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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국제정세② - 미국은 왜 '미얀마'를 선택했나?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2/01/06 16:20:02)

[신년특집] 국제정세② - 미국은 왜 '미얀마'를 선택했나?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수자로 표기된 나라는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가 언제든지 충돌할 수 있는 지역이다. ⓒ자료사진

냉전시대 강대국의 대리전 치른 한국,베트남 내전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로 그 세력을 팽창하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좌우 대륙인 남미와 아프리카로 기세를 확장해 갔다. 가장 활발한 나라가 무적함대를 앞세운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아시아로도 눈을 돌려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고 환태평양을 돌아 북미대륙 서해안, 중남미 태평양 연안국가들까지 손에 넣는다.

공교롭게도 일본과 조선은 스페인의 길을 피했다. 일본의 팽창과 스페인으로선 극동의 추운지역이라는 불리함도 작용했을 것이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샌디에고' 등의 지명은 스페인 정착 흔적이다.

한편 북아메리카 동부에 건설한 미국은 멕시코 땅 텍사스를 손에 넣고 서부 개척을 마무리한 다음 태평양으로 진출한다. 하와이와 괌을 차례로 합병한 후 동방대륙으로 진출하자니 필리핀에서 스페인과 충돌할 상황이 생겼다. 극동에서 일본이 세력을 키우는 것을 이용, 가쓰라-테프트 조약에 의해 일본이 한국을, 미국이 필리핀 지배(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사들이고 스페인은 동양에서 손을 뗌)를 공식화한다.

2차대전 패전국이 된 일본은 연합국에 무장해제 당하고 한국에서 물러간 후, 미국은 한반도가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분할 점령을 제안했으며, 일본에 패한 경험이 있는 소련이 이를 수락했다(1943년 미,영,중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독립결의, 1945년 미,영,소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5년 신탁통치 선언). 남한이 친탁반탁 운동을 거쳐 정부수립 후,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 선언을 통해 미국은 한국을 극동방위라인에서 제외시킨다. 6.25전쟁을 거쳐 현재 한반도 남부는 소련과 중국을 견제한 미국의 군사적 방위라인 역할을 하고 있다.

베트남을 봐보자.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베트남은, 2차 대전 후 민족자결주의 대세를 몰아 연합국이 중국에 베트남 문제를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북위 17도 북쪽은 공산당이 점령하고, 남쪽은 지도자 공백에 혼란이 계속되자 프랑스가 재무장하여 '북'은 비엣민, '남'은 프랑스가 장악하여 8년 전쟁(1946-1954)을 치른다.

1954년 제네바 휴전협정으로 베트남 전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했지만 프랑스가 이를 이행하지 않는다. 이에 남베트남 내 갈등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 과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으로 고조되자 미국이 베트남공화국 편에 개입하게 된다.

이 전쟁은 1955-1975년까지 연합군 연 250만명이 투입돼 20년 간 계속되었으나 베트남 기후적 특성(우기와 정글)을 극복하지 못한 미국이 사망자가 계속 증가, 자국내 여론악화로 철수함으로써 종료된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미국,영국-소련,중국 간 냉전시대에 대표적인 대리전 양상을 띄었지만 둘 다 내전으로, 베트남은 통일, 한국은 분단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결국 세계의 패권은 미국과 중국 싸움이다는 증거다. 두 전쟁이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본다면,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해상로가 확보된 접경국가와 꾸준한 관계 개선을 모색할테고 중국도 그런 나라를 영향아래 둘려는 정책을 펼 것이다.

실제 미국은 아시아권에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다. 중국과 접경국가인 핵보유국 파키스탄과 밀월관계를 유지했지만 최근 급속히 냉각되는 분위기다.

▲ 힐러리 장관(파란 옷)이 버마 지도자들을 만나고 있다. ⓒ자료사진

파키스탄 버리고 미얀마 선택?

지난해 말 힐러리 미 국무장관은 미국 주요 인사로는 50여년 만에 미얀마를 방문, 2박 3일 머물며 대대적인 공을 들였다. 아웅 산 수 치(Aung San Suu Kyi) 여사를 만나고, 새 수도 '네피도(Naypyidaw)'에서 '데인 세인'(Thein Sein) 대통령과 지난 40년 군정을 끝낸 민주화 조치를 환영하고 경제제재도 대폭 완화하기로 했다.

또 대사급 외교관을 파견해서 20년간의 비정상적 관계를 정상화하고 각종 지원도 늘릴 것을 약속했다. '미얀마는 핵개발 협력 등 (밀월관계에 있는) 북한과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하며, '미국의 개입으로 버마의 민주화 속도가 빨라지길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즉, 중국 견제, 미얀마 민주화세력에 대한 지원, 북한 견제 가 깔려있다. 올 초에는 영국의 헤이그 외무장관도 50여년만에, 소로스 도 자선관계 일로 방문했다.

미얀마(옛 버마 Burmar, Union of Myanmar : 1989년에 국호를 바꿨으나 아직도 민주화세력은 버마, 군정은 미얀마라고 부름)는 연방국가다. 4800만 인구에 90%가 불교를 믿고 있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아직도 친중국의 실질적인 군사정권이며 현재 정부군과 카친 독립군의 전투가 재계되어 있다. 미국의 전략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마얀마가 도미노식 공산화 되는 것을 막는 '애치슨 라인' 유지의 연장이지만, 중국의 미 해군 태평양,인도양 지배 저지 전략인 '도련전략'과 충돌한다. 물론 군사력이나 지역적 여건상 무력으로 중국은 언제까지나 미국에 적이 되지 못한다.

미얀마는 여러가지 국가적 상황,규모,여건들이 내전 전의 한국,베트남과 똑같다. 이라크에서 철수한 미국이 현재 중국의 영향아래 있는 미얀마를 민주화 명분으로 지원한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 미국은 광물자원이 풍부한 서아시아를 충분히 견제하고 농산물이 넘쳐나는 동아시아에 눈을 돌릴 가능성이 많다. 중국과 접해 있으면서 후방 해상로가 확보된 분쟁국 - 정확히 미얀마 다. 이는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을 다양한 방법으로 압박하기 위한 수단도 된다. 따라서 추후 미국이 주도하는 대규모 지상전은 미얀마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너무 앞서나가는 것일까.

이래저래 결국 아시아는 서방세계의 동방진출 이래 세계의 패권을 꿈꾸는 미국과 가장 많은 나라와 국경을 접해 세계의 중심임을 자랑하는 중국의 끝없는 경쟁이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군사력이든 자본력이든 민족적 자부심이든. (龍)


[아래, 검색으로 참고할 사항들]

▲ 미국의 '애치슨 라인' ⓒ자료사진
■ '애치슨 라인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 애치슨 선언)'은 1950년 1월 12일에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이 한 선언이다. 여기서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은 그 선언에서 발표된 미국의 극동방위선이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하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한국과 타이완, 인도차이나반도가 미국의 방위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그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 중국의 '도련(島鏈) 전략' ⓒ자료사진

■ '도련(島鏈) 전략'은 1980년대 류화칭(劉華淸) 당시 중국 해군사령관이 밝힌 해상방위라인 전략이다. 도련은 '섬 사슬'을 의미하는 해양방위 경계선으로, '제1 도련'은 오키나와~대만~남중국해로 연결되고, '제2 도련'은 미국령 사이판~괌~인도네시아로 이어진다. 당시 류 사령관은 "2010년까지 제1 도련 안의 제해권을 확립해 내해(內海)화하고, 2020년까지 제2 도련 내의 제해권을 확보하며, 그리고 2040년까지는 미 해군의 태평양·인도양 지배를 저지한다"고 공언했다.

▲ 한국전쟁 ⓒ자료사진

■ 한국 전쟁(韓國戰爭)은 1950년 6월 25일 이후 발생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전쟁 또는 내전이다. 대한민국측 견해에 의하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한반도를 지나는 북위 38도선 이북을 점유하고 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이남의 대한민국을 남침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이라 한다. 1953년 7월 27일의 정전 협정으로 말미암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중이지만, 휴전 이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국지적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치른 냉전시절의 양대 전쟁의 하나로서, 미군은 한국전쟁에서 3만여 명이 사망했다. 전쟁의 성격을 두고 내전인가 외세가 주가 된 전쟁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한국 전쟁 중의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나 노근리 사건 등의 양민 학살 사건, 정치인 납북 사건, 협력자 사살과 인민재판, 한국군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 다양한 호칭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는 6·25 사변(六二五事變)(정부의 호칭) 혹은 6.25 전쟁(六二五戰爭)[4], 그 밖에 한국전쟁,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동란(六二五動亂)이라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으로 부른다. 초기부터 80년대까지는 6.25사변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80년대 민주화투쟁시국의 진보적 지식계층에서 외국(특히 미국)의 문헌에 등장하는 "Korean War"를 타국의 사건을 다루듯 직역해서 "한국 전쟁"으로 번역보급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어 각종 학계와 언론, 출판계에서까지 따라 사용하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한국 전쟁'이라는 호칭은 이 전쟁이 마치 제3의 국가에서 벌어진 듯 보이게 하는 점이 문제라고 주장한다.[5]

다른 국가들은 조선 전쟁(일본어: 朝鮮戦争 (ちょうせんせんそう), 일본), 항미원조전쟁(중국어 정체: 抗美援朝戰爭, 중화인민공화국), 한국/조선 전쟁(Korean War[6]) 등 입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미국에서는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알려지지 않는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불리기도 한다.

◇ 남한의 피해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또한 미군에 의해 피난민들이 학살당한 노근리 학살사건, 거창 주민들이 북한군 부역자로 몰려 학살당한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한국군의 대표적인 전쟁 범죄인 보도연맹 사건,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 강화 양민학살 사건, 대중선동으로 북한군들이 우파들을 죽인, 소위 인민재판 등의 전시 민간인 학살피해자, 즉 전쟁 범죄 피해자들도 발생했다. 이러한 민간인 피해 및 전쟁범죄 사건의 규모는 극히 최근에 공개된 것이다.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평판을 크게 실추시키는 실정으로 비판받았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폐허가 되었으며 특히 일제가 만들어 놓은 북한 지역의 대규모 공업지역은 융단폭격을 당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한강의 다리는 모조리 끊어졌으며 수많은 전쟁고아가 양산되었다.

전쟁을 통해, 아직 꼴을 갖추지 못했던 국가는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경제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전쟁 이전부터 이승만정권의 이념이었던 반공주의가 더욱 극심해져, 한국의 우경화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한국 전쟁은 이승만이 예상했던 대로 위기의 이승만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으며, 북한의 김일성에게도 같은 결과를 가져다 줬다.

▲ 베트남전쟁 ⓒ자료사진

■ 베트남전쟁(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 - 1946년 12월 19일부터 1954년 8월 1일 디엔비엔푸 요새 전투까지 프랑스와 비엣민간의 전쟁으로 프랑스-베트남 전쟁(the Franco-Vietminh War) - 후, 이듬해 1955년 다시 시작된 전쟁이다.

베트남 전쟁(베트남어: Chiến tranh Việt Nam/ 戰爭越南)은 1955년 11월 1일에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시작된 전쟁이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공산군에 의해 함락됨으로서 종전되었다. 월남전쟁,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한다.

국제사회는 제네바 회담(1954.4월)을 통해 새로운 선거에 의해 베트남 독립을 약속하게 되며, 1954년까지를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결기간으로 간주한다. 전쟁이 끝나고 북에는 호치민(Ho Chi Minh 胡志明)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남에는 카톨릭교의 프랑스 유학파 바오 다이(Bao Dai 保大) 황제를 총리로 하는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졌다. 대부분의 전투가 북베트남 통킹에서 벌어졌지만, 충돌은 전국으로 이어졌고 이웃한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되었다.

1955년부터 1975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은 민족적인 공산주의자들인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싸운 내전의 성격이 있는 반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이에 맞서 중국과 북한도 비공식적으로 각각 전투원을 파견하여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전쟁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냉전 기간의 대표적인 전쟁이다.

결국 반전 여론과 불투명한 전세에 미국은 휴전 협정을 맺고 베트남 전역에서 퇴각하지만,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베트남 해방전선은 전쟁을 재개하여 사이공을 북베트남군이 점령하고 남베트남 정부 대신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가 세워지면서 끝이났다. 대한민국에서는 한자를 한국어식으로 음차한 월남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이 전쟁으로 남베트남 민간인 사망자 수는 1,581,000명 정도로 추정되며, 캄보디아 민간인 사망자도 700,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또한 라오스 민간인 사망자 수도 50,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미군 사망자는 대략 6만여 명이다. 대한민국에서 참전한 군인도 5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한국,베트남전쟁 피해상황 ⓒ자료사진

[기사 송고처 : 미국(워싱턴포스트), 중국(인민일보), 독일(빌트), 일본(요미우리), 베트남(베트남뉴스), 홍콩(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수집·정리·편집]=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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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독자의견 (총 1건)
ss ssss  l  2014.08.17
불교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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