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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선종의 수찰사, 강남 삼성동 수도산 봉은사(奉恩寺)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3/11/05 22:34:23)

[탐방] 선종(禪宗)의 수찰사(首刹寺), 강남 삼성동 수도산 봉은사(修道山 奉恩寺)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절 = 사, 찰, 사찰 : 수사찰(首寺刹) = 수찰사(首刹寺) = 수찰(首刹) = 수사(首寺). 1551년(명종 6) 문정왕후(文貞王后)가 봉은사를 선종수찰(禪宗首刹)로, 봉선사(奉先寺)는 교종갑찰(敎宗甲刹)로 하는 승과(僧科)를 부활하여 불교재흥정책을 폈다. (기사는 광범위한 자료 등을 참고해서)]

※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보우' 라는 스님은 고려말 북한산 태고사(太古寺)를 창건한 '원증 보우 국사 (圓證 普愚 國師)'와 조선 중기 '허응 보우 대사(虛應 普雨 大師)'가 있다. 두 스님은 양주의 '회암사'(檜巖寺 : 지공화상指空和尙 의 창건설, 나옹대사 懶翁大師 가 중건)와 강남의 '봉은사'(奉恩寺) 와도 직접 관련 있으며, 우리 불교 중심에 있었다.]


▲ 빌딩 숲에 싸인 천년고찰 '봉은사' 진입 길 ⓒ20131105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보우(普愚) :

* 태고보우원증국사(太古普愚圓證國師 1301∼1382) : 고려말 고승. 현 태고종의 종조, 조계종의 중흥조(지금도 조계종 내에서는 종조로 보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석가세존 제57대손이며 임제정맥(臨濟正脈) 제19대 적손.

태고(太古)는 호(號), 보우(普愚)는 휘(諱)이고, 법명은 보허(普虛), 시호는 원증(圓證).
홍주홍씨(洪州洪氏) 집안출신으로 경기도 양근(현 양평)에서 태어나 13세 에 (고려 충선왕 5) 가지산파(迦智山派)에 속한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광지선사(廣智禪師)를 스승으로 해 득도. 19세 때(충숙왕 6) 가지산문(迦智山門) 의 총림인 보림사(寶林寺)에서 선지(禪旨) 참구... 41세 때(충혜왕 복위 2) 삼각산 중흥사(重興寺) 주지 로 있으면서 그 옆에 개인 기도처 태고암(太古庵, 현 태고사)을 지어 기거했다.
56세 때(공민왕 5) 봉은사(奉恩寺)에서 개당(開堂)했으며 이후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로 28년을 봉직, 공민왕의 왕사일 때 수도를 남경(南京:漢陽)으로 옮길 것도 주장했으나 신돈 이 사승(邪僧)으로 지목하는 등 권력다툼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82세에 세연을 마침.

※ [고려사 : ...공민왕 5년,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여 승려 '보허(普虛)'의 설법을 들었다. 공주가 명덕태후(明德太后)를 뒤따라오자 시녀(侍女)와 승도(僧徒)가 서로 마구 섞여 분별이 없었다. 왕이 또 보허를 내전(內殿)으로 맞아들이자 공주와 태후가 기뻐하여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며 몸소 다과를 권할 뿐 아니라 공주는 유리쟁반과 마노(瑪瑙)로 만든 수저 등을 시주하였다...]

삼각산 태고사(太古寺)는 중흥사 주지로 있던 태고 보우가 개인적으로 수도하기 위해 세운 작은 암자로, 후일 일제가 불교진흥을 추진할 때 한국불교의 뿌리가 된다.

불교를 천시한 조선이 1910년 일본에 망하면서 승려의 도성출입도 허용되었다. 이에 1910년 대처승인 한용운(韓龍雲) ·이회광(李晦光) 등이 주축이 돼 전국 승려들의 모금으로, 종로 견지동에 '각황사(覺皇寺)'라는 절을 세웠다. 1938년에는 전북 정읍의 사찰 건물을 그대로 가져와 대대적인 중수를 거쳐 북한산 태고사를 모태[종조를 원증국사 '태고 보우(太古 普愚)]'로 '태고사(太古寺)'라고 하였으나, 1954년 일제의 잔재를 제거하는 불교정화운동을 통해 현재의 '조계사(曹溪寺)'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불교정화운동이란,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대처승과 비구승의 갈등속에서 조계종계의 비구승이 태고사를 접수한다. 이후 공권력을 엎고 대처승을 몰아낸 다음, '조계사'로 개사하고 종조에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중흥조에 '원증국사 보우(圓證國師 普愚)'로 바꿔, 아직까지 종조 논란 속에 오늘에 이른다. (쫒겨난 태고종은 종조를 '태고 보우'로 유지하고 있다.)

= 보우(普雨) :

* 허응보우(虛應普雨 1509 ~ 1565) : 조선중기 고승. 호는 허응(虛應),허응당(虛應堂),나암(懶庵)이며 법명은 보우(普雨).
가계 등은 미상이며,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으로 출가하여, 장안사(長安寺)·표훈사(表訓寺)·백담사(百潭寺) 등에서 수행. 경기도 용문사(龍門寺)의 견성암(見性庵)에 있던 지행(智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참선과 경학 연구에 집중했다. 탁월한 수양력과 불교·유교에 관한 뛰어난 지식으로 유명한 유학자들과도 사귀었다.
그 중에서 재상이었던 정만종(鄭萬鍾)과는 각별해 정만종이 보우의 인품과 그 도량이 큼을 조정과 문정대비(文定大妃)에게 알리게 됨에 따라, 뒷날 인연을 맺게 된다.
함경도 함흥에 머물다가 호남으로 내려가는 도중 병을 얻게 되어 경기도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의 차안당(遮眼堂)에서 요양하고 있던 중, 1548년(명종 3) 문정대비로부터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임명받는다.

[※ 자료: 문정왕후(文定王侯)가 선.교(禪敎) 양과를 부활시키며 보우를 선종판사(禪宗判事)로 발탁해 봉은사 주지가 된다. --> 보우(普雨) 를 판선종사 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 봉은사 주지(奉恩寺住持)로, 수진(守眞) 을 판교종사 도대사(判敎宗事都大師) 봉선사 주지(奉先寺住持)로 삼았다.]

주지로 취임한 뒤, 대비로 하여금 능침(陵寢)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황언징(黃彦澄)을 처벌하고 전국 사찰에 잡인 출입을 금하는 방을 붙이도록 하였다. (조선 때는 불교비하로 인해, 절은 유생들의 유흥장처럼 사찰내에서 음주,가무 가 보통이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문정왕후의 조력으로 양주 회암사를 조선 최대 중심사찰로 확장시켰다. 자연히 유생들의 반발이 극에 달했다. 대궐 출입이 잦아진 보우를 출입금지하라는 상소의 발단은 조선 최초 서원[소수서원(紹修書院) :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었으나 퇴계 이황(李滉)의 건의로 소수서원으로 사액(賜額)됨] 을 세운 풍기군수 주세붕으로부터 나왔다. 불교의 저변이 확대되자 전국의 유생들도 들고 일어났다. 문정황후와 보우의 행실까지 조정에 고하거나 '불교의식을 폐지하고 절들을 헐고 역적 보우를 잡아 죽이라'는 상소문이 대부분이었다. 단식으로 자리를 지키겠다는 유생들을 향해 문정황후는 '그럼 그 자리서 굶어 죽어라'는 태도였다.

보우는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佛法)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는 사명감으로 휴정(休靜, 서산대사 西山大師)·유정(惟政, 사명대사 四溟大師) 등 인재를 발탁하고 종단을 소생시킨다. 제도적 장치로 안정되자 서산대사 에게 주지를 맡기고 춘천 청평사(淸平寺)로 간다. 종단 패권이 일자 봉은사 주지로 복귀했다가, 다시 왕자의 태봉(胎峯)이 있는 산의 나무로 사원을 증축한 사건에 연루되어 직을 박탈당하고 봉은사에서 물러난다.

이후 회암사 중창사업에 전념, 회암사에서 대규모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왕후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조선 불교도 쇠퇴의 길을 걷는다. 이후 유생들의 상소에 명종이 보우의 승직을 박탈하고 사찰 출입을 금지하자, 한계산 설악사(雪岳寺)로 은거했으나, 율곡 이이(李珥)가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함에 따라 1565년 제주도에 유배돼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참된다. 불교계는 이를 '순교'로 보고 있다.

당연히 보우 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있지만, 고지식하고 청렴한 지식인 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자신은 그저 불교를 중흥시키고 불교계의 중흥시조로 인정받기만을 바랬다. 죽기 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빈도를 대비께 추천한 경기 감사 정만종 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죽으면 소로 태어나 봉은사에서 봉사하겠습니다."

보우가 떠난 회암사는 약탈되고 불태워졌다. 회암사 문화재는 지금도 해외에서 발견되고 있다. 문화재 제자리찾기 운동본부 혜문 스님과 회암사 주시 향산 스님이 이를 국내로 환수하게 위해 노력한다는데, 1565년 문정황후가 기증한 불화가 미국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종교인 '불교'와 대립한 '유교'는 유학이라는 학문이지 종교가 아니다. 이번 자료를 정리하다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회암사를 불교중흥의 거점 삼아 대가람으로 중창하다가 희생된 스님은 '허응보우' 뿐만이 아니다. 고려말 왕사 '나옹혜근' 은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명을 받들어 밀양 영원사 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 입적했다,고 통상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 [그러나 또 다른 회암사 연혁(고려로 옮긴 인도의 등불)에 의하면, 나옹이 회암사 중창에 맞춰 낙성식 전 문수회(文殊會)를 열었는데, (유생들에 천대받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다고 한다. 낙성식에 더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을 우려에 성리학으로 무장된 사간들이 주동이 되어 나옹을 먼 곳으로 추방하도록 하였다.(위의 책 201쪽) 이런 탄핵으로 나옹은 낙성식이 있은 1376년 4월 15일 이후 밀양의 영원사瑩原寺로 이주하게 되었다. 나옹은 영원사로 가는 중 낙성식이 있은 지 한 달만인 5월 15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런 갑작스런 나옹의 입적을 허흥식과 황인규는 독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두 차례 나옹을 죽였다고 나오는데 그때 쓴 단어가 ‘벨 주誅’이다. 즉 처단했다는 뜻이다. 이런 표현과 갑자기 급서했던 사실로 보아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나옹의 죽음은 오히려 불교계를 단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나옹이 죽자 많은 이적이 나타났다. 선각왕사비문에는 사리를 씻으려는 순간 구름이 없는 하늘에서 주변에만 비가 내린다든지, 사리가 155과 나왔는데 기도하니 558과로 늘어나는 등의 이적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역대고승비문 고려편 4/361쪽) 이런 이적들로 나옹을 부처와 같은 수준으로 격상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이런 이적으로 나옹현창운동이 일어나 입적한 신륵사뿐만 아니라 회암사, 안심사 등 여러 곳에 분사리되어 부도가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영정이나 의발 등을 모신 절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추가 내용은 회암사 제 4장인 석조유물 편 또는 나옹 현창운동에 대한 논문참조)]


이라는 기록이 놀랍다. 우리들의 정신문화도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조선 땅에서 불교를 억지한 유학을 현대에 와선 기독교가 대신하고 있다고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 빌딩 숲에 싸인 강남 삼성동 천년고찰 봉은사 ⓒ서울포스트

내가 이제껏 가장 많은 절집앞을 지나다닌 곳이 봉은사(奉恩寺)고, 가장 많이 들락거린 교회가 금란교회다. 장사를 한다고 매일같이 영동대교를 넘어 직진하거나 이 절앞으로 거래처를 오갔다. 한가할 때 들러 고작 주차장에서 '이렇게 큰 절당은 무슨 복이 있어 강남 한복판에 있을까' 정도로 생각했다.

주변에 건물들이 들어설 때, 봉은사 스님들은 수행에 방해된다면 목탁을 두드리며 시위를 했다. 지금은 삼성 이건희 회장까지 길건너로 이사 왔으니, 얼마나 행복한 목탁소리였겠는가.

요 며칠 사이 어지럼증에 쓰러질 뻔했다. 무슨 병인가 싶어 여기저기 두들겨 보았다. 목도 비틀어 보고.. 이상은 없었다. 그렇다면, 올해 유난히 사찰에 관심이 많았는데 혹시 득도 의 길로 가라는 뜻 아닌가 싶었다. 중? 아니면 교회를 한동안 안나갔더니 그런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우선 잘먹고 쉬고 게으름을 피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새 일하고 산으로 시내로 절로 많이도 다녔다. 10월은 각오하고 일을 했으니 피골은 상접했어도 지친 줄은 몰랐다. 일하기도 놀기도 좋은 계절에서 노동을 택했었다. 미래를 위한 잠깐의 투자다. 매일 아침 비아그라(비타민 한 알) 먹고 일 나온다,고 농했으니 그땐 힘이 들 리 없었다.

충분하게 쉬니 멀쩡해졌다. 엊그제는 아는 권사님한테 전화가 왔다. 안부 물으며 '가끔씩 ㅇㅇ아빠를 위해 기도도 한다'는 것. 언제 식사하기로 하면서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해 봤다. 그렇다, 내가 쓰러지지 않고 일했던 것은 목표도 체력도 아닌 그 분의 기도에 은혜도 받았을 거라는.

세상의 기도는 누군가를 마음으로 '성원'하는 것이다. 자식에게 부모만큼 많은 기도를 하는 사람은 없다. 어머니도 절에 내 이름을 올리고 그 먼 골짜기를 다니셨다.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면 짐승이다. 이를 '은혜를 받들라는 봉은사(奉恩寺)'가 말하고 있다.

나오는 길에서 세운지 얼마 안된 보우대사 상 을 보았다. 몇 해전까지 주지였던 명진스님(明盡)의 밝은 강단이 스친다. 대통령한테도 막말을 쏟았던 좌충우돌 스님, 그러나 유쾌한 스님, 통쾌한 스님, 멋진 스님... 이런 스님이 계신 절 앞을 지나며 난 담배를 빡빡 폈으니... (龍)


※ 봉은사 [奉恩寺] : 자료검색 등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수도산修道山) 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에 속한다.

시초는 794년(원성왕 10)에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한 견성사(見性寺)이다. 그뒤 1498년(연산군 4)에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을 위해 이 절을 중창하고 봉은사라고 바꿨다. 1551년(명종 6)에 문정왕후(文貞王后)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보우선사(普雨禪師)를 이 절의 주지로 삼았다. 이때 양주(楊州)의 회암사(檜巖寺)를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으로 삼는 동시에 봉은사는 선종수찰(禪宗首刹)로, 봉선사(奉先寺)는 교종갑찰(敎宗甲刹)로 하는 승과(僧科)를 부활하여 불교재흥정책을 폈다.

1562년 보우선사가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선릉의 곁으로 옮기고 이 절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병화를 입어 소실된 것을 1637년(인조 15)에 경림(敬林)과 벽암(碧巖)이 중건. 1665년(현종 6)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92년(숙종 18)에 왕실의 시주로 중건. 1747년(영조 23)에 다시 왕실의 시주로 상헌(尙軒)과 영옥(穎玉)이 중수. 1789년(정조 13)에는 선욱(善旭)과 포념(抱念)이, 1825년(순조 25)에는 경성(鏡星)과 한영(漢映)이 중수.

1912년에 31본산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1939년 실화(失火)로 주요전각들이 소실된 것을 1941년 주지 도평(道平)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판전(板殿)·명부전·법왕루(法王樓)·심검당(尋劍堂)·북극전(北極殿)·만세루·천왕문(天王門)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지정사년명(至正四年銘:1344)이 있는 고려청동누은향로(高麗靑銅縷銀香爐:일명 烏桐香爐, 보물 제321호,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가 있고, 판전에는 철종 때 영기대사(永奇大師)가 조각한 〈화엄경소〉를 비롯한 〈금강경〉·〈한산시〉·〈유마경〉 등 많은 목판본이 보존되어 있다. 이밖에 1392년에 주조한 동종이 있으며, 서울시 유형문화재 여러 점이 있다.

▲ 청담동에서 삼성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백제 때 축성한 삼성리토성. 영동대로가 토성을 가르며 양 옆으로는 경기고, 아이파크 가 들어서 있다.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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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은사는 자유로운 가람배치에 건물부터가 굵직굵직하다. ⓒ서울포스트
▲ 향적원(香積院) ⓒ서울포스트
▲ 2000년인가, 중앙 '아셈타워' 로비와 엘리베이터홀 작업 때 옥상(43층?)에서 여기와 서울을 쳐다봤다. 역시 눈에 아무것도 뵈는 게 없을 시기 ⓒ서울포스트
▲ 보우당(普雨堂). 봉은사가 반석에 오른 것은 조선 중기 양주 회암사에 머문 적이 있는 '보우(普雨)'스님일 것이다. ⓒ서울포스트
▲ 다래헌(茶來軒) ⓒ서울포스트
▲ 중창을 승인받아 공사도 진행중 ⓒ서울포스트
▲ 흥선 대원(군) 위 영세불망비(興宣大院位永世不忘碑) ⓒ서울포스트
▲ 추사 김정희 기적비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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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산 봉은사 미륵대불(修道山 奉恩寺 彌勒大佛)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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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은사도 봉선사처럼 '동종' 외에는 보물이 될만한 유물,유적은 별로 없다. 그러나 서울시지정 유형문화재가 많다. ⓒ서울포스트


▲ 대웅전 앞 삼성동 일대. 승과시 터였다고 한다. ⓒ서울포스트
▲ 진신사리가 모셔진 삼층석탑과 대웅전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 고목의 라일락나무와 종루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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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포스트
▲ 부도탑 및 탑비 ⓒ서울포스트
▲ 허응(당) 보우대사 봉은탑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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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응당 보우대사 상(虛應堂 普雨大師 像)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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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출하는 일주문, 진여문(眞如門) ⓒ서울포스트

▲ 청담동에서 삼성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백제 때 축성한 삼성리토성. 영동대로가 토성을 가르며 양 옆으로는 경기고, 아이파크 가 들어서 있다. ⓒ서울포스트
▲ 빌딩 숲에 싸인 천년고찰 '봉은사' ⓒ서울포스트
▲ 봉은사는 자유로운 가람배치에 건물부터가 굵직굵직하다. ⓒ서울포스트
▲ 향적원(香積院) ⓒ서울포스트
▲ 2000년인가, 중앙 '아셈타워' 로비와 엘리베이터홀 작업 때 옥상(43층?)에서 여기와 서울을 쳐다봤다. 역시 눈에 아무것도 뵈는 게 없을 시기 ⓒ서울포스트
▲ 보우당(普雨堂). 봉은사가 반석에 오른 것은 조선 중기 양주 회암사에 머문 적이 있는 '보우(普雨)'스님일 것이다. ⓒ서울포스트
▲ 다래헌(茶來軒) ⓒ서울포스트
▲ 중창을 승인받아 공사도 진행중 ⓒ서울포스트
▲ 흥선 대원(군) 위 영세불망비(興宣大院位永世不忘碑) ⓒ서울포스트
▲ 추사 김정희 기적비 ⓒ서울포스트
▲ 수도산 봉은사 미륵대불(修道山 奉恩寺 彌勒大佛) ⓒ서울포스트
▲ 봉은사도 봉선사처럼 '동종' 외에는 보물이 될만한 유물,유적은 별로 없다. 그러나 서울시지정 유형문화재가 많다. ⓒ서울포스트
▲ 대웅전 앞 삼성동 일대. 승과시 터였다고 한다. ⓒ서울포스트
▲ 진신사리가 모셔진 삼층석탑과 대웅전 ⓒ서울포스트
▲ 고목의 라일락나무와 종루 ⓒ서울포스트
▲ 범종각 ⓒ서울포스트
▲ 부도탑 및 탑비 ⓒ서울포스트
▲ 허응(당) 보우대사 봉은탑 ⓒ서울포스트
▲ 허응당 보우대사 상(虛應堂 普雨大師 像) ⓒ서울포스트
▲ 입,출하는 일주문, 진여문(眞如門)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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