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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익산 미륵사지 와 왕궁리 오층석탑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3/08/26 00:22:34)

[자료] 동양 최대의 절터 익산 미륵사지(益山 彌勒寺址)와 왕궁리 오층석탑(王宮里 五層石塔)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익산 미륵사지. 복원중인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석탑(미륵사지구층석탑,미륵사지9층석탑)에서 2009년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자료

며칠전 생업으로 익산에 급하게 다녀왔다. 동료는 아무 생각없이 비지니스 에만 신경썼지만, 금마면을 오가는 길에서 미륵사지 표지판과 왕궁리 가 눈에 들어왔다.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는 대표적 폐사지로 역사책에도 자주 등장했던 터, 또 최근 고달사지를 탐방했던 관계로 꼭 방문하고 싶은 절터다.

사찰은 한국인에게 피와 살붙이같기에 종교적 관점을 떠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우리의 정신과 문화와 뿌리가 바로 그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중창하여 화려한 면모를 자랑하는 절보다 역사의 아픔을 안고 빈 터만 남아있는 곳이 더 끌림은 시대의 굴곡에 커다랗게 자리했을거라는, 실제 자리했기에 풍파를 견디지 못했을 거라는 안타까움의 발로다.

(미륵사지 는 양주 회암사 나 여주 고달사 와 마찬가지로 외세에 의한 폐사라기보다 내분으로 운을 다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표면적인 역사에서 조선은 '억불숭유'정책을 폈다지만 상당 수의 왕과 왕실은 불교에 의지했다. 중국에서 건너온 주자학-성리학-유학은 선비들의 전유물로, 곳곳에서 백성위에 군림할 주도권을 놓고 왕실과 충돌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회암사는 유림 손에 의해 불태워졌다.)

미륵사지를 검색하다가 귀중한 자료를 발견해 서울포스트에 옮긴다. 문화재 복원과정과 출토된 보물들이 생생하여 학습자료로도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복원한답시고, 어제 캐낸 돌에 최첨단 장비로 반질반질하게 깍아 세운 탑이 어색하다. 원래대로, 원래와 비슷하게 하는 일은 재건축(리빌딩)이나 리모델링 하는 것과 다르다. 이는 문화와 역사를 보는 관련자들의 인식과 관점이 문제투성이로 지적되어야 하며, 다른 문화재 관리,복원을 보더라도 한국인의 상식범주에 문제가 많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복원했다는 미륵사지 탑은 매우 성의없어 보이며 층간기단석도 원형과 전혀 다른 엉터리 수준으로, 이는 한복에 바바리코트 를 입힌 꼴이다.)

글쓴이께 양해를 구할 방법이 없기에 이 지면을 통해 감사드린다. 자료 주인은 조윤수 라는 분으로 여류수필가(아래 기사)이시며 국립전주박물관 자원봉사자 동호회원이시다. (龍)

-자료검색을 통해;

※ 미륵산(彌勒山) : 전북 익산시 금마면·삼기면·낭산면을 공유하며 정상 우제봉은 해발 430m. 원래 이름은 용화산이었으나, 미륵사가 지어진 후부터 미륵산이라고 부른다. 또한 봉우리가 사자의 형상처럼 생겼다고 해서 사자봉이라고도 한다. 마한의 도읍지로 추정되며 이곳에 미륵산성(전북기념물 제12호)이 축성되어 있고 성곽의 둘레가 1,822m이다.

기름 한 말을 끓일 수 있을 정도의 큰 홈이 패인 등잔암 외에 4m의 높이에 구멍이 나 있는 투구바위, 안질에 좋다는 약수터, 사자암, 심곡사, 왕궁탑 등 명소와 볼거리가 많다.

주변에는 익산 미륵사지(사적 제150호, 미륵사지 9층석탑은 국보 제11호) 외에도 익산쌍릉(사적 제87호),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보물 제45호), 익산 왕궁리 유적지(사적 제408호, 왕궁리 오층석탑은 보물 제44호에서 1997년 국보 제289호 재지정), 가람 이병기 생가 등 중요한 문화유적이 많고, 금마면에서 가까운 유명한 왕궁온천이 있다. 쌍릉은 마한(馬韓)의 무강왕(武康王)과 그 왕비의 능이라고도 하며, 백제 무왕(武王)과 선화비(善花妃)의 능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도굴된 기사가 있다.

※ 미륵사(彌勒寺) :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미륵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루는 백제 무왕이 부인(선화공주)과 함께 사자사로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까지 왔는데, 미륵불 셋이 못 속에서 나타나 왕이 수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렸다. 이에 부인이 왕에게 “여기다가 꼭 큰 절을 짓도록 하소서. 저의 진정 소원이외다” 하였다. 왕이 이를 승낙하고 지명법사를 찾아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법사가 귀신의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미륵불상 셋을 모실 전각과 탑, 행랑채를 각각 세 곳에 짓고 미륵사라는 현판을 붙였다고 한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의 창건 설화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것이다. 무왕은 바로 이 지역을 새로운 도읍지로 하여 백제 중흥의 원대한 포부를 펼치려고 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 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로 발휘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백제의 전 국력을 집중하여 창건하였기 때문에 백제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미륵사는 어느 때 폐찰이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조선 정조 때 무장 지역의 선비였던 강후진이 지은 『와유록(臥遊錄)』에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백여 년 전에 부서졌더라” 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대다수의 절들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불타버린 것과 달리 다른 원인으로 폐사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미륵사 발굴이 시작되기 전까지 절터에는 논밭과 민가가 들어서 있었고 절의 석축들은 대부분 민가의 담장이나 주춧돌로 사용되고 있었다. 발굴 결과 일연이 기록한 대로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서로 두 개의 탑이 있었고 각 탑의 북쪽에 금당이 하나씩 있었으며 각기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이는 탑, 금당, 강당, 승방을 일직선상으로 하나씩 배치하는 일반적인 백제계 탑과는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탑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 주로 목탑이 건립되었다. 그러던 중에 익산 지역의 질 좋은 화강암을 가지고 미륵사 탑을 만들게 되는데, 이 탑을 만들면서 목조 건축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석탑 발생의 시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륵사 탑은 신라시대에 경주 감은사 탑으로 이어지고, 다시 석가탑을 통하여 완벽하게 완성된다.

동서로 172미터, 남북으로 148미터에 이르는 미륵사 터는 넓이가 2만 5천 평에 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이며, 국보 제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 9층석탑인 서석탑과 1993년에 복원된 동석탑이 있다. 그리고 당간지주가 있는데 다른 절과 달리 2기다.

(* 미륵사 대략적인 넓이에 대해서는 위 아래 자료가 달라 혼선이 있는 중 → 문화재청에 문의결과, 1천3백여 만 제곱미터(400만평 정도)는 미륵사지를 포함한 문화재지정구역 전체를 표시한 것이라고 함)

※ 미륵사지 (彌勒寺址) :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번지. 1966년 6월 22일 사적 제150호로 지정. 면적은 1338만 4699㎡으로, 마한(馬韓)의 옛 도읍지로 추정. 금마면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있으며 추정 규모(약 2만 5천평)로는 한국 최대의 사찰지이다. 601년(백제 무왕 2)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武王)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국보 제11호인 동양 최대의 미륵사지 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 8월 원광대학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東塔址)도 발견되었다. 건물지(建物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되어 있다.

한편, 미륵사지석탑은 2001년 10월부터 해체·보수작업에 들어가 2009년 해체완료한 후 2014년 복구정비를 완료할 계획에 있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9년 1월 14일, 이탑의 탑신 1층 심주(중앙기둥)를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미륵사 창건년대와 창건주를 기록한 사리봉안 기록판과 금제 사리 항아리 등 유물 500여 점을 발굴했다. 이를 통해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인 서기 639년에 백제인 왕후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금판 앞뒷면에 194자로 된 사리 봉안 기록판에는 시주자의 신분이 무왕의 왕후로, 좌평(백제의 최고 관직)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다. 이는 백제 서동 왕자(무왕)가 향가 ‘서동요’를 신라에 퍼뜨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와 결혼했으며, 그 뒤 선화 공주가 미륵사를 건립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다른 것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 왕궁리 유적지 : 왕궁면과 금마면에 걸쳐있는 이 유적지은 사적 제408호로 지정돼 있다. 왕궁리성지 라고도 부르며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이 지역 안에 있는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과 절터의 배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유물, 바깥쪽을 둘러싸고 있는 직사각형의 성이 발견되어, 백제 후기의 익산 천도설이나 별도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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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치도록 내 발길을 붙드는 백제탑이여....
그대는 어쩌자고 남의 나라에 짓밟혀 그 젊은 나이로 요절했느뇨...."
CHO YOON SU


교통이 발달된 2008년 여름, 나는 옛 신라 땅, 경주 근처 후포리 광도사에 가기 위하여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가을에 오라고 하신 스님 말씀을 실행하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아직도 전주에서 경주까지 직행버스도 직행 열차도 없다.
지금도 부산에 한 번 가기가 그리 쉽지 않다. 신라 땅에서 태어나서 어찌하여 이 백제 땅에 와서 살게 되었는고! 고속 버스가 부산까지 바로 가는 것이 있긴 하지만 기차를 타려면 대전까지 가서 갈아타야 한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방학 때마다 부산엘 가려면 그렇게 밤을 기차에서 새워야 했다. 근데 그 옛날 백제의 땅 익산에서 경주까지 어떻게 그런 러브스토리가 있을 수 있었는지. 어찌 익산에서 경주까지 서동이 마를 캐어 팔러 갔을꼬. 그런 노래까지 지어서 말이다. 실지로 군사정권 때 이런 사람들이 많이 죽고 감옥살이 하지 않았나? 그 시대이기 망녕이지!

善化公主主隱(선화공주주은)
他密只嫁良置古(타밀지가량치고)
薯童房乙(서동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야의묘을포견거여)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맛동(서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1982년 무렵, 헌다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우리 차스님과 차를 배우는 회원들이 가끔 미륵사지와 이웃 왕궁리 오층석탑에 왔었다. 그 때는 한 쪽이 무너져 조각난 탑돌들이 주위에 즐비하게 누운 채 안타깝게 제 짝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부서져 깨어진 부처의 몸들이었다.
우리는 차를 우려 차반에 받쳐 들고 탑을 돌곤 했다. 폐사지 허전한 들판에 한 편이 떨어져 나간 몸을 지탱하며 서 있는 탑을 올려다보며 부처의 진신을 모신 듯 그저 경건한 마음이 되어 탑돌이를 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고요해졌었다.


사지 주변은 논두럭이 그대로, 시골 농촌 풍경이 그러하듯 길도 진입로도 어수선했었지만, 그것이 더욱 사라져간 미륵사와 백제의 마지막 비원을 그대로 품고 있는 것 같아 처절하게 아름다웠다.



탑의 기단부의 내부 십자형 통로 가운데 심초석이 보인다.


탑을 지키는 수인상



방향과 위치를 새긴 돌의 이름표


탑이 해체되기 전의 무너진 탑돌은 모아져 이렇게 보존하고 있다. 시멘트 부분의 짝을 맞출 때 여기서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연못 뒤의 박스 형의 건물 안에 서탑이 해체되어 있다. 1400여 년의 백제인의 삶과 한의 무게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후세인들에 의하여 복원되는 고통을 인내해야 한다. 한많은 서탑이 창고 안에 갇힌 이래 난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8년 봄에 박물관자원봉사자팀이 익산답사공부에 나섰던 것이다. 창고를 다 둘러보고 늘어 놓은 돌들을 보자 너무나 아득하였다. 저 돌들이 모두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각각의 돌은 이름, 층수, 위치, 방향 등을 치밀하게 기록한 표식을 주렁주렁 달고 자리를 찾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층부는 모두 해체되었고 1층 옥개석과 기단부분만 남아 있고 네 귀퉁이의 수인상이 울상을 짓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2009년 1월 19일 드디어 마지막 기단부의 심초석에서 사리기와 사리봉안기 등 유물이 쏟아졌다는 뉴스가 떠들석했다. 흥미로웠다. 그간 논란이 많았던 서동과 선화공주의 설화를 밝히는 단초가 증명되었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던 역사가들의 수사 결과에 반증을 주게되었다. 앞으로 전라북도는 가려진 옛 백제의 부흥을 맛볼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옛날부터 있었던 이 연못 가에 앉아 그려본다. 왕과 왕비가 사자사에 가는 도중 이 연못(?) 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 예를 올렸다. 그후 이곳에 미륵사 탑을 조성하자는 원을 가지고 639년 탑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륵사의 창건 연대는 그보다 앞 서 있을 것으로 추증되고 있다.

창고 안을 나오면서 나는 못내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헌다례를 행하러 다녔을 때의 모습이 그리웠다. 그리도 아름다웠던 폐사지의 풍경은 저런 내용을 담고 끊임없이 땅 속에 갇혀 소리 없는 소리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1991년(?) 복원된 미륵사 동탑의 전경
아래의 서탑의 옛모습과 비교하자면, 기계제품과 수제품의 차이라고나 할까?
정이 생기지 않아 한 번도 가까이 간적이 없었지만 오늘 가까이 가 보고 옛날의 영화를 그려 보는 정취에 젖어 본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의 궤적이었을까.


서쪽 당간지주와 동탑 앞의 당간지주는 90미터 간격을 두고 여전히 옛날의 위용을 느끼게 한다.


위의 심초석에서 아래의 사리봉안기와 사리기를 수습하다.


거의 기록과 흔적이 없었던 백제의 역사.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기에 기를 펴지 못했었다. 백제시대의 유적이나 유물이 발굴될 때마다 신문지상은 난리가 났었다. 부여 능산리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되었을 때, 공주 무령왕릉의 발굴 과정은 나라가 들썩거렸다. 한성백제의 유구가 그랬고, 지난 2007년 부여의 왕흥사지에서 또 하나의 사리기가 발견될 때도 그랬다. 절집에서도 대형 사진을 걸어두기도 했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된 왕궁리오층석탑의 사리기와 왕흥사지의 것과 이번의 미륵사지의 사리장엄들은 모두 같은 백제의 비원을 담고,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 바야흐로 백제의 르네상스가 살아나오고 있다.


왕후의 비원의 선근으로 대왕폐하의 수명이 산악 같고 치세가 창대하기를 바람이었지만, 석탑이 조성된 2년 후에 무왕의 생은 마감되었고, 백제에는 서서히 어둠의 장막이 내리게 될 줄이야! 하지만 비장의 원력은 1400여 년 지하에서 숨쉬었고 이제 살아나는 것인가.


이 오층석탑을 홀로 만나러 다닐 때, 나는 옛연인을 만나러 가는 묘한 설레임조차 일었다. 탑을 돌아보고 면석을 어루만져도 보고, 풀밭에 누워보기도 하며 무한한 아늑함에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하여, 때때로는 거석이 주는 위압감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왕궁터가 발굴되어 왕궁리란 이름의 물증을 제시하였다. 사방의 성벽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러나 해체 되기전의 모습이 왜 이렇게 그리운지 모르겠다. 탑이 보이는 입구에 서면 자연 의 흙길이 열려 있고 양 옆으로 100여 년 가까이 된 벚나무가 줄 서 있었으며, 왼쪽은 지금도 여전히 벚나무 숲이다. 흙길 끝에 하늘을 당당히 떠 받치고 서 있는 탑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요조숙녀 같이 단아하고 우아한 자태.
미륵사 탑은 200여 년의 전성기를 누렸던 목탑의 시대가 끝나고 영원하게 변하지 않을 석탑의 시원인 탑이기에 그 의미가 깊다. 한 번 돌탑을 조성한 백제의 석공은 나무를 주무르듯 이렇게 조각미가 아름다운 정림사지탑과 왕궁리 오층석탑을 만들었다.
"아! 미치도록 내 발길을 붙드는 아름다운 백제탑이여!"
이는 국립중앙박물과 관장을 지내셨던 소재구 박사님의 탄성이다.


찬란한 통일신라의 탑. 구례 화엄사 적멸보궁 자리의 사사자석탑과 공양상인 석등 . 아름다움의 차이가 드러난다. 장중하기 그지 없고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복합적인 문화미를 모두 갖춘 한국 석탑 미의 절정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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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중의 국보,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 (2009.1.25일 자료)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국보 중의 국보가 발견된 것"이라 했다.
전북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백제지역 연구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평가받는 유물이 발견됐다.
평소같으면 지역에 주재하는 기자들이 와서 취재를 했겠지만, 이번엔 서울에서 기자들이 직접 다 내려왔다.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 과정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한 사리장엄이 발견된 것. 유물 중 특히 사진에서 보는 금제사리호는 사리장엄의 핵심으로 사리공 중앙에 모셔져 있었다.
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 뚜껑을 덮었는데 내외함의 이중 구조다.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세공기법은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가막힌 작품이다.


그렇지만 이번 발견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것은 금제사리봉안기였다.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에 음각하고 주칠한 선명한 글씨 194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글이 적혀있다.

탑을 만든 절대년도가 밝혀진 것이다.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시주,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금석문 자료이며, 동시에 백제시대 서체 연구에도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는 유물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곳에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기록됨으로써, 백제 무왕이 신라의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배치되는 사실을 적고 있어 향후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부분은 아직 명확히 규정된 것이 아니다.
이 유물이 발견된 날이 5일전인 지난 14일이니까 아직 이 글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연구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한문으로 된 그 내용은
<백제 왕후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 >이라는 한명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백제 왕후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두명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시점에서 언론들이 이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이번 발견은 하늘이 도왔다는 표현을 써도 맞을 것이다.
미륵사지석탑은 석탑이지만, 목탑처럼 만들어진 탑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가장 초기의 석탑이기 때문에 목탑처럼 가운데 큰 기둥을 하나 세워 중심을 잡는 심주가 있고 동서남북 네곳으로 출입구가 나있다.

목탑의 경우 심주는 그냥 하나의 커다란 기둥이기 때문에 비록 석탑으로 만들었지만, 목탑양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심주에서 뭐가 나올 것이란 예상을 아무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목탑의 경우 기단 하부 땅속에 심초석이 있고, 그곳에 사리장엄장치가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관계자는 "목탑이 석탑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장치가 지상으로 올라온 것으로 추측된다"며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조심스런 의견을 제시했다.


이것이 심주(2단)이고,


사진의 가운데 부분이 심주(1단)이다.
심주(1단)에서 심주(2단)을 걷어내자 그곳에 공간(사리공)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공간이....


그리고 그 안에 이렇게 유물들이 들어 있던 것이다.

애초 문화재연구소 측은 심주를 해체할 계획이 없었지만, 심주의 바닥부분이 기울어져 있어 불안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해체수순을 밟은 것이 엄청난 발견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유물은 회를 발라 밀봉한 상태로 발견돼 1400여년이 지난 유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 복원작업이 이뤄지던 미륵사지석탑에는 해체하기 이전의 사진이 걸려있었지만,


이제는 국보 중의 국보로 대접받는 금제사리호 사진이 걸리게 됐다.
저 석탑 하나가 백제 전 역사에서 엄청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 느껴지는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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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수 수필집 ’바람의 커튼’
(기사등록 : 2008-08-04 20:01:06, 전북도민일보)

불혹이 넘어 처음 호미를 잡고 텃밭을 일구면서 땅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세상에 눈을 떴고 이후 글밭에서 사람살이를 음미하던 작가는 글 속에 그 모든 것을 담아냈다.

자신의 첫 수필집 ‘바람의 커튼(수필과 비평)’을 펴낸 조윤수(65)씨는 “인생의 황혼기에 새로운 짐을 ?어졌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수필을 공부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글쓰기도 여전히 조심스럽고 어려운데 첫 작품집을 내려니 두려운 마음이 앞서기도 합니다.” 등단 5년만에 내놓는 첫 작품집이지만 그가 담아낸 다양한 이야기들은 그의 문학적 영토가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폭넓은 지적 관심과 자연을 깊숙하게 바라보는 시선 등 오감을 통한 그의 글쓰기는 독자들과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글로 재탄생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상의 소소함이 전해주는 감동을 잘 담아내며 삶의 진정성을 보여 주고 있음이 그의 글이 주는 가장 큰 미덕이다.

경남 진주 출생으로 전주여중과 전주여고를 졸업하고 이후 서울에서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던 중 결혼과 함께 다시 전주로 왔다.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을 수료했으며 지난 2003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했다. 현재 전북문인협회, 행촌수필문학, 한국미래문학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김효정기자 cherrya3@


<바람의 커튼>의 변 - 조윤수

첫 수필집의 제목을 <바람의 커튼>으로 정하고 보니 생각할수록 내 자화상의 상징 같다. 순 우리말도 아니고 순 서양말도 아니다. '커튼'이 외래어니까 요즘 유행하는 퓨전이라고나 할까. 내 삶이 그랬다. 6.25때부터, 문화라는 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우리는 달콤한 초콜릿과 츄잉껌에 현혹 당했다.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주는 색다른 서양의 구호품에 길들여졌다. 미국말을 배우기가 가장 재미있었고 그래서 문학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영문학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하고 밥벌이를 한 적도 있다. 국어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미국 문화에 익숙해져 정신마저도 색이 덧칠해졌었다.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한글공부였고, 그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을 되찾는 일이었다. 언어 그 자체는 그 나라의 정신이요 문화의 집결이라는 것도…. 차(茶)로 인하여 중국의 문화에 더 주의가 높아졌다. 한자 또한 삼천여 년 이상 조상들이 사용했던 글자이니 우리말과 글과 뗄래 야 뗄 수 없는 것인데도 한자를 배우지 않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중국을 이해하는 것도 우리나라의 근간과 고유성을 이해하는 길이었다. 그렇듯 글쓰기는 구체적인 역사 속의 나의 정체성 찾는 것이기도 했다.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은 다른 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부끄럽게도 <바람의 커튼>은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바람의 커튼>은 그래서 더 보람 있다고 자위해야겠다. '바람'은 바람대로 그 말의 뜻이 무궁하며 '커튼'은 커튼대로 고유한 글자이나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다. 바람과 커튼은 잘 소통한 것 같다. 사람들은 '교류'의 뜻으로 '컴뮤니케이션'이란 말을 잘 쓴다. 이 또한 외래어가 아닌가? 그러나 원어가 주는 뉴앙스(이것 또한 퓨전이다)가 있으며 우리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맛이 있는 것 같다. 교류하고 있는 것을 소통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교류는 자기 바탕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소통'은 자기를 비우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람'과 '커튼'은 잘 소통하였다고 하고 싶다. 지구라는 무대에서 '바람의 커튼'이 펄럭일 때마다 지구인의 삶이 즐거운 폴카를 추듯 하게 되면 좋겠다. 나아가 지구가 하나로 튼실해짐에 따라 모든 생명은 소통의 길로 나아갈 것이며 우주와도 잘 소통하리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문자가 차 다(茶)이다. 모양도 좋고 쓰기도 좋고, 무엇보다 그 뜻과 맛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우주성으로 소통하는 일종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생각하던 차(茶)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30여 년의 차 생활을 하다보니, 이제야 그 다도(茶道)라는 것에 입문하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냥 쉽게 굴러다니는 말인 다도가 정말의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전에는 중국 고전이나 한자가 나오는 글을 만나면 한자는 제쳐놓고 해석한 말뜻만 읽었다. 그런데 차 이야기의 원문을 비교 하다보니 그 한문이 그렇게 크게 보일 수가 없다. 어쩌면 내 성씨의 기원이 중국에 있는 것 같이 차의 기원과도 무관할 수 없는 운명이어서 일까? 내가 전주 이씨 집안에 시집온 이유도 차의 기운이 미쳐서인지도 모른다. 초의선사보다 300년 앞서 다부(茶賦)를 지으신 분이 가문의 중조이신 이목(李穆)선생이기 때문이다. 한국차인연합회에서는 최초의 한국의 다성으로 그분을 받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말과 글자를 배운다고 얼마나 알겠는가. 그래도 애정을 가지고 보니 마음으로 그 시대의 사람들과도 소통하는 것 같아 즐겁다. 외국인들이 많이 들락거리는 직장에서 중국사람을 만났을 때, 중국에서는 조(趙)씨가 으뜸이라고 나를 향하여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인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뜻을 요즈음에야 알게 되었다.

당나라 이후 오대십국을 통일한 사람이 조(趙)광윤으로 북송나라를 건국했으며 북송은 조씨 나라였다. 물론 고대 국가 중에 조(趙)나라가 있기도 했다. 송나라는 성당(盛唐)의 기반 위에 대단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송의 휘종인 조길은 정치에는 무능했지만 모든 예술에 능했다고 한다. 그가 쓴 대관다론(大觀茶論)은 나도 가끔 참고하는 글이다. 고려가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차문화가 성행하였고 그로 인해 영원한 비취빛 청자를 우리에게 남기게 되었다. 물론 그 당시는 지금과 같이 잎차가 아닌 말차가 유행하였다. 찻가루를 다완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차선(찻솔)으로 거품을 내면 청자 잔에 설록이 핀다. 이를 두고 이규보의 차시(茶詩)에 설록차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수필집에 내 낙관을 붉게 찍게 되었다. 친필의 글씨가 잘 안되어서 문득 옛날의 낙관이 떠올랐다. 서예와 문인화를 그리다가 한문이 너무 어려워서 그만 두었었다. 그보다 그 어려운 공부를 계속 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 내 호를 지어주시고 전각을 멋지게 파주셨던 선생님이 생각났다. 자실(自實)이란 작은 전각과 연심불수오(蓮心不水汚). 멋진 글자를 보면서 저 젊은 때, 내가 연꽃을 보지 않고도 관념으로만 그렸을 때부터 나의 먼 미래를 두고 어찌하여 그런 전각을 만들어주셨던가. 참 절묘하기 그지없다. 내가 닮아야 할 표본을 그 때 점지해 주셨던가. 그리고 일하(一霞)라는 이름까지. 사전의 뜻으로는 멀, 혹은 노을인 것 같다. 전연 생소할 것 같은 <바람의 커튼>과도 잘 소통되어 어울리는 것 같다. 언밸런스의 밸런스라 할까.

삼십 수년을 지나고야 다시 만나는 그 글자들, 오랜 세월 숨어서 나를 지켜주었을까. 너무나 부끄럽고도 애석하기도 한 세월이었다. 어쨌든 수필집도 일종의 서화(書畵) 아닌가. 참으로 배움의 길은 멀고 험난하며 배울수록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 알뿐이다. 원래 도(道)를 하려면 할 일이 없어지고, 학문을 하려면 할 일이 많아진다 했다. 지금이야말로 많은 지식을 머리에 채우기보다 그로 인한 마음의 평안을 놓치고 싶지 않다. 서로 소통하였으면 바로바로 바람의 커튼 뒤로 돌려보내리라. (2008년 8월 1일)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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