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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연꽃숲속, 한국불교 '태고종' 총본산 봉원사(太古宗 奉元寺)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4/08/11 23:04:31)

[탐방] 연꽃숲 속 한국불교 태고종 총본산 안산 봉원사(太古宗 鞍山 奉元寺)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한국불교 태고종' 총본산 봉원사(奉元寺). 혼인을 할 수 있는 종법 때문에 해방 후 사찰 재산 거의를 정권의 비호를 받은 조계종에 빼앗기고, 현 조계사(종로 소재, 당시 태고사)에서 쫒겨났다. 현재도 여기 봉원사 땅은 조계종 소유고 운영권만 태고종이 갖고 있다. 아픔을 알 리 없는 연꽃은 봉원사의 상징이 되다시피 해 매년 서울연꽃축제가 여기서 열린다. ⓒ20140809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봉원사홈페이지

태고 보우(太古 普愚, 원증국사)를 종조 로 모신 태고종(太古宗)은 대처승 제도를 수용한 종법에 혼인이 허용된다. 우리나라에서 조계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종파가 비슷하며, 가장 큰 종단인 태고종과 법화종이 대표적이다. 종법이 그렇다는 얘기지, 해당 종파에도 많은 승려가 단신수행을 하고 있어 혼인 가능 유무가 종파를 나누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더욱이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최근 년 솔로예찬이라는 몽니를 부린 조계종파를 제외하고는 혼인(혼인 후 출가 포함)을 당연시 해왔다. 그들은 왜란,호란 등 난리마다 승군으로 전장에 뛰어들었고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현실을 도피해서 산속에서 도를 닦았다는 싱글 중들이 해방을 맞자, "우리가 진짜 중이다, 우리는 (독재,부패를 하든) 정치,사회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수도만 하겠다"며 이승만 정권에 충성맹세를 한 댓가로 사찰 재산권을 확보했다.

수행만 하겠다는 이판승(理判僧)이 주류를 이룬 것 같은 조계종내에서도 사찰 유지와 경영에 뛰어난 사판승(事判僧)의 이재놀음에 소림사를 방불케하는 폭력시범이 난무하고 신정아 예일대 가짜 박사학위, 은처승 논란을 비롯, 양주까지 마시고 고스톱판을 벌이는 등 '이판사판' 개판의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의 불교활동이 자유로와질 때 한용운,이회광을 비롯한 대처승(帶妻僧 화택승火宅僧)이 주도해 4대문안에 1910년 각황사를 지었다. 1929년에는 '조선불교 선교(禪敎)양종 승려대회'를 여기서 열었다. 이 당시 중앙에는 일본 불교 영향을 더 받은 대처승이, 지방에는 비구승이 주로 분포했다. 1937년 각황사는 북한산 태고사 를 모태로 '태고사'로 이름을 바꾸고 1938년 조계종을 출범했다. 태고사와 조계종은 원증국사(태고 보우)가 선·교 양종을 통합해 '조계(曹溪)'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해방을 맞으며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로 비구(니)들이 왜색불교 척결을 외치며 '태고사'를 떼고 아예 (대한불교 조계종) '조계사' 간판을 건다. 이때 종조(宗祖) 도 '보우'에서 '지눌'로 바꾸고 태고종 대처승들을 몰아낸다. 홀로 산속에서 수도한답시고 숨어 있다가 태고사로 굴러온 돌이 어떤 식으로든 조선 불교의 맥을 유지해 온 박힌 돌을 빼내는 시기였다.

여기 봉원사도 1954년부터 시작된 오랜 불교계 분규 과정에서 현재도 사찰 운영은 한국불교 태고종이, 토지 소유권은 대한불교 조계종이 나눠 가져, 순천 선암사와 함께 대표적인 분규 사찰로 남아있다.

소수의 조계종이 반란에 성공하며 종파갈등과 사리사욕에 충실한 사이, 서양 기독교는 차분하게 한국 시장을 공략해 사교,친목장이 사찰에서 예배당으로 옮겨간다. 동양에서 기독교(신,구교 합) 인구 최다(약 1200만명), 기독교 인구비율 최대(약 25%) 국가에 교황 요한 바오로 이후 이번에는 프란치스코 가 방문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어떤 상황이든 호불호가 있듯 한반도내 기독교 창궐은 구한말 쇄국으로 곤혹을 치른 역사가 있기에 자유로운 개방으로 서양문물을 접목한 장점도 있지만, 구원파 와 관련된 세월호 등 사이비기독교도 만연하여 인본적 의식이 멸종한 사례도 발생했다. 한국이 동양의 이스라엘 이라는 등.. 어떤 각도로는 간,쓸개 빠진 민족으로도 볼 수 있다.


비가 한 차례 쏟아진 8월초 토요일, 지난번 무악산(안산)에서 내려 본 봉원사가 생각났다. 연꽃도 제 철일 터, 축제전에 들른 것도 괜찮으리라.

진입로변 탑과 탑비가 가지런하다. 경내에 들어서자, 수 백년 고목이 넘어진 채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엄청난 양의 공양그릇을 날으는 행자들로 봐 무슨 행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 탑 도는 사람도 한가하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등산객들도 많아 다른 사찰보다 자유롭고 서민적으로 느껴졌다. 아녀자들도 벤치에 앉아 한가한 담소를 나눈다.

대처제가 있어서 그런지 모르나 누구나 편한 이웃처럼 드나든 진정한 기복신앙터로, 공원처럼 서민과 중생이 부담없이 찾을 수 있는 절로 생각되었다. 또 스님들의 불명이나 법명에서도 그렇다. 통상적으로 법명을 쓰겠지만 주지스님의 경우 마일운(馬一雲)이라고 속 성(姓)을 같이 쓴다. 봉원사 홈페이지 용상방에 들러보니, 서정인스님,김태호스님,장운호스님, 심만춘스님.. 등 다른 종파처럼 추상적이거나 형이상적이지 않아 이웃 학고방 아저씨,아줌마 냄새가 난다.

봉원사 자료를 정리하면서 갑신정변 주역 중 한 사람인 박영효의 아들이 박춘서(*운허스님 雲虛)고 운허스님 아들이 박희덕(송암스님 松岩 , 박송암)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송암스님은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범패(梵唄)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봉원사 영산재를 주관해 오다 2000년 열반했다.
[*여기서 운허스님은 봉선사 주지를 지냈던 운허스님(耘虛 1892~1980년, 법명 용하龍夏)과 다름]
[**범패(梵唄 불교음악) : 가곡·판소리와 함께 한국 전통 3대 성악곡 중 하나]
[***봉원사영산재(靈山齊)는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제 제50호 이며,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으로 등재됐다. 1988년부터 매년 6월 6일에 봉행]

또 봉원사 연꽃축제(서울연꽃문화축제)가 올해 12회로 2014.08.17 ~ 2014.08.23로 예정돼 있다. 물속에 뿌리를 담군 연꽃은 더위가 시작되는 7월부터 더위 끝무렵 9월까지 각각의 개체가 피고지고를 반복한다. 며칠전 소개한 백일홍(百日紅 배롱나무꽃)과 꽃의 개화 속성이 같은 백일화 라고 볼 수 있다.

오늘도 무악산으로 향한 것은 '관음바위' 때문이다. 안산(鞍山)은 조선 때 안현(鞍峴 길마재, 현 무악재)에서 지명으로 쓰고 있지만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한다. 옛지도에 보니, 지금 봉원사와 이화여대,연세대 일대가 '백제고도(百濟故都)', '고려남경(高麗南京)' 터였다. 조선건국시 경기도 관찰사 하륜 이 여기에 궁을 짓자고 했으나 정도전에 밀려 북악산 밑으로 결정되었다. 소설을 써보면, 하륜이 주장할 당시는 '모악산(母岳山 어머니 산)'이었는데, 북악산으로 낙찰된 후 정도전이 '무악산(毋岳山 큰 산이 아니다 또는 산 아닌 산)' 으로 바꿔버린 것이 아닐까.

또 종로구 무악동 에 사는 사람들은 '무악(毋岳)'이 아니고 무학대사(無學大師)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악재 가 아닌 '무학재'가 맞으며 동 이름을 '무학동'해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무악산은 가보면 알지만 남산(잠두봉)보다 낫다. 영험한 기도바위도 많아 봉원사 전설을 말해준 관음바위도 그 중 하나다. 안산 꼭대기 볼록볼록한 봉우리를 동봉과 서봉이라고 해 이것을 보고 '길마'가 유래했다고 하지만 내 시각으로는 전혀 아니다. 역시 지금까지 자료에 없어 소설로 부연하자면, 사람이 다녀야 비로소 재(峴)로 불리는 '길마' 라는 안현은 인왕산과 무악산 사이를 말하며 현재 무악재다. 무악(毋岳)은 정도전 이전에 모악(母岳) 이었을 것이고, 그 근거로 꼭대기 두 봉우리는 사람이 넘어 다닐 일이 없어 재(峴)가 아니라 당시 풍수가들이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봉원사 일대가 백제때부터 길지였다고 하륜 이 주장했고, 이를 뒤집은 정도전은 조선건국에 일조했으나 이방원(태종)에게 비참하게 살해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오늘도 즐거운 상상을 하는 사이 어느덧 모악산(母岳山) 관음바위 에 이르렀다. (龍)

▲ 삼천불전(三千佛殿). 1945년 화주 김기월 스님과 김운파 스님 등의 힘으로 45간 규모의 광복기념관으로 지어졌으나 6.25때 소실. 1988년 삼천불전으로 복원을 시작하여 9년만에 단일 목조건물로는 국내최대(210평) 건물로 완성했다. 내부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범어 바이로차나 vairocana를 음역, 부처님 眞身 뜻) 과 삼천불을 봉안했다. 삼천불은 과거세의 천불과 현재세의 천불, 미래세의 천불을 아울러 이르는 말 ⓒ서울포스트
▲ 이동인 선사(李東仁 禪師) 본수인상(本手印像) ⓒ서울포스트

▲ 영조 가 내린 '奉元寺' 현판도 전쟁때 소실. 奉元寺 雲岡 石峯 書(봉원사 운강 석봉 서). 운강석봉 (글씨의) 자료는 찾기 힘들다. ⓒ서울포스트

▲ 범종각.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다시 쓰기 위해 불태운 충남 덕산 가야사(伽倻寺)에 있었던 종(鐘)은 이곳으로 옮겨와 대웅전 안에 있다. ⓒ서울포스트
▲ 해수관음상 http://blog.naver.com/cssook/70146130880 ⓒ자료
▲ 주인 없이 방치된 부도 ⓒ서울포스트
▲ 연꽃대 모양의 석등 ⓒ서울포스트


▲ 한글확회 창립한 곳 ⓒ서울포스트

▲ 봉원사 전설이 있는 관음바위 ⓒ서울포스트



▲ '한국불교 태고종' 총본산 봉원사(奉元寺). 혼인을 할 수 있는 종법 때문에 해방 후 사찰 재산 거의를 정권의 비호를 받은 조계종에 빼앗기고, 현 조계사(종로 소재, 당시 태고사)에서 쫒겨났다. 현재도 여기 봉원사 땅은 조계종 소유고 운영권만 태고종이 갖고 있다. 아픔을 알 리 없는 연꽃은 봉원사의 상징이 되다시피 해 매년 서울연꽃축제가 여기서 열린다. ⓒ20140809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삼천불전(三千佛殿). 1945년 화주 김기월 스님과 김운파 스님 등의 힘으로 45간 규모의 광복기념관으로 지어졌으나 6.25때 소실. 1988년 삼천불전으로 복원을 시작하여 9년만에 단일 목조건물로는 국내최대(210평) 건물로 완성했다. 내부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범어 바이로차나 vairocana를 음역, 부처님 眞身 뜻) 과 삼천불을 봉안했다. 삼천불은 과거세의 천불과 현재세의 천불, 미래세의 천불을 아울러 이르는 말 ⓒ서울포스트
▲ 이동인 선사(李東仁 禪師) 본수인상(本手印像) ⓒ서울포스트
▲ 영조 가 내린 '奉元寺' 현판도 전쟁때 소실. 奉元寺 雲岡 石峯 書(봉원사 운강 석봉 서). 운강석봉 (글씨의) 자료는 찾기 힘들다. ⓒ서울포스트
▲ 해수관음상 http://blog.naver.com/cssook/70146130880 ⓒ자료
▲ 범종각.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다시 쓰기 위해 불태운 충남 덕산 가야사(伽倻寺)에 있었던 종(鐘)은 이곳으로 옮겨와 대웅전 안에 있다. ⓒ서울포스트
▲ 주인 없이 방치된 부도 ⓒ서울포스트
▲ 연꽃대 모양의 석등 ⓒ서울포스트
▲ 한글확회 창립한 곳 ⓒ서울포스트
▲ 봉원사 전설이 있는 관음바위 ⓒ서울포스트
▲ ⓒ서울포스트

※ 봉원사[奉元寺] - 브리태니커 사전 요약 및 첨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1번지 안산에 있는 절.

한국불교태고종 의 총본산. 889년(진성여왕 3)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금화산(金華山) 서쪽에 있는 신도의 집을 희사받아 창건한 뒤 반야사(般若寺)라 했다고 한다. 그뒤 고려말 공민왕 때 태고(太古) 보우(普愚)가 중건·보수하고 금화사(金華寺)라고 개칭. [※ 금화산은 현 안산(무악산) 끝부분 도드라진 곳으로 추정. 금화터널 참고]

1392년(태조 1) 이색(李穡)이 지은 보우의 비문을 본 태조 이성계가 그의 문도가 되기를 자청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1396년 원각사(圓覺寺, 폐사터가 현 파고다,탑골공원)의 삼존불상을 옮겨 봉안했으며,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시는 진전(眞殿)이 있어 조선시대 불교억압정책 아래에서도 번성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당우와 암자가 소실된 것을 지인대사(智仁大師)가 중창. 1651년(효종 2) 봄에 큰 화재로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소실된 것을 1665년(현종 6)에 극령(克齡)과 휴엄(休嚴) 등이 다시 중건. 1748년(영조 24)에 왕이 직접 땅을 하사하자 찬즙(贊汁)·증암(證岩) 등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우고 이듬해에 영조가 '봉원사'라는 현판을 내린 것이 절이름이 되어 신도들 사이에서 '새절'로 불렸다.

1788년(정조 12)에는 8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가 설치, 1855년(철종 6) 화주 은봉(銀峰)의 도움으로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한 것을 비롯 이후 시왕전, 약사전 등이 건립되었다.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은 이 절에 5년간 머물면서 1884년 갑신정변의 주요인물이었던 김옥균·서광범·박영효 등과 교류를 하여 봉원사는 개화사상의 전개와 보급에 일익을 담당했다. 1911년에는 보담(寶潭)이 절을 크게 중수하고, 1939년에는 주지 김영암(金英庵)이 명부전을 중수했다.

6·25전쟁 때 소실된 건물을 점차 복구했는데 1966년 최영월(崔映月)은 흥선대원군의 별저인 아소재(我笑齋)를 옮겨 지금의 대방(大房:염불당)을 지었다. 1970년 태고종(太古宗)이 조계종으로부터 분리됨에 따라 봉원사는 한국불교태고종의 종찰(宗刹)이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명부전·극락전·미륵전·만월전·영각(影閣)·운수각(雲水閣)·영안각(靈晏閣)·칠성각 등이 있다. 대웅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8호)은 1991년 10월 8일 전기누전으로 전소되었으나 94년에 복원했다.

이밖에 중요유물로는 도선의 반야암 편액, 정도전의 명부전 편액, 김정희의 청련시경(靑蓮詩境)·산호벽루(珊瑚碧樓), 이완용의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信力),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의 무량수각 편액, 장승업의 '신선도' 10폭병풍, 7층석탑, 공덕비, 석등 등이 있다.

또한 스님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인 범패 기능보유자 박송암(朴松岩 2000년 열반)스님과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단청) 이만봉(李萬奉)스님이 주석(住錫)하여 한국불교의 전통의식인 범패와 영산재(靈山齋,)가 전승·보존되고 있다.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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