표주자로 급성장하던 미국에게 참패하여 시대가 바뀌었음을 알린 전쟁이었으며 미국 제국주의가 본격화되었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한자 문화권 국가에서는 '미서전쟁'이라고도 한다. 스페인의 한자 표기인 '서반아(西班牙)'에서 따온 이름.
2. 배경[편집]
2.1. 미국과 스페인의 쿠바 대립[편집]
쿠바는 16세기 이사벨라 1세 당시 스페인의 카리브 식민지배 초창기부터 이스파뇰라와 함께 가장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쿠바 섬을 차지함에 따라 스페인은 플로리다 해협을 통제하고, 멕시코 만으로 들어가는 항로를 차지할 수 있었기에 서인도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으며, 스페인 자본에 의한 플랜테이션 농업도 성행했다. 얼마나 부유한 섬이었는지, 7년 전쟁 당시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스페인 총독부를 점령한 영국은 총독부에서 노획한 재화로 막대한 전비를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페인의 국력이 쇠퇴되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스페인이 식민지 관리를 거의 못하게 되자, 미국이 "서반구에 개입하지 마라"라는 먼로 독트린을 내세워 유럽열강의 아메리카 개입 반대를 천명했고, 쿠바에서도 독립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다른 중남미 식민지는 관리 부족으로 인해 사실상 포기한 스페인도 쿠바의 독립만큼은 결코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는 10년 전쟁(1868~1878)에서 쿠바 독립군을 격파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미국은 독립 이후 국가적 확장이 시작되면서 일찌감치 쿠바 섬을 노리고 있었다. 쿠바의 전략적 중요성과 경제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때문에 미국은 1853년 스페인에 1.5억 달러에 쿠바를 매각할 것을 제의했다. 생각해보면 이 가격은 루이지애나나 미국-멕시코 전쟁 후의 텍사스 + 캘리포니아 + 애리조나 + 네바다 등등의 헐값 매각(1500만 달러)의 10배나 되는 가격이었다. 720만 달러의 알래스카의 20배 가격이고. 미국은 일찌감치 스페인과 협상을 통해 1819년에 플로리다를 양도받은 적이 있어서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했으나 스페인의 반응은 "너님 미쳤음?" 쿠바의 경우 그 다음 세기 프랑스의 알제리 같이 당시 스페인인들 머리 속에서는 단순한 해외 식민지가 아니라 수 백년 동안 꾸준히 투자를 하고, 이민을 보내고, 현지 사회를 기르면서 육성한 자국의 정당한 고유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페인의 거부와는 별개로 쿠바 섬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높아져만 갔다. 쿠바 플랜테이션 자본은 대부분 미국 자본으로 교체되었고, 쿠바 거류 미국인도 늘어만 갔으며 쿠바 경제의 미국 예속이 심화되었다. 스페인으로서는 대서양 건너 쿠바 식민지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있어 미국보다 열세인 건 당연했으나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2.2. 쿠바 독립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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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80년의 소규모 무장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이래 잠잠했던 쿠바 독립세력은, 1895년을 기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키며 쿠바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미국계 자본의 자금 및 군수품 지원을 등에 업은 쿠바 독립주의자들은 지난 전쟁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맹렬하게 싸웠으며, 스페인 역시 독립을 막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총력전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바다 건너에서의 전쟁은 스페인에 불리했던 데다, 당시 스페인의 국력은 대규모 전쟁을 치루기엔 마땅치 않을 정도로 군사력이나 경제력 모두 엉망이었으며, 군대의 질적 수준 또한 유럽의 2류 내지 3류 취급을 받고 있었다. 약 3년여에 걸친 전쟁 끝에 쿠바 독립군은 쿠바 섬의 상당부분을 확보했다. 그러나 아직 결정적인 승리는 하지 못한 상태였다.
2.3. 메인호 사건[편집]
1898년 1월, 미국은 쿠바 주재 자국 거류민의 안전 확보 및 보호를 위해 전함 USS 메인[1]을 아바나에 급파했다. 그런데 2월 15일, 메인호가 아바나 항만에서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약 260명의 미 해군이 죽었으며, 미국은 커다란 충격과 함께 진상조사에 나섰다. 미국 조사단은 조사 결과 기뢰에 의한 공격이라고 발표했다. 반면 스페인은 공동조사를 제의했으나 미국이 거부, 단독조사하여 석탄저장고의 자연발화에 의한 탄약유폭이라고 발표했다. 결국 양국의 입장차이는 확연히 드러났고 미국의 여론은 복수를 외치고 있었다.
사실 메인호 침몰은 1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미스테리다. 기뢰설, 자연발화설, 보일러 폭발설 등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으나 시대, 조사 주체 등에 따라 다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다만 당시 미국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던 스페인이 의도적으로 공격했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 중론이기에 미국의 자작극이란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물론 지금과 같은 미국이라면 200명의 자국민을 희생시킨다는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는 사람 목숨, 특히나 군인은 장기판위의 돌이나 다름이 없던 시대였다. 전함의 손실 역시 문제는 200명의 희생이였지 당시 떠오르는 신흥 산업 강국이였던 미국의 입장에서 그다지 큰 피해는 아니였다.
또 다른 가설은 항만방어용 기뢰가 우연히 유실, 흘러가다가 하필이면 메인호 근처로 다가가서 폭발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에서 철판이 안쪽으로 휘었다는 점과, 스페인이 메인호를 의도적으로 격침시킬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지지를 받고 있으나 증거는 없다.
어쨌든 사건 당시에 미국은 이 사건을 스페인에 의한 것으로 몰아갔다. 4월 19일, 미 의회는 쿠바 독립에 대한 절대적 지지와 함게 모든 노력을 다해 쿠바의 독립을 도울 것임을 의결, 사실상 전쟁을 선언했다. 이를 전달받은 스페인 역시 4월 23일에 미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3. 경과[편집]
3.1. 카리브 해 전역[편집]
미국의 전쟁목표는 최우선적으로 카리브 해, 특히 쿠바에 있었다. 6월 6일, 미군은 우선 플로리다에서 가장 가까운 관타나모 만에 진입, 지상의 요새를 함락시켰다. 같은 달 22일, 미 육군 5군단은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의 동부에 무저항 상륙했다. 진격하던 미군은 7월 1일 엘 카네이 전투(El Caney order of battle)와 산 후안 언덕 전투(San Juan Hill order of battle)에서 요격에 나선 스페인군을 완파했으며 쿠바 독립군과 합류, 7월 17일 요충지 산티아고를 함락시키고 스페인군 11,5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로서 쿠바 섬의 스페인 군사력은 사실상 소멸했다.
스페인은 미국에 맞서기 위해 황급히 해군함대를 쿠바로 급파했으나, 본토 방위를 위해 주력함은 다 빼놓아야 했고, 결국 이들 함대는 산티아고 함락 직전에 도주하다가 미 해군에 의해 포착되어 괴멸당했다. 이로서 카리브 해의 제해권은 미국이 장악하게 되었다.
쿠바 섬을 점령하고 카리브 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미군은 만족하지 않고 보다 동쪽으로 나아갔다. 서인도제도의 동쪽 끝에 있는 스페인령 푸에르토 리코가 새로운 타겟이었다.
7월 25일, 미군은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여 푸에르토 리코 섬의 과니카에 지상군을 상륙시켰다. 여기서도 反스페인 게릴라 세력의 도움을 받은 미군은 몇 차례의 전투 끝에 스페인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순식간에 섬을 점령했다. 이로서 스페인 세력은 아메리카에서 축출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바하마 상륙 이후 406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카리브 해에 만족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미 양면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3.2. 필리핀 전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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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국은 카리브해 이외에도 태평양 방면으로의 진출 역시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바로 Manifest Destiny(명백한 운명)이라는 신념에 따른 일련의 확장정책 때문이었다.
애초에 미국은 동부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줄기차게 뻗어나간 나라였다. 원주민을 축출하고 북아메리카 서부마저 미국의 손에 떨어진 이상 이제 바다 말고는 나아갈 곳이 없었다. 이에 미국은 끊임없이 서쪽 바다 태평양으로 함대를 파견해 영역을 확장하려 했으며, 이에 하와이를 속령화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미 알려진 동양 국가들에도 함대를 보낸 바가 있는데, 일본의 쿠로후네 사건과 조선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 신미양요 또한 그 과정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남북전쟁의 수습이 더 중요했는지라 본격적 세력 확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미국-스페인 전쟁의 시점인 1895년쯤 되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당시엔 아시아에서도 청일전쟁 찍고 있던 타이밍이다.
미국이 아시아의 전진기지로 점찍어둔 곳은 필리핀이었다. 필리핀도 이미 마젤란의 발견 이후 16세기 스페인의 카를 5세가 포르투갈로부터 사라고사 조약을 거쳐 획득, 아들인 펠리페 2세가 총독을 보내 수세기동안 꾸준히 통치해온 땅이었다.
필리핀은 아시아 대륙 최동부에 위치한 군도이면서 중국과도 가깝고, 기후와 자원도 풍요롭고, 골골대는 스페인도 통치가 가능할 정도로 저항 세력도 변변찮은 상황이었다. 원래는 남부 민다나오 섬과 서부 술루 제도에 자리잡고 있던 2개의 이슬람 왕국이 브루나이와 연계해 마닐라를 일시 점령하는등 강력히 저항하느라 스페인도 통치에 애를 먹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이 2개의 이슬람 왕조도 국력이 매우 약해져서 스페인이 필리핀을 통제하기 쉬워졌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미국 입장에서 필리핀을 스페인이라는 압제자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명분도 그럴싸했기 때문에 잡아먹기 딱 알맞았다.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집착은 훗날 일본 제국이 조선을 지배할 때 미국의 필리핀 영유를 조건으로 합의를 봐줄 정도로 집요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조선은 있건 없건 미국에게 있어 전혀 상관없는 국가였으므로 필리핀을 영유하지 않았다고 해도 눈감아줬을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의 가치를 미국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20세기 중반 한국전쟁이 터진 이후다.
개전 뒤 불과 1주일만인 5월 1일, 영국령 홍콩에 모여있던 미 아시아함대가 필리핀의 마닐라 만에 출현했다. 4척의 장갑순양함을 중심으로 한 미 함대는 스페인 함대를 급습하여 장갑순양함 2척과 일반순양함 5척, 수송선 1척을 격침시키고 스페인 군의 항복을 받아내며 서태평양에서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더군다나 필리핀 역시 쿠바와 마찬가지로 反스페인 독립투쟁이 한창이었으나 스페인의 우선순위는 쿠바여서 필리핀의 스페인군은 상대적으로 병력도 적고 패배위기에 봉착한 상태였다. 결국 이들은 미군이 본격적으로 상륙, 침공해오자 항복했다. 이후 마닐라 만에는 홍콩에서 발진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4개국 함대가 전개하여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용인했다.
6월 20일에는 미 순양함 USS 찰스턴이 괌을 무혈 점령했다.
필리핀을 순식간에 잃어버리자 당황한 스페인 정부는 본토방위를 위해 대기시키던 주력함대를 필리핀으로 급파했다. 그러나 이들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직후, 미국의 주력함대가 스페인 본토로 기동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데다가 주요 열강이 미국 지지를 확고히 하여왜지? 국제적으로 고립되자 결국 함대를 회항시킬 수밖에 없었다.
4. 결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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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하는 스페인군
카리브 해와 필리핀에서 모두 참패한 스페인은 결국 종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1898년 12월 10일, 파리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쿠바의 독립을 인정하고 괌과 푸에르토 리코를 할양했으며 필리핀은 2,000만 달러에 강매해야 했다.
이는 스페인 식민지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로서 화려한 스페인 제국은 공식적으로 종식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완전히 쫓겨나게 된다. 괌을 제외한 북마리아나 제도는 여전히 스페인령이었으나 사실상 의미가 없었으며, 그나마 패전으로 인해 유지할 능력이 없던 스페인은 세력확대를 꿈꾸는 독일 제국에게 역시 마지막 식민지를 파는 형태로 포기해야 했다. 독일 제국은 스페인으로부터 사들인 북 마리아나 제도를 자신들의 식민지인 독일령 뉴기니에 포함시켰다. 이 전쟁으로 스페인은 3류 국가로 전락했으며, 식민지를 모두 잃어버린 스페인은 이후 지브롤터 해협 건너의 북아프리카 모로코 식민지 개발에 치중하게 되지만 이조차도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독립시킨 게 꽤 되고 현재는 모로코에 있는 세우타, 멜리야 등의 몇몇 도시와 대서양 일대의 몇 개의 섬만 해외영토로 유지하는 중.
미국은 카리브 해의 패권을 차지하여 먼로 독트린을 무력으로 실현시켰다. 또한 필리핀을 차지함으로서 서태평양과 아시아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로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에 걸친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스페인이 이 시점에서 몰락하고, 그 왕관을 미국이 넘겨 받았다고 생각하면 쉽다. 그러나 필리핀인들이 지배자만 바뀌는 사태를 맞이하려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니 이들은 미국에도 저항했고 결국 또 다시 충돌이 벌어진 끝에 필리핀 독립세력은 괴멸당하고 만다. 에밀리오 아기날도 대통령을 위시해서….
정확히 말하면 미국이 오기전에 이미 필리핀은 독립 상태였고, 정부와 대통령도 갖추고 있었다. 미국은 종교 전파 + 민주주의 전파를 핑계로 필리핀을 식민통치 했으나 필리핀은 이미 개종된 가톨릭 국가였고 + 아시아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였다.(…)당시 필리핀 남부와 서부에 이슬람 왕조가 들어서있었지만 얘네들은 자신들을 필리핀에 속해있다고 보지 않았다. 독립된 필리핀 공화국 측도 관심은 없었던 듯 하고... 물론 식민지통치기의 미국은 다른 식민국가들에 비하면 온건한 지배였다지만 전쟁 중에 벌어진 만행은 결코 다른 식민 지배 국가 못지 않아 이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살해된 민간인만 20만을 거뜬히 넘기고 150만이란 자료도 있는 실정이며 미국도 필리핀이나 쿠바에서 실컷 경제적 기득권 차지하고 자국 기업들 배불리던 것은 다른 식민국가와 전혀 다를 게 없어서 미국 내에서도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고 엄청 욕을 먹었다.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비난하던 작가 마크 트웨인은 처음에 이 전쟁을 지지했다가 조국도 학살과 식민지배를 되풀이하는 것에 경악하게 된다. 미국은 엄연히 유럽과 다를 게 거의 없는 제국주의 국가였다. 끼어드는 시기가 늦은데다가 20세기 중반 이후 냉전의 주체가 되면서 유럽 식민지 해체에 앞장선 덕택에 겉으로는 좀 더 양심적인 것처럼 보였을 뿐. 그래서 전쟁을 위한 기도라는 책자에서 미국과 상층부를 격렬하게 깠다가 24년이나 출판금지당하게 된다. 반미주의자들의 미국-멕시코 전쟁 버금가는 최대 떡밥중 하나이지만 맞는 소리이니.
여담으로 아기날도등의 필리핀 독립 세력은 1902년까지 모두 제압되지만 오랫동안 스페인을 괴롭히며 독립을 유지하던 남부와 서부의 이슬람 왕조들은 1912년경까지 저항한다. 미국은 겨우겨우 이슬람 왕조 자체는 제압했지만 잔존 세력은 현재까지도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다.
반면 1902년 미국은 쿠바에게 제국주의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과시할 요량으로 쿠바를 으로 쿠바를 자국에 편입시키는 대신 쿠바를 주권 국가로 독립시켰다. 일부 미국 사가들은 쿠바를 푸에르토리코처럼 미국에 귀속시켰어야 했다며 쿠바 독립을 미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 실수 중의 하나라고 평하고 있다. [2].
그러나 대서양-태평양 두 대양에 걸친 국가를 건설하다보니 해군력의 분산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아직 열강국가에 비하면 허약했던 미국의 해군력을 괜히 분산시키다간 참패할 것이 분명했는데, 그렇다고 전력을 집중시키면 나머지 한 쪽 대양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돌아가는 길은 너무 멀었고, 결국 미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게 된다.
한편, 전쟁과 연관이 없던 독일은 마닐라 만 해전 직후 가장 적극적으로 함대를 파견해 미국을 엄호하고 스페인 세력 축출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덕분에 1899년에 북마리아나 제도를 식민지로 얻게 된다.
전쟁의 당사자였던 쿠바는 1902년까지 미국의 군정을 받다가 독립했다. 그러나 관타나모를 미국에 헐값으로 임대해야 했으며,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서 미국의 입김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무늬만 독립국인 식민지였단 이야기. 이는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전까지 쭈욱 유지된다. 그러나 관타나모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미국이 이용 중이다.
일본도 엉뚱하게 이 전쟁의 혜택을 얻었다. 부족한 해군전력으로 독자적인 필리핀 방위를 보장할 수 없었던 미국이 카츠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과 서로 필리핀과 한국의 지배권을 상호 인정한 것이다.
존 밀리어스 감독, 톰 베린저 주연의 TV 영화 Rough Riders(1997년)가 이 전쟁에 참전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그의 의용군을 다루고 있다.
이원복은 가로세로 세계사에서 미국뽕을 먹은 거 자랑하는지 필리핀에서 벌인 미국의 학살은 일절 언급하지 않고 미국은 다른 제국주의 나라랑 다르다능 하악하악이라는 미국뽕 찬양이나 해서 욕을 먹기도 했다. 하긴 이 책 동남아편에서도 크메르루즈와 폴 포트는 신나게 욕하고 당시 미국이 저지른 무차별 폭격으로 죽어나간 라오스나 미얀마 민간인들에 대한 건 일절 언급하지 않듯이 미국뽕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으니 당연히 이 필리핀 학살은 아몰랑 덮어버렸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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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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