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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조선 11대 왕 중종의 제3계비 문정왕후 의 태릉(文定王后 泰陵)과 그의 아들 명종,인순왕후 의 강릉(明宗 仁順王后 康陵) - 태강릉(泰康陵)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7/04/22 23:31:30)

[탐방] 조선 11대 왕 중종의 제3계비 문정왕후 의 태릉(文定王后 泰陵)과 그의 아들 명종,인순왕후 의 강릉(明宗 仁順王后 康陵) - 태능(泰陵), 강능(康陵), 태강능(泰康陵)
-SPn 서울포스트, (마이 네임 이스) 량기룡 기자

▲ 봄색깔 완연한 불암산 자락 태릉,강릉을 찾아. 멀리 아단산(阿旦山 : 아침 해가 뜨는 언덕)이라고 불렸던 아차산,용마산이 늘어져 있다. 왕비 릉인 태릉 은 규모에서 왕릉을 능가할 정도로 크다. 왕릉에만 있는 봉분 병풍석도 갖췄고 문인석,무인석도 왕릉 중 가장 커 보인다. ⓒ20170422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태릉,강릉 지리도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1. 우선 문정왕후 를 살피기 전 당대 전후 몇몇 사료를 흝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조선왕조는 왕의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 묘호(廟號)는 '종(宗)', 다른 연유에 의하면 '조(祖)'를 쓰는 경향이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조선은 이성계가 1392년 고려 왕씨 왕조를 무너뜨리고 건국되었으나 이성계도 고려국왕이었고, 3대 태종 이방원 때 와서야 명나라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를 받게 된다. 태조 이성계부터 본명이 있어도  '외'자 이름을 별도로 써, 이성계는 이단().. 세종 이도(李祹).. 연산군 이융(李㦕).. 영조 이금(李昑).. 고종은 이재황-이희(李熙), 순종은 이척(李坧) 식이다.

조선 3대 태종(太宗)의 삼남 세종(世宗)의 둘째 아들인 세조(世祖, 수양대군 首陽大君)가 문종(文宗, 세종의 적장자)의 아들 단종(端宗, 세종의 손자, 세조의 조카)을 폐위하고 왕에 되면서 예종(睿宗, 세조의 둘째)을 두었으나 재위 14개월만에 죽는다.

이에 세조 의 장남 의경세자 이장(李暲)과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난 성종(成宗)은 형인 월산대군 을 제치고 13세에 왕위에 올라 세조 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섭정 -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받게 된다. 성종 은 왕비와 후궁을 포함해 12명의 부인과 28명의 자녀(16남 12녀)를 두었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은 성종의 세번째 부인 폐비 윤씨 사이에서 적장자(맏아들)로 왕위에 오르지만, 이후 태어난 성종의 둘째부인 정현왕후 아들인 진성대군의 중종반정으로 폐위된다. 폐비 윤씨와 연산군은 '금삼의 피'라는 소설로도 다뤄졌으나, 주색을 워낙 밝혀 봄을 방탕하게 보냈다는 탕춘대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원각사를 유흥터로 만들고, 큰어머니(월산대군의 박씨부인)를 겁탈하는 등 패륜적 행위와 폭정,사화에 나라 꼴은 말이 아니었다. 11대 왕위에 오른 중종(中宗)은 왕비, 후궁 합쳐 역시 열두명의 부인과 20명의 자녀(9남 11녀)를 두었다(고 한다). (조선 3대 태종도 부인이 12명, 자식이 33명-14남 19녀라고 함.)

중종(中宗)의 첫째부인 단경왕후 신씨(양주 온릉 溫陵)는 후사가 없고 반정 후 바로 쫒겨났으며, 제2계비 장경왕후 윤씨(고양 서삼릉 내 희릉 禧陵) 사이에서 조선 12대 인종(仁宗)이, 제3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사이에서 13대 명종(明宗)이 태어나며, 후궁 창빈 안씨 사이에서 14대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이 태어난다. 장경왕후의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이 일화로 전해지며, 중종 사후 장경왕후 옆에 묻혔으나, 문정왕후 가 현 강남의 정릉(靖陵)으로 이장하고 자신도 거기 묻힐려고 했으나 한강변 지반이 습해 정작 본인만 현 공릉동 태릉 으로 정해졌고, 아들 명종 이 인순왕후(仁順王后)와 함께 그 옆 강릉 에 있다. 육군사관학교와 태릉선수촌이 있는 곳, 태릉(泰陵)과 강릉(康陵)을 합쳐 '태강릉(泰康陵)'이라고 편히 부르지만 사실은 각기 따로 불러야 한 이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 강남 선릉 에 있는 삼릉공원 안에는 성종 과 두번째 계비 정현왕후 의 능인 선릉(宣陵)과, 세번째 계비 문정왕후 아들 중종 의 정릉(靖陵)이 있다. 이 둘을 합쳐 역시 편의상 선정릉(宣靖陵)이라고 하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고해도 쌍릉, 삼연릉(삼쌍릉)이 아니라면 각각 따로 이름해야 한다.]

[※ 동작동 국립현충원 내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昌嬪 安氏)'의 묘

자손에게 최고의 음택, 창빈 안씨 묘소

동작동 현충원 내 이승만 대통령 묘역에서 가까운 남쪽에 창빈 안씨 묘가 있다. 국립묘지가 이 장소에 들어서게 된 근거가 되었던 묘지이다. 중종의 후궁이었다가 손자인 선조가 왕이 됨에따라 창빈으로 추존되었다. 선조를 시작으로 약 360년간 후사가 모두 창빈 안씨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이는 억측일 뿐이다(이런 추론이라면 조선 태조 이성계의 신의왕후 한씨 후사라고 해야 맞다).

묘소 진입로의 입구에 세워진 창빈 안씨 신도비는 일반 신도비와 달리 4면이 모두 같은 폭을 가져 입체적이다. 비신 화강암 총길이 312cm, 폭 63.5cm. 비문의 국역 내용은 ' ...어진 임금이 이어 나와 복을 내리니...' 숙종이 130년이 지나도록 창빈의 묘소에 비석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숙종 9년인 1683년에 이 비석을 건립했다고 한다.

창빈은 경기도 안산에서 연산군 5년인 1488년에 태어나, 9세가 되던 1507년에 궁녀로 대궐에 들어 와서, 성종의 계비인, 정현대비의 각별한 후의로 1568년(중종 13년), 왕 중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창빈의 성품이 어질고 심지가 깊었다고 한다. 22세때 상궁, 31세때 숙원, 42세에 숙용까지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는데, 첫 아들은 영양군,둘째 아들은 덕흥대원군(선조의 아버지), 그리고 정신옹주다.

1544년 중종이 사망하자, 전례에 따라 인수궁으로 물러나 거처하기를 청하였으나 문정왕후(1501-1565)의 특명으로 궁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고 한다. 명종4년인, 1549년 10월 13일, 우연히 친정에 나갔다가 51세의 나이로 급서하였다.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 장흥리에 예장을 했으나,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다음해 과천의 동작리인 이 자리에 유택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인조, 그리고 명종의 후사가 없어 창빈의 차남인 덕흥대원군의 3째 아들인 하성군이 왕통을 잇게 되었으니 그분이 바로 선조다. 선조가 왕이 되어 11년 되던 해, 할머니를 창빈으로 추봉했다고 한다. (참고:http://gsm.nricp.go.kr 동작구 향토자원조사 사업 등에서)]



2. 강남 한복판 삼릉공원 선정릉에는 조선10대 왕 연산군 의 아버지인 조선9대 왕 성종 과 두번째 계비 정현왕후 의 능인 선릉(宣陵)과, 세번째 계비 문정왕후 아들이자 연산군 의 이복동생인 조선11대 중종 의 정릉(靖陵)이 있다. 문정왕후는 처음 중종의 옆에 안장되길 원했지만 터가 습하다는 이유로 풍수가의 태산(泰山)설에 따라 다른 장소를 택해야 했다. 이곳이 불암산 아래 태릉(泰陵)이다.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 윤씨: 본관 파평(坡平). 윤지임(尹之任)의 딸, 명종의 어머니. 1517년(중종 1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45년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母后)로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중종 사후 수렴청정하면서 아들 명종에 매질을 하는 등 표독스런 왕비로 알려져 있다. 인종의 생모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고 7일만에 죽자, 그를 문정왕후가 키우게 되었다. 효심이 지극한 (세자 때) 인종을 학대하였고, 왕 재위 9개월만에 죽은 것도 고약한 문정왕후의 독살설도 끊이지 않았다.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 충실한 나머지 국정혼란과 나라 위기까지 초래한 여자는 문정왕후에 이어, 민비, 박근혜가 그 계보를 이을 것 같다.

문정왕후는 이전까지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장려한 조선 유교정책에 반하여 노골적으로 불교중흥을 꾀하였으며, (강남) 봉은사 주지를 보우 에 맡기고 고양에 있던 중종의 묘를 현 선정릉으로 이장해 봉은사를 원찰로 삼았다. 승려 보우 에게 궁출입을 허하고 병조판서직에 올리는 등 그를 지나치게 총애한 나머지, 유생들 사이에선 40대 과부와 젊은 승려 간 불순한 관계도 도마 위에 올랐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도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라는 상소문을 올리며 유림의 릴레이 시위는 날로 거셌다.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도 문정왕후 때 나왔다나?

 

[※ 법명 '보우' 스님은, 조선 중종과 명종 대를 거친 허응 보우(虛應 普雨)는 1509(중종 4)∼1565(명종 20)와 한국불교 종조였던 원증국사 태고 보우(圓證國師 太古 普愚 - 고려말 1301(충렬왕 27)∼1382(우왕 8) 승려, 현 태고종의 종조, 북한산 태고사 부도탑과 비문에 기록이 남아 있다. 해방후 조계종이 불교계를 장악하면서 조계종이 종조로 도의국사(道義國師, 생몰연대 알 수 없음)를 삼고 보우를 중흥조로 삼았다.] 


그러나 양주 회암사를 불교중흥지로 중창불사를 완료하고 전국승려대회를 열 때 쯤, 왕후에게 갑작스런 죽음이 닥친다. 회암사는 불타고 보우 는 제주도 귀양길에 살해당하고, 나옹화상 도 왕명에 영남 모 사찰로 가다가 여주 신륵사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는다. 역시 독살설에 무게가 있다. 문정왕후 죽음 2년 후 명종도 시름시름 앓다가 후사없이 죽자,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손자가 그 뒤를 이어 조선 14대 왕 선조 가 된다.


문정왕후 시대가 드라마 로 된 것은, 2001년 윤원형과 정난정을 소재로 했던 '여인천하', 작년 옥중화(獄中花, 옥에서 태어난 소녀 옥녀와 조선상단 윤태원의 스토리) 등이 있는데, 상업적 흥미를 위주로 한 사극은 자칫 역사마저 왜곡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태릉 을 들른 것은 멸 써 몇 해 전. 우리동네 용마산에서 북쪽 불암산자락에 육군사관학교와 태릉선수촌이 함께 내려다 보인다. 신림(神林)이라고 일컫는 소나무 숲이 일품. 무엇보다 왕비 단독 릉에는 없는 능침병풍석이 특징이며, 문인석,무인석 이 3m 정도로 매우 크고 석물들도 웅장해, 당대 위세를 잘 말해주고 있다. 왕비 단릉으로는 왕릉을 넘는 규모다.

태릉에서 불암산 자락을 따라 강릉 가는 길은 산책로로 잘 조성돼 있다. 이 길을 따라 사후나마 모자의 애틋(?)한 정이 오갈 것 같다. 분홍색 산철쭉이 화사한 길, 연두빛 봄색깔이 익어가는 오솔길에서 불암산 정상이 훤히 보인다. 세조 때 천보산이라는 기록이 있은데, 불암산으로 된 것도 문정왕후의 불심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태릉 석물 하나하나가 불암산 웅장한 바위돌로 만들었을 것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릉 은 잔디보수 중이다. 어찌보면 지명 때문에 태릉에 부속된 것처럼 탐방객들이 등안시한 면이 있지만, 엄연히 왕비 릉과 격이 다른 왕릉인 것이다.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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