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탐사] 북한산 아름다운 길⑪ - 한국불교의 중흥터(中興址), 북한산 태고사(太古寺)와 중흥사터(重興寺址)-③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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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고사 태고 보우 원증국사 탑비(圓證國師 塔碑 보물 제611호) 비각에 석양이 든다. 증취,용혈,용출 세 봉이 우뚝한 저 의상능선 너머 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 가 있다. ⓒ20140906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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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현봉 올라 행궁터를 지나 ⓒ서울포스트 |
햇살에 빛난 노적봉과 만경대 아래로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돌담을 돌아 태고사 옆으로 경내에 들었다. 푸성귀가 자란 밭뙤기가 있고 창고에 농기구가 갖춰져 있다. 작은 토지에 손수 경작하고 자급하기기 쉽지 않을텐데... 옛날 사진을 보니 중흥사 일대에 가옥들이 보였다. 행궁이 있고 승병 주둔지였으니 계곡의 물도 풍부한 주변 지역에 농사지을 공간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활하기에 필요한 주요 식자재는 짐꾼들이 수고할 것이다. 아까 일선사에서도 지게꾼이 물건을 지고 와 수고비를 받아가는 모습을 봤다. 정말 쌀 한 톨, 채소 한 잎이 얼마나 소중할까. 빨리 돈 벌어 이런 곳이 쌀 가마니라도 쾌척해야 되는데... 그러고보면 자동차가 들락거린 절의 스님들은 옛날로 치면 왕손이나 다름없다.
산속 가정집같은 태고사는 태고종조의 추념비 등이 모셔져 있는 절로 보기엔 너무 단촐했다. 전쟁때 완전 소실된 것을 청암스님이 이나마 중수했다고 한다. 원증국사탑비와 청암대종사의 부도탑을 지나 원증국사탑에 이른 시각 서산의 해는 야속하게 지고 있었다.
불교에서 출가한다는 말은 불가의 법문에 든다는 뜻으로, 가정을 두고 가출한다는 말이 아니고 성(性)을 끊고 성(聖)생활에 정진한다는 뜻이 아니다. 미성년 때 출가한 사람도 나중에 가정을 가질 수 있었음에 현재처럼 '싱글 중'이라는 개념이 불분명했고 단신 수행을 지키는 종파도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삼국시대,고려,조선시대)까지 우리불교는 혼인을 당연시 했다. 왕가의 형제,자녀가 출가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민중불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원효대사(설서당)는 설총의 아버지다. 삼국이후 선종과 교종이 길항관계를 유지하며 발전한 불교에서 대처제는 불문율이었던 것이, 해방후 대처제가 왜색인 양 혼인가능유무로 조계종과 태고종이 대립하고 있다.
고려말 공민왕 때 구산선문(九山禪門) 등 잡다한 종파의 난립을 선종(禪宗)인 '조계종'으로 통합한 사람이 여기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 원증국사(圓證國師)'다. 태고는13세에 출가하여 양주 회암사 광지선사를 스승으로 하여 득도했다. 56세(공민왕 5) 때 *봉은사(奉恩寺)에서 개당(開堂)하고 공민왕과 가족들이 거기서 설법을 들었다. 이후 국사를 거치면서 조선초 이색,권근,정도전 등 지식인들과도 풍부한 교류를 하다 82세에 입적했다.
[*고려 중기 허응 보우(虛應 普雨 1509?~1565)대사 도 회암사에 머물다 문정왕후에 의해 봉은사 주시로 발탁돼 봉은사에 개당한다. 역시 선종으로 불교중흥에 힘썼으나 문정왕후 사후 회암사가 유림에 의해 불타고 제주도로 귀양 가 참살되었다(불교에서는 이를 '순교'로 본다). 두 보우 스님이 양주 회암사와 강남 봉은사에 깊은 관련이 있으나, 현 조계종 소속 봉은사 '보우당'은 조선 중기 보우普雨를 기리는 곳으로 태고종 종조 보우普愚와 무관하다. 정말일까? (추기: 현재 조계종에서는 조계종 종조에 보조 '지눌知訥', 조계종 중흥조에 태고 '보우普愚', 조선불교 중흥조에 허응 '보우普雨' 를 모신다.)]
일제때는 태고 보우의 유지를 받들어 한용운,이회광 등이 주축이 돼, 종로 각황사에 종조를 태고 보우로 한 태고사 조계종으로 개사했으나, 해방 후 친일청산 명분으로 태고사는 혼인을 불허하는 스님들이 접수해, 종조를 보조 지눌 로 한 대한불교 조계종(曺溪宗 조계사)으로 바꾸고, 태고를 종조한 기존 층을 끌어안기 위해 태고를 중흥조 라는 바지 부사장으로 세운다. 쫒겨난 태고사 스님들은 여전히 태고를 종조로 한국불교 태고종(太古宗) 을 만들어 서대문구 봉원동 봉원사(奉元寺)에 총본산을 두고 있다.
결국 한국불교의 기형적 분류기인 지난 50여년은 개인재산이든 종단재산이든 탐욕과 욕망의 갈등이지, 불교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그간 수많은 종파가 오합지졸로 이합집산을 해왔기에 적통도 사라지고 오로지 아전인수로 법통을 해석하고 있다.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다. 그러나 불교문화재를 봐 오면서 상당수는 종파간 싸움에 귀중한 유물이 뺏고 뺏기고 파괴되고 사라지고 왜곡되었다고 본다. 외세 종교가 판치는 지금 불교통합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태고사를 찾고 싶었을 뿐이다. (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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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연자료
[우리 불교는 신라때부터 5교9산이 형성됐다. 그러나 중국처럼 뚜렷한 종지를 갖고 종파를 형성했다고 보기엔 기록도 부족하고 근거도 희박한 게 학계의 관측. 최초의 종파 기록은 고려 숙종6년(1101)에 지은 흥왕사 대각국사 묘지명에 계율종,법상종,법성종,열반종,원융종,선적종 의 6개 종파가 등장한다. 여기에서도 신라에서 종파가 형성되었다고 보기엔 부족함이 있고 고려초기에 6종이 있는 것으로 볼 뿐이다. 이 중 선적종 을 선종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대각국사가 천태종이라는 선종을 창건하면서 7종이 성립됐다.
선적종에서 조계종의 탄생은 보조국사 지눌(1158~1210) 이 화엄,천태,선학 등을 정혜겸수로, 그 위에 돈오점수를 제창하면서 9산선문이 이 종지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이때 조계종지가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결실은 태고국사 보우(1301~1382)에 의해 맺어졌다. 보우는 (5교를 제외한) 9산선문을 조계종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기 위해 공민왕에게 청했고, 왕이 이를 허락해 공민왕5년(1356)에 통일된 조계종이 성립됨으로써 선종 은 전성기를 맞는다.
조선을 거치면서 오교는 '교종(敎宗)', 구산선문을 통합한 조계종은 '선종(禪宗)'으로 발전해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되었고, 태조 6년에는 흥천사를 창건해 조계선종의 본사가 되게 한다. 다른 종파가 난립하자 세종때도 선교 양종 제도로 만들었으나 억불정책으로 자취를 감추다 명종 때 문정왕후에 의해 선교 양종 제도가 부활한다. 문정왕후 사후 쇠락을 걷다가, 조선말 일본승려들이 드나들면서 1908년 원흥사에서 전국대표승려 52인이 '원종'을 창종하고 대종정으로 이회광을 세웠다. 그러나 이회광이 일본종교와 연합을 하자 1911년 박한영,한용운 등이 중심되어 송광사에서 '임제종'을 세웠으나 동년 사찰령 발포로 사라졌다. 1930년대 조선불교선교양종은 각황사에서 '태고사'를 창건하고 종명을 '조계종'으로 결정했다. (해방 이후 태고사 는 조계사로 바뀌고 그 승려들 대부분은 쫒겨나 '태고종'을 창건했다.) = 법보 986호(2009.02.16) '종단(宗團)'에서 발췌,정리]
※ 보우(普愚: 1301~1382) : 자료 등 정리
태고보우원증국사(太古普愚圓證國師): 고려 말의 선승으로 불교 개혁에 힘쓴 승려. 호는 태고(太古) · 보허(普虛)이며, 속성은 홍(洪)씨, 시호는 원증(圓證)이다. 흔히 태고(太古) 또는 태고국사(太古國師), 원증국사(圓證國師)라 불린다.
현 태고종의 종조, 조계종의 중흥조(지금도 조계종 내에서는 종조로 보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석가세존 제57대손이며 임제정맥(臨濟正脈) 제19대 적손.
경기도 양근(현 양평)에서 출생. 홍주홍씨(洪州洪氏 충남홍성) 집안으로 13세에 (고려 충선왕 5) 가지산파(迦智山派)에 속한 양주 회암사(檜巖寺)로 출가, 광지선사(廣智禪師)를 스승으로 해 득도. 19세 때(충숙왕 6) 가지산문(迦智山門) 의 총림인 장흥 보림사(寶林寺)에서 선지(禪旨) 참구... 41세 때(충혜왕 복위 2) 삼각산 중흥사(重興寺) 주지 로 있으면서 그 옆에 개인 기도처 태고암(太古庵, 현 태고사)을 지어 기거했다. 후일 일제가 불교진흥을 추진할 때 한국불교의 뿌리가 된다.
고려 말기에 고려는 불교 교단의 타락과 오랫동안 쌓여온 기복불교(祈福佛敎)의 폐단은 마침내 고려 사회에 배불(排佛)의 싹이 텄다. 보우(普愚)와 혜근(惠勤: 나옹화상 1320~1376)은 이러한 세상에 출현하여 임제종(臨濟宗)의 선풍(禪風)으로 불교를 일상 현실속에 살리려고 하였다. 보우는 특히 이러한 사상을 강하게 나타내어 9산선원을 통합하고 불교의 과제를 조선대에 넘겨 주었다. 공민왕이 뒤에 신돈(辛旽)을 기용하여 정치를 잘못함에 따라 배불(排佛)의 기운이 비등하였고 고려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보우는 56세 때(공민왕 5) 봉은사(奉恩寺)에서 개당(開堂)했으며 이후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로 28년을 봉직, 공민왕의 왕사일 때 수도를 남경(南京:漢陽)으로 옮길 것도 주장했으나 신돈 이 사승(邪僧)으로 지목하는 등 권력다툼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횡포를 보다못해 광주(廣州) 소설산(小雪山)에서 경작에 힘썼고, 신돈이 죽자 우왕 의 국사가 되었다.
※ [고려사 : ...공민왕 5년,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여 승려 '보허(普虛)'의 설법을 들었다. 공주가 명덕태후(明德太后)를 뒤따라오자 시녀(侍女)와 승도(僧徒)가 서로 마구 섞여 분별이 없었다. 왕이 또 보허를 내전(內殿)으로 맞아들이자 공주와 태후가 기뻐하여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며 몸소 다과를 권할 뿐 아니라 공주는 유리쟁반과 마노(瑪瑙)로 만든 수저 등을 시주하였다...]
1382년(우왕 8) 여름에 소설산(小雪山)으로 돌아온 후, 12월에 입적하니, 나이 82세, 법랍 69세였다. 우왕은 1385년(우왕 11)에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국사의 비(태고사 원증국사탑비)를 짓게 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혼수(混修)와 찬영(粲英) 등의 대선사(大禪師)를 비롯한 천여 명의 승려 이외에 당대의 조정대신인 이인임(李仁任)과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도 포함되어 있다. 저서로는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2권과 《태고유음(太古遺音)》 6책 등이 있다.
※ 북한산 최대 사찰터 '중흥사지(重興寺址)' - 자료 등
경기도 기념물 제136호. 북한산성 내 장군봉과 구암봉 사이에 있다. 중흥사(重興寺)는 고려초(高麗初)에 창건(創建)되었다는 구전이 있으나 정확한 연대(年代)는 미상이며 고려말(高麗末) 태고(太古) 보우국사(普愚國師)에 의해 중수(重修)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유물(遺物)로 1103년작(作) 금고(金鼓)와 1344년작(作) 향완이 현존하고 있어 12세기 초 이전에 이미 개창(開創) 되었던 것으로 짐작 할 수 있을 뿐이다.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이 중흥사는 본래 30여칸 규모의 작은 사찰에 불과했으나 1713년(숙종 39) 외적에 대비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였는데 성(城)이 완성된 1715년에 증축하여 136칸의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팔도(八道)의 사찰(寺刹)에 영(令)을 내려 1년에 6차례에 번갈아서 의승(義僧)을 뽑아 산성내의 11개 사찰에 주둔시켜 성문(城門), 수문(水門), 장대(將臺) 창고(倉庫)등을 지키게 하였다.
승군들이 주둔하였던 11개 사찰은 중흥사(重興寺), 용암사(龍巖寺), 보국사(輔國寺), 보광사(普光寺), 부왕사(扶旺寺), 원각사(圓覺寺), 국녕사(國寧寺), 서암사(西巖寺), 태고사(太古寺), 노적사(露積寺 현 上雲寺), 진국사(鎭國寺, 현 노적사)이며,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승영(僧營)인 중흥사는 나머지 10개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1828년에 이르러 대웅전(大雄殿)과 만세루(萬歲樓)를 중건(重建)하여 유수한 사찰로 존속하였었으나 1894년에 화재를 만났고, 다시 1925년 을축년대홍수로 석축(石築)이 허물어지고 유지(遺址)만 남아 현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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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증국사탑비(보물 제611호)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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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증국사탑(부도탑, 보물 제749호)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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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웅전만 복원된 중흥사 ⓒ서울포스트 |
▲ 태고사 태고 보우 원증국사 탑비(圓證國師 塔碑 보물 제611호) 비각에 석양이 든다. 증취,용혈,용출 세 봉이 우뚝한 저 의상능선 너머 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 가 있다. ⓒ20140906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보현봉 올라 행궁터를 지나서 ⓒ서울포스트
▲ 원증국사탑비(보물 제611호) ⓒ서울포스트
▲ 원증국사탑(부도탑, 보물 제749호) ⓒ서울포스트
▲ 대웅전만 복원된 중흥사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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