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조선 최대의 가람터, 양주 회암사지(檜巖寺址)①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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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주 회암사지 는 궁터를 제외하고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유적지로는 최대이며 가장 웅장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사진속 뭉퉁한 지주 는 평면 'ㄷ'자 형태의 괘불지주. 문화재 가치가 있다고 사료됨 ⓒ20130918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세상에서 융성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새로 생겨난 것은 만물의 이치상 당연한 일이다. 최근, 지금은 폐허된 약 4500년 전 이집트의 제4왕조 파라오 의 새로운 피라미드(제데프레 의 무덤) 터가 재조명 받고 있다. 기자(Giza) 지구 3개의 피라미드 가 아니라 아부 로하슈(Abu Rawash)에 있다. 이미 100여년 전, 그 곳은 이집트에서 가장 높은 데 위치하고 가장 화려했으나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이유로 후대 왕이 없앴다는 결론을 냈었다.
가장 흥미를 끈 부분은, 클레오파트라 와 시저 의 밀월 관계가 끝난 후 로마 의 침략으로, 당시 가장 화려한 그 왕의 무덤을 파괴함으로써 그들 자존심을 꺽고 거기서 빼낸 돌들을 로마제국 건설에 사용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따라서 역적이 아니라 아버지인 쿠프 왕의 대 피라미드 근처에 스핑크스 까지 세운 효자로 반전되었다.
후세를 살아가는 사람은 당대 죽을 맛이었던 상황도 '흥미'다. 역사를 한번 뒤집으면 울고웃기는 드라마 가 되고 영화도 된다. 반만년 전의 이집트 도 그렇지만 천년 전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찾은 양주 '회암사지(檜巖寺址)'는 7월초 그쪽에 일다니며 절(터)를 알게 되었다. 이후 여주 신륵사(神勒寺)를 탐방하며 나옹선사와 두 절의 관련도 알았다. 회암사 는 영화를 누릴만큼 누렸고 주객이 확실한 사찰, 폐사 원인도 분명하니, 영문도 모르게 없어진 여주 '고달사(高達寺) 터' 보다는 아쉬움이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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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지도. 회암사(檜巖寺) 폐사지를 회암사대(檜岩寺垈)로 기록 ⓒ서울포스트 |
회암사는 파괴 주체가 불교와 충돌한 유림들이다. 그러니까 조선에 '공자'를 신봉하는 유생들은 '석가'를 신봉하는 불교와 대립하며, 조선 내내 당파싸움으로 사화를 겪고 세력기반끼리 충돌한다. 이 시기에는 사찰이 없어지고 서원이 급증해 후반에는 그 폐해도 커졌다.
석가 와 공자 의 대립. 서양에서는 종교와 철학(학문)이 분리돼 있다. 그들은 상호 대립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신 은 신 이고 학문 은 학문 이다 는 이분법적 구조로 사회가 지탱해 왔다. 그래서 소크라테스(학문) 의 영역과 예수(종교) 의 영역은 확실히 분리돼 있다. 즉, 헬레네즘 과 헤브라이즘 은 별개의 것이다.
흔히 세계 4대 성인 으로 석가모니(釋迦牟尼, BC 563?~BC 483? 고대인도 네팔), 공자(孔子, BC 551~BC 479 노나라 중국),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경~BC 399 아테네 그리스), 예수(Jesus, BC 4?~AD 30 팔레스타인 이스라엘)를 든다. 동양에서 그것도 작은 조선반도에서 그렇게 종교적 이념이 마찰을 빚은 것도 이해하기 힘들 일이다. 결국 종교와 철학을 구분하지 못해 오늘날 수많은 불교,기독교 종파가 탄생되었을지 싶다.
동서양은 모든 것이 반대된 의식주조다. 동양은 결과 를 매우 중시하지만 서양은 과정 을 중시한다. 동양이 집단주의를, 서양은 개별주의를 선호한다. 특히 동양의 불교에서는 상하 수직적인 관계속에서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는 수평적 내세를 지향한다면, 기독교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수평적 관계속에서 신에 복종한다는 수직적 관계를 보이고 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수입되면서 많은 정치,사회 갈등을 겪은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다시, 선종 중심의 회암사 는 불교내의 갈등을 여실히 보여준 예이다. 불교내에서는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대립이 계속되었는데 회암사가 양 세력을 통합할려는 시도를 했었다. 즉, 많은 공부로 부처가 될려는 종파는, 배우지 않아도 고행과 수행을 통해 신이 될 수 있다는 종파와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기독교에서 정통 신학을 유학한 교회목사와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 부흥한 교회의 마찰로 보면되겠다. 게다가 구조적으로 비구승 과 대처승, 구교 와 신교 까지.
회암사의 경우는 이성계의 왕사 인 무학대사가 주지를 지낸 사찰로 무학(無學) - 배우지 않아도 수행하면 된다는 그의 설법이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유생들의 눈에 가시였을 것이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결국 문정왕후 사후 유생들은 회암사 중창을 주도했던 허응 보우普雨 (고려말 태고사太古寺 주지 태고국사 또는 원증국사 보우普愚 와 구별)를 귀양보내 살해하고 절도 폐허로 만들었다.
양주 회암사 터에는 건물의 웅장함이나 대칭을 이룬 건축술을 볼 수 있는 대리석기단도 상당 수 남아있다. 조선 중기까지 왕실과 관련돼 대규모 중창이 있었기에, 한순간에 막을 내린 여주 고달사보다 훨씬 발전한 모습이다. 그러나 규칙성이나 규모는 커졌을지언정 화려함은 덜한 느낌이다. 고려청자와 이조백자의 차이 정도.
이성계가 상왕으로 물러나 함흥을 오가다 불곡산 지나 한양이 훤히 보이는 여기에 머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양주에서 임꺽정 과 김삿갓 이 났다는 것은 또 무슨 시대의 부조화인가. (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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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암사터에서 본 불곡산(佛谷山)은 마치 용(룡 龍)이 꿈틀대는 것 같이 매우 특이한 모습이다. 문헌에는 없지만 회암사가 터를 틀고 이성계가 중시 여긴 것도 바로 이 장면 - 지형적 풍수 때문이 아닐까,는 개인적 생각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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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측 칠봉산(七峰山)에서 이어진 천보산(天寶山) 아래 회암사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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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간지주(檜巖寺址 幢竿支柱 : 향토유적 제13호) 두 쌍이었다는 데, 기를 고정시키는 구멍이 없는 것도 특이하다.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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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사지 한켠에 유일하게 남은 회암사지 부도탑(檜巖寺址 浮屠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허응 보우普雨의 탑이라는 설도 있음)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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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암사 앞 우측에 불곡산, 앞쪽으로 도봉산과 수락산이 펼쳐진다.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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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사지에서 발굴된 기와장들. 이 일대에는 곳곳 깨진 기와들을 볼 수 있다.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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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암사지 박물관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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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楊州 檜巖寺址] : 검색 등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번지, 천보산(天寶山)에 있는 회암사의 절 터.
사적 제128호. 건물 면적 약 1만평, 보호 사적지 총 10만평(33만㎡) 정도.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 창건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1174년(명종 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온 적이 있다는 기록도 있고, 북한산 태고사에 있는 원증국사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 조선중기 허응 보우虛應 普雨 1509~1565와 구별]의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에 의하면, 보우(普愚)가 1313년(충숙왕 즉위) 13세때 회암사 광지(廣智)에게 출가했다는 기록이 있어어 이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
1326년 고려에 온 인도 승려 지공(指空)의 천력연간(1328~29)에 회암사의 절터를 측량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을 창건했다고 한다. 1378년(우왕 4) 지공의 제자 나옹(懶翁)이 중창하였고 그 뒤 나옹화상의 제자 무학(無學)이 중건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이곳에 머물게 했다.
고려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은 승려 수가 3,000명에 이르는 대가람이었으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로, 목은 이색은 「회암사 주조기」에 “집과 그 모양새가 굉장하고 미려하여 동방에서 첫째”라고 적었다. 조선의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효령대군(孝寧大君)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회암사에는 그런 의미에서 역대 왕을 제사 지냈던 곳이며, 이성계의 정신적인 은신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이곳에 머물렀음을 입증이라도 하듯 2000년 6월쯤에는 이성계와 무학대사 등의 호칭이 새겨진 대형 청동풍탁(靑銅風鐸)이 출토되었다. 조선왕실의 원찰이었던 회암사 터에서 발견된 이 풍탁에는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 ‘조선국왕(朝鮮國王)’, ‘왕현비(王顯妃)’, ‘세자(世子)’라는 명칭과 ‘홍무洪武 27년(태조 3년)’이라는 글씨 등이 새겨져 있어 새삼 시공을 초월한 역사를 느끼게 한다.
1472년(성종 3)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주도적으로 중창했으며, 명종 때, 그의 어머니며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재흥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에 의해 나라의 정책이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1565년(명종 20) 사월 초파일에 허응 보우(虛應 普雨)가 잡혀가 죽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화되었다.
폐사 후, 1821년(순조 21) 지공·나옹·무학의 부도와 탑비가 지방 토호에 의해 고의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정에서 1828년에 부도와 비(碑)를 중수하면서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檜岩寺)'라는 사호를 계승하였다. 1922년에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으며 세 분의 진영을 모셨다. 현재도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유물은 앞 회암사지박물관에 보관 전시 중.
절터 중요문화재로,
회암사지 나옹선사선각왕사비 (檜巖寺址 懶翁禪師禪覺王師碑:보물 제387호),
회암사지 무학대사홍융탑 (檜巖寺址 無學大師洪融塔, 부도 : 보물 제388호),
회암사지 무학대사홍융탑 앞 쌍사자석등 (檜巖寺 無學大師洪融塔 앞 雙獅子石燈 : 보물 제389호),
회암사지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檜巖寺址 指空禪師浮屠 및 石燈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회암사지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檜巖寺址 懶翁禪師浮屠 및 石燈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회암사지 무학대사비 (檜巖寺址 無學大師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회암사지 부도탑 (檜巖寺址 浮屠塔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회암사지 당간지주 (檜巖寺址 幢竿支柱 : 향토유적 제13호) 등이며,
회암사 목조여래좌상 및 복장물 (檜岩寺 木造如來坐像 및 服藏物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6호) 이 있다.
*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한국사찰전서(寺刹全書)』(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전통사찰총서』 5(사찰문화연구원, 1995)
등등
[※ 문화재 관리에서 혼용되는 명칭 :
탑(塔)=부도=부도탑=승탑=사리탑=묘탑, 비(碑)=부도비=탑비=비탑]
▲ 양주 회암사지 는 궁터를 제외하고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유적지로는 최대이며 가장 웅장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사진속 뭉퉁한 지주 는 평면 'ㄷ'자 형태의 괘불지주. 문화재 가치가 있다고 사료됨 ⓒ20130918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조선후기 지도. 회암사(檜巖寺) 폐사지를 회암사대(檜岩寺垈)로 기록 ⓒ서울포스트
▲ 회암사터에서 본 불곡산(佛谷山)은 마치 용(룡 龍)이 꿈틀대는 것 같이 매우 특이한 모습이다. 문헌에는 없지만 회암사가 터를 틀고 이성계가 중시 여긴 것도 바로 이 장면 - 지형적 풍수 때문이 아닐까,는 개인적 생각 ⓒ서울포스트
▲ 좌측 칠봉산(七峰山)에서 이어진 천보산(天寶山) 아래 회암사 ⓒ서울포스트
▲ 당간지주(檜巖寺址 幢竿支柱 : 향토유적 제13호) 두 쌍이었다는 데, 기를 고정시키는 구멍이 없는 것도 특이하다. ⓒ서울포스트
▲ 폐사지 한켠에 유일하게 남은 회암사지 부도탑(檜巖寺址 浮屠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허응 보우普雨의 탑이라는 설도 있음) ⓒ서울포스트
▲ 회암사 앞 우측에 불곡산, 앞쪽으로 도봉산과 수락산이 펼쳐진다. ⓒ서울포스트
▲ 폐사지에서 발굴된 기와장들. 이 일대에는 곳곳 깨진 기와들을 볼 수 있다. ⓒ서울포스트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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