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쉽게 상하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로 빗댄 역사속 인물,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신숙주선생 묘' 답사
-SPn 서울포스트, (마이 네임 이스) 량기룡(梁奇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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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숙주선생묘는 들어 서 본 공간 오른편에 부인과 쌍봉으로 조성돼 있고, 왼편은 자손들이다. ⓒ20220625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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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손들 묘 - 맨 위는 신숙주의 까마득한 손자(고손,현손?) 신수명묘(申秀溟) , 그 아래 십이지상석묘는 신숙주 장남 신주묘(申澍). 신수명은 명종의 모친 문정황후와 사돈간이었다고 한다. ⓒ서울포스트 |
어느 나라든 무인(군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 부강했다. 넘치는 곳간과 강한 군대의 부국강병정책이 지속되는 한 그 나라는 당당히 존재한다. 프랑스 나폴레옹 때 그랬고 영국의 처칠 때, 미국도 군 출신 장군들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 위용이 더해졌다. 고대 그리스,로마,페르시아,중국,몽골,일본 등의 최고권력자는 군인이었다. 오죽했으면 독일 비스마르크 수상은 철혈정책(鐵血政策, 무기와 피)을 바탕으로 독일 통일을 이뤘을까.
우리역사는 문인들이 망쳐 놓을 것을 무신들이 이뤄냈다. 나약한 고려를 무신정권이 항몽했고, 조선의 이성계,이방원을 끝으로 항상 외세에 휘둘리다 나라가 망했다. 대한민국 건국 후도 그런 분위기가 계속되다가 장군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이 극강의 한국을 이뤘다. 그러나 법을 내세운 노무현,문재인이라는 양아치들이 나라 근간까지 흔들어 놨고, 지들 집권기간에는 오히려 국민을 갈갈이 찢고 북측에는 우리 영토(NLL)와 돈과 기밀까지 넘긴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국민의 이름으로 도륙을 내야 할 놈들이다.
조선초 세종 때 집현전 학자 중 신숙주는 출중한 능력이 있었다지만, 단종 폐위의 세조 때 생육신,사육신과는 반대로 출세가도를 달려, 변절자 낙인이 찍혔다. 권력에 기생했다는 그 이름을 '쉽게 상한다'는 녹두나물이 '숙주'나물로 전해진 계기가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소사 잔치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해독음식 녹두나물을 먹을 때마다 야비한 그 자 생각이 들기에 음식양생에 좋은 것도 아니고, 민중의 통렬한 비판이나 미풍양속도 아닌, 그 홍보 내력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에서 신숙주는 한명회와 더불어 악역을 담당한 자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들이 아니라도 어떤 짓을 누군가가 또 했을 것이고, 한말 이완용도 누군가의 대역일 뿐이라는 게 엄연한 역사다. 특히 내무대신이었던 이완용은 민족자강을 외친 독립협회(1896년 친미,친일,반러 성향으로 서재필 창립, 이상재,윤치호,손병희,남궁억,청년 이승만 등이 활동, 친러파인 이완용은 제명)에서 한동안 활동하다가, 나라가 기울자 한심한 조선을 갈아 엎어야 할 대상으로 봤거나, 출세욕인지 몰라도 친일로 돌아 한일합방을 주도했다.
아, 우리가 이제껏 알던 사육신(死六臣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하위지,유성원)은 1977년 김문기가 더해져 사칠신이 돼 있는데, 이건 아니올시다. 조선 내내 6명인 이유를 충분히 검증했을텐데, 500년 후 추가 되었다는 것은 방귀 깨나 뀐 놈들의 역사조작,농간이 확실할 것이다. [생육신 生六臣 :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전에도 별내,청학리를 거친 의정부 길에서 신숙주묘지 표지판을 봤지만, 딱히 탐방할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이번엔 그 앞이 생업 현장이라 점심때 들렀다. 장마전선 중 뿌연 대기에 멀리 수락산은 희미하다. 그 산 동편에 신씨 가족묘 형대는 넓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묘지를 볼 때마다 여성의 젖가슴 형태에 묘한 생각이 든다. 아마 풍수지리상 명당은 좌청룡 우백호 어쩌고 저째서, 여성의 성기 모양의 지형이 최고 길지라는 우리의 관념에서 비롯되었을지 싶고, 사후 일체가 '돌아간다'는 (모성으로의) 원점회귀 또는 샤머니즘적 신앙의 발로이지 않을까. 서양은 평지에 매장, 중국,일본도 봉분형태는 많지 않으니, 우리 장묘문화는 세계적으로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龍)
↓ 자손들 묘 - 맨 위는 신숙주의 까마득한 손자(고손,현손?) 신수명묘(申秀溟) , 아래는 신숙주 장남 신주묘(申澍), 맨 앞은 모르겠음. 신수명은 명종의 모친 문정황후와 사돈간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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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숙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숙주(申叔舟, 1417년 8월 2일(음력 6월 20일) ~ 1475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문신·정치가이며 언어학자, 외교관이다. 출생지은 전남 나주(羅州), 본관은 경북 고령(高靈), 자(字)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이다.[1]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신장(申檣)의 아들이자 윤회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1438년(세종 20년)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문과 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하여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적극 지지하였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 번 출정하였으며 1461년부터 1464년, 1471년부터 1475년까지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다.
사육신과 함께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이후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로 즉위)의 편에 가담하였다. 결국 계유정난으로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다.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남이의 옥사 때 남이의 처형에도 적극 참여하여, 사후 사림파 도학자들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이후 그의 한글 창제에 대한 공적 재조명 여론이 나타났으며, 1980년대 이후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고, 《국조오례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동국정운》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농업과 축산업 기술에 대한 서적인 《농산축목서》를 편저하였다. 생전에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번 공신에 책록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김시습, 그 밖에 한명회, 권람 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윤회, 정인지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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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선생묘 申叔舟先生墓 (자료 검색)
-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조선전기 문신 신숙주의 무덤. 시도기념물.
시대, 조선
문화재 ,경기도 기념물 제88호
건립시기, 조선전기
성격, 무덤
유형, 유적
면적, 1기(1633㎡)
소재지,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로 163번길 34-43(고산동 산53-7번지)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개설
신숙주와 정경부인 무송윤씨(茂松尹氏)와의 쌍분묘로,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高山洞) 구성 마을 뒷편에 위치한 부용산 아래에 있다. 묘역 왼쪽 언덕에 두 기의 묘소가 있는데 위에는 손자의 묘소가 있고, 아래에는 아들 신주(申澍, 1435~1456)의 묘가 위치해 있다. 1985년 9월 20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되었고, 고령신씨 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내용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명나라의 언어학자인 한림학사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기 위해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는 등 공적이 많았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뒤에는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수년간 겸임하였다.
묘소는 쌍분이여, 묘역의 규모는 1633㎡이다. 중앙에 묘비가 있고 각 봉분 앞에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 장명등(長明燈)이 각기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그 앞에 좌우로 문인석이 하나씩 세워져 있으며 장대석(長臺石)으로 계절(階節 : 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땅)을 쌓고 밑에 다시 무인석을 배치하였다.
묘비는 후대에 세워진 것으로, 뒷면에 ‘숭정기원후 이백칠십년(崇禎紀元後二百七十年)’이라는 명문(銘文)으로 보아 1897년(고종 34)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묘소 아래쪽으로 20여 미터 지점에 대리석으로 된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규모는 총 높이 240㎝, 너비 60㎝, 두께 56㎝이다. 1477년(성종 8)에 세워진 것으로, 아들인 이조 참판 고천군(高川君) 신정(申瀞)이 건립하였고, 비문은 이승소(李承召)가 지었으며, 글씨는 정난종(鄭蘭宗)이 썼다.
또한 묘역의 하단 좌측에는 1971년 새로 중건된 신도비가 있으며, 그 오른쪽에는 1971년 한글학회에서 한글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한글 창제 사적비가 있다. 이는 한글학회 이사장 허웅이 짓고 문교부 장학관이자 18대손인 신집호가 쓴 것이다.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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