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정신나간 보수단체 vs 현역으로 겪은 5.18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79년부터 군생활을 시작한 상무대 보병학교는 내가 국민학교 때 견학을 갔던 곳이기도 하다. 벌써 32년, 5.18까지는 31년 전 일이다.
80년 5월 18일은 일요일로 시골(보성)을 갔다가 올라오는 길이었다.
터미널 도착 시간이 5시쯤. 귀대를 하려고 금남로로 가다가 부대 방위제대(오 일병)병을 우연히 만났다. 그는 다급한 소리로 "양 하사님, 군인들 혼자 다니면 큰 일납니다. 지금 군인이건 경찰이건 시민들이 가만 두지 않아요. 제가 버스길까지 모셔다 드릴테니 따라 오세요" 하면서 광주천변까지 가 6번을 타고 귀대했다. 지나 오면서 도청쪽을 쳐다보니 금남로는 자욱한 최루가스와 깨진 보도블럭 그리고 시민들로 꽉 차 있었다.
이미 5.17계엄조치 이전부터 부대는 비상이 걸렸었다. 출동태세는 아니었지만 군장을 꾸려 놓고 피교육생을 지원하는 고유 업무는 제한적이었다.
그 주에도 부분적 외출외박이 금지된 상황인데 고향을 갔다 온 이유는 오랫동안 계속된 치질로, 그 다음주에 통합병원 후송날짜가 이미 잡혀 준비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5월초부터 상무대와 보병학교 연병장은 20사단병력이 충정작전훈련을 하거나 시내로 투입을 반복하다가 계엄선포 전후로 공수부대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 연병장에는 체포연행되어 흰옷이 입혀진 폭도들이 상당수였다.
이미 시내는 광주 KBS가 불타고, 경찰서 무기고가 털리고 폭도들이 교도소를 공략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때부터 장갑차와 탱크는 엔진가동상태로 주둔하기 시작했다.
5월 19일부터는 영외거주자까지 전면 비상대기 상태로 되더니, 21일에는 광주지역에 군의 최고경계령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었다. 전시체제로 전환된 것이다. 내 통합병원 후송도 연기되었다.
방화 탈취 등으로 시내사태가 심각하자 익일 오전 전부대원들에게 탄약(M16 120~480발, 수류탄 2발씩)이 지급되었다. 우리는 화정동 국군통합병원과 보안부대 경계에 들어갔고, 그 다음 임무는 백운동 주월동 일대 야산에서 시민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내무반장으로 소대선임하사 역할을 했기에 경계유지를 위한 소대원현황파악, 보급품, 상황접수 수집 보고 전달이었지만 23일 전후한 며칠은 주간에는 기갑부대에서 공포사격 몇 발, 밤에 간헐적인 총소리외에는 특별한 상황은 발생되지 않았다.
시민군에 돌고 있는 유언비어는 우리에게도 실시간으로 전달되었다. '몇 명이 죽었고, 임산부가 어떻고, 계엄군이 광주를 없애 버린다, 방화, 탈취, 무정부 상태...' 이런 말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과 폭도가 사격하지 않으면 사격하지 말라,는 명령도 하달되었다.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간식을 갖다 주는 등 경계군과 우호적인 관계였었다.
어느날인가는 헬기에서 방송을 하고 삐라가 뿌려지면서 마지막 투항을 종용했다. 그 다음날 새벽(27일)이 총소리가 유난히 요란했던 도청 함락작전일이었다.
계엄경계군으로 10여 일. 비가 온 오떤 날은 통합병원 응급실앞에 공수군복이 수북히 쌓여 핏물이 흘러가는 것도 보았다. 들락거리는 GMC는 알 수 없는 것을 싣고 들어왔다가 알 수 없는 것을 싣고 어디론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보병학교 교도대원들이 공수부대 장갑차에 발포, 9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내용도 전달되었다. 이동경로를 경계군에 알려주지 않아서 발생한 사고로 5.18에서 아군간 최악의 사건이었다.
전투병과교육사령관 중장 소준열, 육군보병학교장 소장 김윤호, 31사단장 소장 정웅, 특전사령관 소장 정호용... 이후 소준열 중장은 대장 예편, 김윤호 소장은 중장, 대장으로 합참의장 역임, 정웅 소장은 예편 후 국회의원, 정호용 소장은 중장, 대장을 거쳐 육군참모총장 예편,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 국회의원 역임했다.
5월 27일 상무충정작전이 끝난 직후 난 통합병원에 입원했고 29일 수술했다. 병원에는 사태관련 부상자들이 넘쳤다. 군생활시 동생처럼 돌봐 주셨던 선임하사는 그 사이 수도통합병원으로 가셨고, 내가 퇴원 후 중사로 진급하여 그 보직을 수행하던 중, (지금은 국립현충원에 계시지만)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뵈었다.
역사는 크건 작건 상호간 작용과 반작용을 거듭면서 시간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난 지금도 5.18이 '광주사태'인지 '광주민주화운동'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당시 총 멘 군인으로서 광주사태 현장을 보고 있었지 민주화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제대 후 (오늘 같은 날) 민주화 인사를 마딱뜨리면 총 한 방 쏘지 않았어도 웬지 껄끄러워 빨리 피하고 싶은 심정이다.
일각의 보수단체에서는 "광주시민 학살은 북한특수부대 소행"이라는 내용의 '광주 5·18사건 유네스코 등재 반대 청원서'를 냈다고 한다. 지ㅇㅇ같은 사람도 보병학교 교도대원들이 공수부대 장갑차에 발사한 90미리 무반동총포 건에 대해 빨갱이 개입설을 주장한 적도 있다. 진보,보수를 떠나 군까지 모욕을 주면서 생각하는 것들이 너무 다른 한심한 인간들이다.
세상은 변화하고 진보한다. 그래야 버릴 건 버리고 새로운 것을 담고 포용할 수 있다. 이 관점으로 본다면 사실 진보가 보수보다 좀 더 아름답다.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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