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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남한강 가 문화재의 보고 여주 신륵사(神勒寺)②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3/07/19 18:43:09)

[탐방] 남한강 가 문화재의 보고 여주 신륵사(神勒寺)②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여주 봉미산 신륵사(鳳尾山 神勒寺)는 일반 사찰과는 달리 강가에 있으며 절 이름도 특이하다.
ⓒ20130718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여주 신륵사((驪州 神勒寺)는 산속에 자리잡은 대부분의 사찰과는 달리 강변에 있다. 전통적 사찰명과도 다르게 좀 특이한 절 이름을 갖고 있으며 일대는 여주도자기와 함께 관광지로 조성돼 있다. 여주는 명성황후 생가, 이장한 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 과 녕능(寧陵) 등 문화유적지가 많고, 남한강을 끼고 있어 쌀,땅콩을 비롯한 농축산물도 풍부하다.

신륵사는 관광으로 오히려 가려진 면이 있지만 왕사인 나옹(1320∼1376)으로 인해 유명하다. 나옹선사는 고려말,조선초 최대의 사찰로 부흥한 양주 회암사(檜巖寺) 주시였다. 고려말 신륵사에 머물던 중 절을 크게 부흥시키고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신륵사는 국가지정 보물 7점 외 다수의 경기도지정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전에 한 번 왔었던 탓에 부지런히 경내를 기웃거리는데 7시 법고(法鼓)가 울린다. (龍)

ⓒ서울포스트
▲ 신륵사 중수비. 비석으로 흰색 대리석을 쓴 게 특징이다.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 구룡루 ⓒ서울포스트
▲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과 신륵사 다층석탑((多層石塔 보물 제225호)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서울포스트
▲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서울포스트
▲ 보물 제230호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 보제존자(나옹화상)석종(普濟尊者石鐘)등 보물 3기 ⓒ서울포스트
▲ 보물 제231호의 석등(石燈) ⓒ서울포스트
▲ 보물 제228호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서울포스트
▲ 보물 제229호의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서울포스트
▲ 부도탑(팔각원당형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원구형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 ⓒ서울포스트
▲ 보물 제180호 조사당(祖師堂) ⓒ서울포스트
▲ 명부전 ⓒ서울포스트
▲ 관음전 ⓒ서울포스트
▲ 범종각. 신륵사는 법고를 두드린 다음 범종을 타종한다. ⓒ서울포스트
▲ 심검당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검색(정리):

※ 나옹화상 은 고려 말의 명승으로 법명은 혜근(惠勤, 慧勤:1320∼1376),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속명은 아(牙)씨 원혜(元惠)로 경북 영덕군 영해(寧海)사람이다. 1344년(고려 충혜왕 5)에 양주 회암사에서 수도하고, 1347년(충목왕 3)에 중국 베이징으로 가서 인도의 고승 지공선사(指空禪師)로부터 불법을 배우고 돌아왔다. 1358년(공민왕 7)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머물다가 1361년 공민왕에게 설법하고 신광사(新光寺) 주지가 되었다.

1365년(공민왕 14) 회암사(檜巖寺)의 주지가 된 이후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사세(寺勢)를 크게 확장시켰다. 1376년(우왕 2), 1년 전에 들어간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했는데, 승탑(僧塔, 浮屠 부도)은 그해 9월 그가 오래 머물렀던 회암사에도 세워졌다. 시호(諡號)는 선각(先覺).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 불교의 맥을 이룬 승려에는,

삼국과 통일신라
보덕대사 승랑대사 겸익대사 아도화상 아차돈성사 자장율사 원광법사 원효법사 의상대사 명랑대사 진표율사 지증법사 도선국사 무상대사 도의국사

고려
균여대사 대각국사 보조국사 태고화상 나옹화상 백운화상

조선
무학대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설잠대사 초의선사

근대
만해선사

[여주 신륵사(驪州 神勒寺)]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신륵(神勒)이라는 절 이름은 미륵(彌勒) 또는 왕사(王師) 나옹(懶翁)이 신기(神奇)한 굴레(륵勒)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과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륵勒)를 신력(神力)으로 제압해 말이 순해졌다는 설이 있다. 여주의 '려(驪)'자는 '검은 말'이라는 뜻이다.

또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전 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9월에는 그가 오래 머물렀던 양주 회암사(檜巖寺)에도 부도가 세워졌다

이때 대전(大殿)·조당(祖堂)·승당(僧堂)·선당(禪堂)·종루(鐘樓)·동익당(東翼堂)·서익당(西翼堂)·남행랑(南行廊)·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다. 그리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도 건립되었다.

또,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불사(佛事)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 이곡(李穀)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無及)과 수봉(琇峯)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 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는 각운(覺雲)·신조(神照)·자초(自超) 등의 고승들과 최영(崔瑩)·조민수(曺敏修)·최무선(崔茂宣)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1381년에 각주(覺珠)가 금자(金字)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은 황복(黃複)을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든 뒤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소속 사찰인 영통사(靈通寺)에서 교열한 다음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봉안하였다.

또한, 대장각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권희(權僖)가 조성한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과 홍의룡(洪義龍)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그리고 강부인(姜夫人)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을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현 서울 내곡동)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중건하였고, 1700년(숙종 26)에는 위학(偉學)과 그의 제자 우안(宇眼)·천심(天心)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1726년(영조 2)에는 영순(英淳)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1796년(정조 20) 영돈녕 김이소(金履素)와 예조판서 민종현(閔鍾顯) 등이 중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범중각(泛中閣)·식당을 지었으며, 가자첩(嘉資帖) 50여 장을 하사받았다. 1858년(철종 9)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하여 불전(佛殿)·선료(禪寮)·종루 등을 중수하였고, 1929년에는 주지 성인(性仁)이 명부전(冥府殿)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祖師堂)·명부전·심검당(尋劍堂)·적묵당(寂默堂)·봉향각(奉香閣)·칠성각(七星閣)·종각(鐘閣)·구룡루(九龍樓)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으며,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신륵사에 보물로 지정된 7점 중 보물 제180호 조사당(祖師堂)①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指空)과 무학(無學)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집인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木造地藏三尊)을 비롯하여 시왕상(十王像)과 판관(判官)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적묵당은 선원(禪院) 구실을 한 건물이고, 심검당은 강원(講院) 구실을 하는 정면 6칸의 ㄱ자형 건물로 선각당(禪覺堂)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심검당 바로 옆에는 극락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3칸의 봉향각이 있고, 봉향각 뒤쪽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독성탱화가 봉안된 칠성각이 있다.

보물 제225호로 지정된 대리석재의 다층석탑(多層石塔)②,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③,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물 제228호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④, 비천(飛天)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보물 제231호의 석등(石燈)⑤,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물 제229호의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⑥,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보물 제230호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⑦가 있다.

이 밖에도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이 있고,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팔각원당형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원구형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가 있다.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고, 부도 2기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 부도 중 둥근 탑신을 가진 부도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 탑신은 고려시대의 부도형식에서 퇴화된 여말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전할 때 사리함이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또한 구룡루는 1689년(숙종 15)과 1749년(영조 25), 1860년(철종 11)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다.

*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목은집(牧隱集)』
『朝鮮金石總覽』(朝鮮總督府, 1919)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한국의 사찰 16-신륵사(神勒寺)-』(한국불교연구원, 일지사, 1978)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전통사찰총서 3-경기도 Ⅰ-』(사찰문화연구원, 1993)


1.신륵사 조사당

종 목 보물 제18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신륵사
시 대 조선시대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시대에 지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나옹을, 그 좌우에는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조사당은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보이며 신륵사 건물중 가장 오래되었다. 낮은 기단 위에 앞면 1칸·옆면 2칸,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 양식이라 한다. 앞면은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고, 옆면은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조선 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

2.신륵사 다층석탑

종 목 보물 제22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신륵사
시 대 조선시대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흰색 대리석이 특징적이다. 2단의 기단 위로 여러 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다르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했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3.신륵사 다층전탑

종 목 보물 제22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신륵사
시 대 고려시대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4.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종 목 보물 제22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신륵사
시 대 고려시대

신륵사 뒷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준다.

5.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

종 목 보물 제22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신륵사
시 대 고려시대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6.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

종 목 보물 제23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신륵사
시 대 고려시대

보제존자 석종 앞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고려 우왕 5년(1379) 보제존자 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7.신륵사 대장각기비

종 목 보물 제23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신륵사
시 대 고려시대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신륵사 극락보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지 정 일 1985.06.28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시 대 조선시대

신륵사는 창사연대는 확실치 않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나옹화상이 오면서 크게 번창하였고, 성종 3년(1472)부터는 대규모로 확장시켰다. 성종 4년에는 절의 이름을 ‘보은사’라 하였다.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경내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숙종 4년(1678)에 지어진 후 정조 21년(1797)에 수리되기 시작해서 정조 24년에 완공되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다. 내부에는 불단 위에 나무로 만든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위에 화려한 닫집이 꾸며져 있다. 또한 영조 49년(1773)에 제작한 범종과 후불탱화가 있다.

극락보전의 정문 위에는 나옹이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오는 ‘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입체감 있게 쓰여져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조선 후기에 대대적으로 수리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조선 중기의 수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신륵사 팔각원당형 석조부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지 정 일 2004.11.27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시 대 조선시대

경내의 서쪽 언덕에 2기의 부도가 있다. 본래는 조사당 뒤 북쪽 구릉 너머에 있었다고 하는데, 1966년 11월 17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이 중 주목되는 것은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지닌 석조부도이다.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평면 팔각의 기단부·탑신부·상륜부를 차례로 중첩하였다. 이 부도에서는 이전 시 사리합이 수습되어 동국대에서 보관하고 있다. 사리합은 부도의 하부와 상대석의 중간에서 수습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형상은 알 수 없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1392년을 전후 십 수 년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10.신륵사 삼층석탑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지 정 일 2004.11.27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번지
시 대 고려시대

다층전탑 인근의 강변 암반에 건립되어 있는 단층기단을 구비한 평면방형의 3층 석탑이다. 1층탑신은 2층에 비해 3배 정도 높게 조성되었다. 현재 3층 탑신석은 결실되었고 옥개석은 3층 모두 잔존하지만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다.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

이 석탑은 「신륵사동대탑수리비」에 언급되어 있는데 이를 다시 적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보제는 본사에서 입적하시었고, 다비식도 이 언덕에서 거행하였으니 이 사리가 다른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마멸) 상고해 보면 거기에 이르기를 사리를 얻은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했으니, 각신의 무리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를 봉안하였을 것이며 다시 그 나머지를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워 간직하고 석종을 만들어 보관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이 기록을 볼 때 나옹스님을 다비한 장소가 바로 전탑과 석탑이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수습된 사리로 부도를 조성하고,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웠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석탑은 전통적인 가람배치법에 의해 건립된 것이 아니라 나옹의 자취를 기념하고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화장지에 세워진 일종의 기념탑이라 하겠다.

11.신륵사 원구형 석조부도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
지 정 일 2004.11.27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시 대 조선시대

서편 언덕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두 기의 석조부도 중 원구형 부도이다. 이 원구형 탑신의 부도는 간략하고 폭이 좁은 기단, 도식적인 연화문 등 조선후기 것으로 추정된다.


[※ 문화재 관리에서 혼용되는 명칭 :
탑(塔)=부도=부도탑=승탑=사리탑=묘탑, 비(碑)=부도비=탑비=비탑]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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