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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포스트자료] 80년 5.18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 자료사진과 글, 5·18진상조사위원회 문제점 등을 접하며 해 본 걱정들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9/01/14 00:43:36)

[서울포스트자료] 80년 5.18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 자료사진과 글, 518진상규명위원회 문제점 등을 접하며 해 본 걱정들
-SPn 서울포스트, (마이 네임 이스) 량기룡(梁奇龍) 기자

 

↑ 광주-송정리간 도로에 있는 육군통합병원 앞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철수한 계엄군과 시민군들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필자인 서울포스트 발행인(양기용)이 80년 겪은 5.18에서 당시 익히 보았던 화정동 통합병원 앞 현장 사진을 우연히 발견했다. 중앙분리대 화단 끝 시커먼 부분은 시위대가 타이어 등으로 방어선을 만들고 불을 질렀던 광천동사거리, 이 쪽은 계엄군측에서 바리케이트 를 치고 서로 대치한 양상, 뒤쪽에 탱크 가 대기하고 있었다.]

ⓒ서울포스트 가 자료로 사용

 

여기 사진은 5.18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관련 자료 일부로, 처참한 상항을 재고하기 위함이 아니라 기록 목적이므로 지나치게 자극적인 진압 사진이나 피해 사진은 올리지 않은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전라도 사람으로 경상도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교육을 받고 5.18광주사태 때 보병학교 소속 계엄군경계군이었던 난, 계엄주력군인 공수부대만을 옹호할 수 없고 시위대를 옹호할 수도 없다. 반대로 계엄군 일부에서 주장한 북한군특수부대요원의 잠입설을 믿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의 주장도 하고 싶은 마음이다. 또한 희생자의 요구를 무한정 받아 들일 수 있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본다. 어쩌면 우리 보병학교 병력이 아군인 공수부대원 장갑차를 조준사격하여 치명타를 입힌 최악의 사고같은 어중쩡한 입장이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서 5.18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러지지 않는다. 이건 전쟁같은 과거의 생생한 기억을 가진 나에게 평생의 숙제다.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의 경계(警戒)군 임무였지만, 현 나의 사상은 경계(境界)인으로, 보수도 진보도 아니며 사안에 따라 때로 극우적이며 때론 급진적이다. 어쩜, 그 경계인적 시각이었기에 더 많이 보고듣고 더 많이 느꼈을지 싶다.    

 

지역적으로도 영호남이 고향같지만, 호남이기엔 영남스럽고 경상도이기엔 전라도스러운 딱, 그 짝 - 흑백의 중간 회색이기에 너무도 확실한 가운데 경계, 그러나 흑벽의 확실한 주변이다. 모두에게 내 손을 내밀 수 있으나 아무도 잡을 수 없다. 모두가 내 편이면서 동시에 적, 여기에 적확히 맞는 직업이 참언론임을 너무 늦게야 알았다. 그러기에 보혁의 진영논리에 식상하고 건건이 사안별로, 특히 집권세력을 향한 권력비판과 견제가 최우선되어야한다는 언론 본연의 생각에 변함이 없다.   

 

지금 한국사회는 거의 미쳐있다. 자기 목소리 빵빵내는 사람들 중 또라이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정치권이 그렇고 사회단체나 경제단체, 체육계 등도 그렇다. 대부분이 본업에 충실한다고 한다지만, 일부 미꾸라지 같은 사람들이 큰 문제가 됨에도 불구하고 그게 문제가 아니다고 자신들이 생각하고 일부 열혈 지지자들이 또 따르고 용인한다. 문제가 문제가 안되는 한국사회, 문제 안되는 게 문제되는 한국사회에 살면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엿같은 세상의 홍길동처럼 깊은 절망감이 자주 든다.      

 

저번 글에서 언급했지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성향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알릴레오 언행은 매우 잘못됐다. 일개 재단이사장에 불과한 사람이 문재인 정부정책을 옹호하거나 홍보하는 듯한 인상은 국민을 함부로 대하는 - 개,돼지로 보거나 졸 로 보는 행동이다, 상식이 부족한 사람이 너무 많지만. 노무현때부터 만들어진 인맥을 따라 노빠들이 정치사회 전반를 장악하니 자연스럽게 정상인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꼴리는대로 하겠다는 독재적 발상이다. 따라서 재단이사장 자격으로 썰들을 내뱉는 것은 옳다그르다를 따지기 이전에 중지되어야 하고, 직을 버린 다음, 자연인으로의 언행은 문제될 것이 없다. 청계재단이사장이 설친다면 어쩔 것인가.

 

5.18진상규명위원회문제도, 야당인 자유한국당 성향 지만원씨 또한 국민을 졸로 보는 행위다. 말같지 않은 소리를 지껄이면서 그 위치에서 굳건한 것도 문제다. 80년 5월, 광주에 북한군특수부대 600명이 내려와 활보할 정도로 대한민국 군인과 정보기관이 허술하고 나약했겠는가. 그 수 백 명이 1주일을 어디서 쳐먹고 잤다는 말인가. 오히려 계엄군에서 사태를 조작하지 않았을까.

 

5.18단체도 40여년이 지나가는데도 아직까지 관련자 처벌,사과를 주장만해서 뭐가 되겠는가. 이미 법에 따라 충분치는 않으나 상당한 보상과 처우가 개선되고 희생자 가족들에 여러 혜택도 주어졌다. 일각에선 과도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 현장과 무관한 사람들도 상당 들어 있다는 말도 있고. 아직 멀쩡한 전두환 대통령의 현충원 안장 여론조사나 해 60%반대의견을 내놓다니, 이건 아니올시다다.

 

또한 국방부장관까지 사과한 일이지만, 작년에 계엄군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도 전혀 사실과 다른 거짓 주장이다. 현대 전쟁,전투메뉴얼에 작전 중 대열을 이탈하거나 적국에 특별한 범죄행위(여성을 성폭행했을 경우 포함) 때 현장 지휘관에게는 즉결 처리(총살까지) 권한이 주어진다. 광주에서도 독립된 지역에서 활동한 소수 계엄군이 아니라면 여성강간 등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수시로 총소리가 빵빵 들리고 생사가 갈릴 수 있는 현장에서 가능이나 한 일이겠는가.  

 

역사는 미래를 향해 흘러간다. 좀 더 지혜로운 한국인이 되기 위한 인내가 있으면 한다. (龍)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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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포스트 태그와 함께 상업목적 외에 전재·복사·배포 허용 (*포털 다음 에 뉴스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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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때 계엄군의 헬기 기총사력논란 사진 중 한 장. 그러나 필자(서울포스트 발행인 양기용)가 외곽지역에서 겪은 바로는, 헬기는 이동목적 과 시내 상공 등지에서 홍보방송,전단지 살포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총 쏠려는 헬기가 저 따구로 비행하겠나?
ⓒ서울포스트 가 자료로 사용

 

↓ 아래는 무장한 시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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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초기

5·17 조치 이전 계엄반대시위

1980년 5월 15일에는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은 집권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반대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다. 이에 따라 5월 17일 오후 9시 신군부 세력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다. 오후 10시경 보안사령부는 야당 인사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체포 감금했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국회를 점령해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이날 자정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동시에 계엄포고령 제10호가 선포돼 대학휴교령·보도검열강화·정치활동금지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10] 새벽 2시 제7공수부대는 조선대학교전남대학교을 점령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각기 조를 편성해 광주 시내 각 학교의 입구를 지키고 검문검속했다

대학생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8일 당일 아침 9시 이후, 텔레비전 방송, 라디오, 신문을 통해 비상계엄 전국확대 소식이 보도됐다. 18일 오전전남대학교 학생 100여 명은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원에 항의했고, 항의 도중에 대학생과 공수부대원 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학생들은 구타를 당했고 공수부대의 구타에 자극받은 전남대학생 300여명은 광주천 주변 돌을 들어 교문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던졌다. 일부 학생들은 금남로로 이동했다. 전남대학생 300여명은 가톨릭 회관에 집결해 시위했다. 이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했다.

 

신군부는 신속하고 강력한 시위진압을 위해 5월 18일 오후 4시 제7공수여단이 시내에 투입됐다.[18] 제7공수여단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검문검색과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

 

이날 희생된 청각장애인 김경철은 공수부대에 의한 대표적인 과격진압 사례였다. 그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

 

전개 과정

광주 시민의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과 고등학생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학생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폭증했다.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했다. 일부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 직접 항의를 가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 MBC 방송국를 방화했다. 20일 24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다.

계엄군의 발포 및 광주 시민 학살

5월 21일 오전 전남도청과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21일 오전 시민 대표는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됐다. 전남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확성기로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 철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1일 정오 12시경 전남대 앞·21일 오후 1시경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도청 집단 발포 이후,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수협·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가했고 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광주 시민의 항쟁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화순, 나주 지역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을 결성했다. 시민들은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시아자동차으로 몰려가 차량을 탈취했다. 일부 시민군은 26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됐다.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다. 21일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21일 저녁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전달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오후 7시 보안사에서 전달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이 발표했다. 이희성은 광주 지역의 시위를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다.

광주외곽봉쇄작전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5월 21일 21시 30분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를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22]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송암동 학살을 비롯한 시민 살상 행위가 광주 외곽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5월 24일에는 계엄군 간 2차례 오인 교전이 일어나 계엄군 13명이 사망했다.

광주 시민의 자치

22일 이후 광주는 군인들에 의해 완전 포위·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됐고 전국 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외신기자들에 의하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치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시민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주었다. 다함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광주의 상점가, 금융기관, 백화점에서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었다. 시민 자치 기간에도 광주 시민의 협력으로 행정기관의 역할이 상당부분 유지됐다. 당시 전라남도부지사 정시채를 비롯한 공무원도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했다. 공직자들은 5·18 당시 양곡 방출이나 부상자 처리 등의 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은 ‘광주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부 지식인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프랑스 시민들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평화집회

해방광주로 불리는 동안 일부 시민들은 스스로 계엄사에 무기 자진반납을 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하며 계속 무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수차례에 걸친 내부 대책회의와 협상 끝에 계속 무장을 해야 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평화적 시위는 계속됐고 〈애국가〉와 〈울밑에선 봉선화〉 등을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광주 시민은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이 구호는 광주 시민들에 의해 많이 불렀고,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광주 재진입 작전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됐다. 5월 27일 새벽 2시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발을 사격해 가면서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다. 도청 내 일부 시민군은 자진 투항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쟁 의견으로 나뉘었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시민군 생존자를 체포·연행했고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날짜별 상세 일지

5월 16일 금요일 이전
5월 17일 토요일
  • 21시 40분: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 22시 00분: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 검속 실시.
  • 24시 00분: 5월 17일 24시부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신군부 계엄포고 제10호를 통해 정치활동 금지, 언론검열 강화, 대학교 휴교령 선포. 주요 도시의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전주 전북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도 잡아들여 폭행. 이 과정에서 대학생 사망자가 1명 발생. 전북대 농학과 2년인 이세종(당시 21세)은 5월 17일 12시께 계엄군에 쫓기다 전북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추락사).
5월 18일 일요일
  • 01~02시 경: 보안사령부(사령관 전두환)가 김대중 등 재야 인사와 김종필 등 공화당 지도자를 체포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점령. 국회 기능 마비.
  • 09시 40분: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당함.
  • 10시 00분: 전남대학교 주둔 계엄군을 상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임.
  • 10시 15분: 계엄군(공수부대원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항의 시위 진압.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첫 번째 부상자 발생)
  • 10시 20분: 전남대학교 교문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원과 외부에서 학교로 출입하던 대학생 간 충돌 발생. 공수부대의 대학생 구타에 자극받은 대학생들 800여 명이 교문에 배치된 7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돌을 투석, 일부 학생들이 교문을 벗어나 광주 금남로로 이동.
  • 11시 00분: 전남대 300여 명 가톨릭 회관 집결,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 시킴
  • 12시 00분: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옴.
  • 15시 40분: 금남로 유동 삼거리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 진압과정에서 시위대로 추정되는 시민들을 잡아다가 구타 및 현장 체포함.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장애인인 김경철이 계엄군에게 전신 구타당함.
  • 19시 02분: 계엄사령부, 통행금지령 확대 국내외 방송을 통해 통금 시간을 저녁 9시로 당긴다고 발표.
  • 20시 00분: 공수부대의 무차별 구타에 불안, 흥분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학생들에게 동조.
  • 21시 00분: 계엄사령부 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방송과 라디오를 통해 해산 경고문 발표.
5월 19일 월요일
  • 03시 00분: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청각장애인 김경철 병원에서 사망 - 두 번째의 희생자).
  • 09시 30분: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 10시 00분: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1공수여단 위력시위 이후 착검한 상태로 진입, 대검으로 인한 자상자 발생. 11공수여단 약 천여 명이 강경 진압을 강행했고, 3~4명이 한 조가 돼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
  • 14시 40분: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돼 무리한 진압 작전 전개
  • 15시 00분: 시내 기관장과 유지들, 회의를 하고 시위 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
  • 16시 30분: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
  • 20시 00분: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수만 명이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침.
5월 20일 화요일
  • 08시 00분: 고등학생들의 참여에 자극받은 정부는 문교부를 통해 광주 시내 및 전라남도 광산군, 나주군 일대 고등학교에 휴교 조치 하달.
  • 10시 20분: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끌려나와 마구잡이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에 공방전 계속.
  • 18시 4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차량 경적 시위.
  • 20시 0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 및 공수부대원의 진입을 가로막음.
  • 20시 10분: 시위대, 도청으로 서서히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택시와 차량에 가로막힌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
  • 20시 00분: 3공수, 11공수 여단장 실탄 분배 지시 (3공수여단장 실탄 장착 지시, 11공수의 경우 각 각 61대대,62대대가 1000여발 분배)
  • 21시 00분: 택시 200여 대와 버스들은 진입로를 차단, 공수부대 및 경찰과 충돌. 일부는 우회해서 감.
  • 21시 05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해 경찰 4명 사망
  • 21시 50분: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MBC 방화
  • 23시 00분: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 사망. 시민 수십 명 부상.
5월 21일 수요일 (이날부터 광주해방구, 해방광주)
  • 00시 35분: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광주역에서 철수하던 계엄군, 대검과 곤봉 등으로 시위대 2명 살해. 계엄군 측 부상자 5명으로 보고.
  • 02시 18분: 시외전화 두절.
  • 04시 00분: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
  • 04시 30분: 광주KBS 건물 방화.
  • 08시 00분: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진압 명령을 받고 투입된 20사단 병력과 충돌.
  • 10시 00분: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 트럭, 장갑차 획득.
  • 10시 15분: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함.
  • 11시 10분: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
  • 12시 10분: 전남대 진출을 시도한 시위대가 전남대 앞에 배치된 공수부대원들의 저지에 밀려 신안동 굴다리까지 1km 후퇴. 공수부대의 진압 도중 시민 4명 사망.
  • 12시 59분: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 13시 00분: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됨.
  • 13시 20분: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이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에 올라가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시작
  • 14시 00분: 시위대가 나주, 화순 등지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 시작.
  • 14시 15분: 도지사, 경찰 헬기에서 시위 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
  • 14시 40분: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 15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 16시 00분: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 16시 43분: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M2 중기관총 2대 설치.
  • 17시 30분: 7공수여단, 11공수여단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 3공수여단은 광주교도소로 철수
5월 22일 목요일
  • 광주 시내가 계엄군에 의해 고립됨.
  • 09시 00분: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 10시 30분: 군용 헬기 공중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 11시 25분: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 12시 00분: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 13시 30분: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 항의 수습안 전달.
  • 15시 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 17시 18분: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 결과 보고.
  • 17시 40분: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 18시 00분: 20사단이 통합병원 진입로 확보를 위해 1km 전진하며 사격, 작전 중 지역 주민 8명 사망.
  • 19시 00분: 동양방송 라디오(현 KBS 제3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기상도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중간조사 결과 뉴스를 보도했다.
  • 21시 30분: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 08시 00분: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 10시 00분: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 10시 15분: 수습위 무기회수반을 조직해 총기 회수 작업 시작.
  • 11시 45분: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 13시 00분: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 15시 00분: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
  • 19시 40분: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 13시 20분: 11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4명 사망.
  • 14시 20분: 송암동에서 11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 9명 사망 40여명 부상, 오인 총격전 직후 공수부대원이 주변 민가를 수색해 마을 청년 4명 처형.
  • 14시 50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 11시 00분: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메시지와 함께 광주민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 원 전달.
  • 15시 00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7시 00분: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 21시 10분: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 발생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 문제 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 05시 20분: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 08시 00분: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 감행.
  • 10시 00분: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4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 15시 00분: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7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상황 브리핑.
  • 19시 10분: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처.
  • 24시 00분: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월 27일 화요일
  • 02시 00분: 계엄군의 광주 진입.
  • 03시 00분: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 04시 00분: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 0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
  • 05시 00분: 시민군 생존자들 자진해서 자수. 자수 과정에서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 3명을 시민군이 자진해서 체포해 계엄군과 경찰에게 넘겼음.
  • 05시 10분: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
  • 06시 00분: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 07시 00분: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 08시 50분: 시내전화 통화 재개.

피해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29주년을 맞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광주광역시가 발표한 통계는 유족이 보상금을 수령한 사망자 수이다. 확실하게 신원이 밝혀졌지만, 보상금을 수령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165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검찰은 1994년 사상자 수를 발표했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5·18의 핵심적인 진상은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지난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 진압군 부대 지휘관들은 암매장이 없었다고 진술한 것과 다르게,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에 의해 2001년 당시 공수부대원이 비무장민간인을사살, 암매장했다는 양심선언이 발표됐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경찰 및 군인 중 사망자는 경찰 4명, 군인 22명으로, 이들은 1980년 6월 21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안장됐다.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와 부상자회, 5·18기념재단 등 4개 단체가 공식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상이후 사망추정자는 376명 등이다.

 

1980년대 중반에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과 무차별적인 연행으로 인해 사망자가 2천여 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5·18 종료 직후에 정부에 신고된 사망추정자, 실종추정자는 2천여 명에 달했고, 일부 학생운동권이 이를 인용한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1985년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1980년 당시 사망자 및 실종자로 신고된 인원은 2천 명이 맞다면서, 그중에는 체포 구금된 자, 사망자, 부상입원자, 피신자도 포함돼 있어, 이들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 것이라고 답했다.

 

5·18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 연구진은 5·18 유공자 중 부상자와 구속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성폭행 피해자나 난민, 고문피해자 등 인권 유린 피해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까닭에 상당수가 PTSD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진행한 오수성 전남대 교수는 “5·18 체험자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당시 충격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재경험하면서 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중독을 함께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또한 이들은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다. 2007년 8월 기준, 5·18 피해자로서 사망한 376명 가운데 39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5·18 피해자의 자살률은 10.4%로 일반인의 약 500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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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 설명 문구들 -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1980)

 

5·18민주화운동 관련 사진은  김영복 (당시 광주에서 사진관 운영) 나경택(당시 전남매일신문사진부), 황종건(당시 동아일보 사진부) 김녕만(당시 동아일보 사진부), 광주일보사 사진부가 촬영한 것으로써,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밝히는데 소중한 근거 자료로 활용 되었다.

 

생산자 : 나경택, 생산일자 : 1980. 5. 15

사진설명 : 민족민주화성회에 참여하기 위해 학교 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생산자 : 나경택, 생산일자 : 1980. 5. 16

사진설명 : 민족민주화대성회 참석을 위해 교문을 벗어나 금남로로 향하고있는 전남대학교 교수들, 이들 뒤를 학생들이 따르며 민주주의를 위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생산자 : 신복진, 생산일자 : 1980. 5. 18

사진설명 : 쓰러진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아대는 계엄군

 

생산자 : 나경택, 생산일자 : 1980. 5. 19

사진설명 : 공수부대원들이 학생과 시민들의 전남도청 앞 진입을 막기 위해 탱크를 앞세우고 도열해 있다.

 

생산자 : 황종건, 생산일자 : 1980. 5. 20

사진설명 :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강경진압에 대한 계엄군의 사과를 요구하며 공수부대원과 대치하고 있다. 제19회 전라남도민체육회 아치가 당시를 알려주고 있다.

 

생산자 : 나경택, 생산일자 : 1980. 5. 16.

사진설명 : 1980년 5월 16일 오후 2시. 전남 도청 앞 광장에서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2만 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민주화대성회’를 열고 대대적인 횃불행진을 벌였다.

 

생산자 : 황종건, 생산일자 : 1980. 5. 19

사진설명 : 쓰러진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아대는 공수부대원.

 

생산자 : 황종건, 생산일자 : 1980. 5. 19

사진설명 : M16자동소총을 휴대한 공수부대는 도망치다 쓰러진 시민마저 뒤쫓아가서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았다.

 

생산자 : 황종건, 생산일자 : 1980. 5. 19

사진설명 : 쓰러진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아대는 공수부대원.

 

생산자 : 김녕만, 생산일자 : 1980. 5. 27

사진설명 : 붙잡힌 시민군들은 ‘탄약보유’등 ABC등급의 각종 죄목이 붙어서 끌려갔다.

 

생산자 : 김녕만, 생산일자 : 1980. 5. 27

사진설명 : 27일 새벽 마지막까지 싸운 시민군들이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전남도청 마당에 엎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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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민주화성회에 참여하기 위해 학교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 1980년 5월 16일 오후 2시. 전남 도청 앞 광장에서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2만 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대대적인 횃불행진을 벌였다.

- 민족민주화대성회 참석을 위해 교문을 벗어나 금남로로 향하고 있는 전남대학교 교수들, 이들 뒤를 학생들이 따르며 민주주의를 위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

- 횃불대행진을 마친 학생들은 도청 앞 분수대로 모여 다시 어둠을 밝히며 조국의 민주화를 기원했다.
- 쓰러진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아대는 공수부대원.

- M16자동소총을 휴대한 공수부대는 도망치다 쓰러진 시민마저 뒤쫓아가서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았다.

- +자 완장을 찬 위생병마저 페퍼포그 차량 옆에서 저항의지도 없는 학생을 곤봉으로 힘껏 내려치고 있다.

- 대입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과 수험생들까지 거리로 끌어내어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있는 공수부대들

- 공수부대에게 붙잡힌 시민들이 끌려가고 있다.

- 19일 계엄군들이 금남로와 충장로로 출동, 전 지역을 들쑤셔댔다.

- 19일 오후 경찰병력이 시위 군중에 밀리기 시작하자 금남로에 재투입된 계엄군이 양손에 진압봉을 받쳐들고 시위군중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 버스가 계엄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차안으로 사과탄을 던진 후 진압봉을 휘둘렀다.

- 최루탄 가스로 뒤덮힌 금남로.

- 금남로에 운집한 시위군중을 향하여 최루탄을 터뜨리며 뒤쫓고 있는 계엄군들, 그들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달려든 이민족의 군인들보다도 더 잔혹했다.

- 젊은 부부가 금남로 2가를 지나다 공수부대원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흘린 채 끌려가고 있다.

- 무장 장갑차를 끌고온 계엄군 앞에서 무릎꿇고 빌고 있는 정장 차림의 시민

- 부상당한 사람을 실어 옮기는 시민들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고 아름다운 모습 중의 하나였다.
- 오후 7시경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200여대의 차량시위는 계엄군의 만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운전기사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었으며 5월 항쟁의 최대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 공수부대원들이 학생과 시민들의 전남도청 앞 진입을 막기 위해 탱크를 앞세우고 도열해 있다.

- 부서진 택시를 사이에 두고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이 강경진압에 대한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며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 계엄령 철폐를 외치는 시민들이 광주동구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서 공수부대원과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 시민군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내를 질주하자 시민들이 박수치며 격려하고 있다.

- 시민들이 전날 도청 앞 저지선을 뚫으려다 멈춘 버스를 바리케이드로 이용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 분노한 시민들은 시내버스를 앞세우고 전남도청을 향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 도청이 광주시민들에게 의해 접수되기 직전, 마치 탈출 작전처럼 경찰헬기를 이용해 중요서류를 옮기는 장면이 기자의 눈에 들어왔다.

- 20일 오후9시40분 계엄군 당국이 신문방송 등 언론을 장악한 다음, 공수부대에 저항한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몰자 여기에 분노한 시민들이 궁동에 소재한 MBC방송국을 태우고(위), 이어 신안동에 위치한 KBS방송국을, 21일엔 광주세무서를 불태웠다.

- 전투경찰들이 도청 앞 광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가운데 군용헬기가 바쁘게 이착륙을 하고 있다.

- 시민들이 전날 도청 앞 저지선을 뚫으려다 멈춘 버스를 바리케이드로 이용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 광주 시내의 모든 병원은 많은 부상자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 부상자들로 초만원을 이룬 광주시내 각 병원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광주시민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헌혈에 앞장섰다.

- 광주는 무정부상태였지만 시민들이 구성한 수습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광주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고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와 용기를 모아내고자 했다.

- 전남도청앞 광장은 사태의 추이를 알고자 하는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고, 항쟁지도부는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사태의 본질을 알리는 한편 시국을 성토하였다.

- 광주적십자병원 영안실에 시위 중 사망한 시민들의 유해가 드라이아이스와 비닐로 쌓여있다.

- 광주시내 각 동마다 부녀자들이 쏟아져 나와 주먹밥을 만들거나 음식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제공했다.

- 광주시내 각 동마다 시민들이 성금과 음식을 시민군에게 제공했다.

- 사실 보도를 접하지 못한 시민들은 전남도청 앞 건물 곳곳에 나붙은 투사회보 등을 통해 국내외 소식을 접하고 있다.

- 계엄군이 철수한 후 도청 안에 마련된 임시 유해안치소에서 시신을 확인하고 넋을 잃은 채 울부짖고 있는 가족들.

- 상무관에 안치된 수많은 시신들, 그들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꽃잎처럼 스러져갔다.

- 시민군들은 의료반을 만들어서 앰뷸런스를 가동하였으며 식량조달반도 두었다.

- 시민군이 장악한 도청 앞 광장은 사태의 추이를 알고자 하는 시민들로 가득 메워지곤 했다.

- 시신의 신원이 확인되어 상무관으로 옮겨지는 가운데 소식이 끊긴 가족들이 유해를 확인하기 위해 줄을 서있다.

- 광주․송정리간 도로에 있는 육군통합병원 앞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철수한 계엄군과 시민군들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 광주-송정리간 도로에 있는 육군통합병원 앞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철수한 계엄군과 시민군들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필자인 서울포스트 발행인(양기용)이 80년 겪은 5.18에서 당시 익히 보았던 화정동 통합병원 앞 현장 사진을 우연히 발견했다. 중앙분리대 화단 끝 시커먼 부분은 시위대가 타이어 등으로 방어선을 만들고 불을 질렀던 광천동사거리, 이 쪽은 계엄군측에서 바리케이트 를 치고 서로 대치한 양상, 뒤쪽에 탱크 가 대기하고 있었다.]

ⓒ서울포스트 가 자료로 사용

- 전남도청을 진압한 계엄군이 시내를 재장악하기 위해 화정동에 위치한 ‘돌고개’를 넘고 있다.

- 5월 27일 새벽. 광주시내 곳곳에 진입한 계엄군들은 길을 가던 중학생들도 붙잡아 무릎을 꿇어앉히게 했다.

- 27일, 진압작전 후 연행되어가는 시민군들, 시내를 장악한 계엄군은 도청을 비롯해 곳곳에서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 붙잡힌 시민군들은 ‘탄약보유’등 ABC등급의 각종 죄목이 붙어서 끌려갔다.

- 27일 새벽 마지막까지 싸운 시민군들이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전남도청 마당에 엎드려 있다.

- 항쟁기간 중 온몸에 부상을 당한 시민이 전남대 병원에 입원해 있다.

- 가족의 죽음을 확인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한 어머니

- 1980년 5월 29일 망월동에서 일제히 진행된1백 29구의 장례식, ‘폭도’라는 이름으로 진실이 왜곡되고 통제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유족들의 슬픔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 망월동 묘역으로 올라오고 있는 운구 행렬.

-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무명열사의 관들이 차례대로 묻히고 있다.

- 망월묘역 관 앞에서 오열하는 어머니.

- 자식을 먼저 보낸 한 할머니.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온통 주름살로 짓붉다.

- 5월 29일. 129구의 장례식이 거행된 이날 이후 ‘망월동’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이름이 되었다.

- 독일 ‘슈피겔’지에 실린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아이 사진은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를 절묘하게 대비함으로써 광주의 아픔을 전 세계인에게 전해준 5·18의 상징적인 사진 중 하나이다.

 

출처-5.18 기념재단, 5.18 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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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 (2007년 3월 서울) 일상의 기록  양기용 기자 (2007.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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