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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수락산 서쪽 박태보의 노강서원(鷺江書院)과 추석 슈퍼문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5/09/26 23:45:57)

[탐방] 수락산 서쪽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의 아들, 박태보(朴泰輔)의 로강서원(鷺江書院)과 추석 슈퍼문(Super Moon)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수락산 서쪽 박세당 고택(사랑채)과 그의 아들 박태보를 배향한 노강서원 탐방 ⓒ20150926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수락산을 몇 번 들락거리니 보이고 듣는 것도 많아지고 볼 때마다 보이는 것도 달라졌다. 우선 수락산 주봉(정상)을 처음엔 물방울 형태로 보아 '수락(水落)'으로 생각했지만, 봄에 오르며 향로봉이란 봉우리(지명)가 있는 유래를 더듬어 봤다. 정상 동쪽 한참아래 향로봉이란 곳은 불처럼 타오르는 향로(香爐)와 전혀 무관한 형태고, 오히려 정상의 바위숲이 향로로 보였다. 따라서 수락산 정상을 향로봉(香爐峰)으로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위 사진) 서쪽에서 본 수락산은 박쥐가 서울쪽으로 나는 모습이고, 박쥐머리가 정상으로 불타는 향로같다. 수락산은 동쪽 등 대부분의 방위각에서 박쥐가 날으는 모양.

↑ 동쪽 백봉산자락에서 본 수락산. 수락산은 대부분의 방위각에서 박쥐가 날으는 모양이다. ⓒ2015년 6월 서울포스트자료
↑ 불타는 향로를 연상케하는 수락산 정상부 ⓒ자료사진

↑ 삼각산,도봉산,수락산,검암산(불암산),아차산,퇴계원,망우리 등과 건원릉,태릉,의릉,정릉 이 표시돼 있다. 현 중랑천(中浪川)은 본시'속계', 중량포(中梁浦)로 중량천(中梁川), 중량구(中梁區)로 하는 게 맞다. 옛 위치는 현 중랑교 쯤인 것 같다. ⓒ대동여지도 자료
↑ 동쪽 남양주(별내신도시)에서 본 불암산 주봉은 붓끝이나 칼끝같다. ⓒ2013 서울포스트자료

마찬가지로 불암산도 정상을 주봉 이라고 하지만 엄연히 삿갓봉, 필암봉(筆岩峰)이라는 자료가 있다. 또 동구릉 뒤 구릉산이 검암산이었다고 하나, 불암산을 검암산(劍岩山)으로 표기한 조선후기 지도가 있다. 실제로 동쪽에서 보면 불암산 정상은 붓끝이나 칼끝처럼 뾰족하다. 그리고 아무 의미없는 중랑구(中浪)는 중량천의 중량(中梁)이 본래 - 1911년 일제에 의해 발행된 경성부지도에서 중량교(中梁橋)를 중랑교(中浪橋)로 잘못 표기 - 이므로, 이 역시 바로 잡아야 한다.

또 용마산(아차산)에 '고구려정'이나 최근 지은 수락산 서쪽 '매월정'은 무식한 후손들의 편의성 때문에 맘대로 지어지고 이름 붙여졌다. 정자는 풍류와 관계된 곳으로, 지리상 집 근처나 개천에 근접해 있는 게 상식이다. 산 꼭대기나 중턱에 정자를 지어 술,물,음식 등을 들고 갈 미친 머슴도 기생도 양반도 없었을 것이다. 계곡 근처 낮은 곳엔 정(亭), 산 능선 높은 곳은 대(臺)라고 하는 게 맞다.

우리나라에 노강서원 은 몇 군데 된다. 의정부 장암동 수락산 서쪽 박태보 의 로강서원(鷺江書院), 충남 논산 윤황 의 로강서원(魯岡書院), 경북 고령 송시열 의 로강서원(老江書院) 등이다. 오늘 수락산 속 박태보의 노강서원은 그가 진도로 유배 가던 중 죽은 로량진(노량진 鷺梁津)에 지어져, 노량진 지명 하야로비 '로(鷺)'와 한강의 '강'에서 유래했으나, 6.25때 소실, 1968년 수락산 서쪽 박씨 종중 산야에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을 모신 청절사(淸節祠)를 고쳐 복원했다고 한다. 박태보의 아버지 박세당이 존경한 김시습 사당에 들어 섰다고 하니 복잡한 생각이 잠시 겹친다.

사실 정재 박태보(定齋 朴泰輔)와 로강서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고, 역사에서 그의 아버지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이 더 알려져 있다. 박세당은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과 같은 서인이었으나, 남인탄압 강온으로 소론으로 갈렸다.

먼저, 려말선초부터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은 있었고, 조선의 개국공신이나 세조즉위 공신 중심의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성종 때 사림파를 중앙정계에 등용한 것으로 많은 사화를 겪으며 정치,사회갈등을 촉발시켰다. 이후 조선 최초의 붕당은1557년(선조8년) 동인과 서인의 대립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퇴계 이황의 동인(영남학파)과 율곡 이이(기호학파)의 서인으로 대표되더니, 동인은 다시 남인 이황과 북인 조식으로, 서인은 노론 송시열과 소론 윤증으로 갈려 대립했다. 이것이 사색당파인 남인,북인,노론,소론의 시초다.

노론이 장기집권하는 사이 재야로 물러난 사림파는 주자학(성리학,유학)을 바탕으로 사학(私學)인 서재(書齋)·서원(書院)을 통해 세력을 넓혀 나갔다. 이들 성리학적 정치관은 도덕과 의리, 명분을 강조하고 인재 등용도 과거제 보다 천거제를 중시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문제된 사학, 앞으로 나라까지 거덜낼 가능성이 있는 사학도 그 뿌리가 서원과 맞닿아 있다.

여기서 보면 우리들의 사상이나 의식의 흐름은 일관되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된다. 즉, 노론에서 밀려난 소론 박세당은 노론과 반대되는 사림파에 속해야 맞는데, 박세당은 성리학적 유교관을 배척하고 실사구시를 택했다. 또한 영조 이후 이미 기득권을 굳힌 노론세력도 성리학적 정치관인 도덕과 의리, 명분을 중시해 사림파화 했다. 현재로 해석하면 사대부적 보수주의 사고방식이다. 이들은 선말 세도정치를 이끌었고 한말에는 노론의 후예 이완용과 송병준(송시열의 9대손) 등으로 이어진다. 최근 외무고시가 폐지되고 인맥(승진)으로 사무관을 기용한 것이나, 사법고시가 폐지돼 로스쿨 이 탄생한 것이나, 그 나라 말아먹을 맥락은 사림파의 천거제와 같지만, 과거 기득권층 공신들이 즐겨한 훈구파적 행태와도 흡사하다.

ⓒ자료

정치,사회,외교 등에 개혁을 주장한 소론 박세당은 노론에게 미운털이 박혔고 당쟁에 혐오를 느껴 도봉산 동쪽 석천동(石泉洞 지금은 수락산 서쪽) 기거하며 학문과 후진 양성에 주력한다. 그의 호 서계(西溪)도 수락산 '서쪽 계곡'이란 뜻이고, 계곡 궤산정(簣山亭) 아래 '석천동(石泉洞), 취승대(取勝臺), 서계유거(西溪幽居)'란 선생의 친필 음각서가 남아있다. (궤산정은 올 7월까지 초라하게 남아 있었으나 최근 개천정비로 그 모습이 사라졌다.)

박태보는 박세당의 둘째 아들로 소론에 속했으나, 노론 소론 간 대립에서 공익과 정의를 택한 강직성을 보였다. 예조좌랑, 교리, 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했고, 기사환국 때 장희빈을 택한 숙종을 향해 서인을 대변, 인현왕후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다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유배 중 노량진에서 죽었다.

오후 늦게 장암역을 내려 박세당 고택은 멀찌기서 둘러 보았다. 시골같은 동리에 가을이 익은 감나무,대추가 푸짐하다. 개천 건너 13만평 되는 박씨 종중 산에 있는 가족묘까지 갔지만 정작 박세당, 박태유 묘소는 건너 뛰었다. 중랑천으로 흘러드는 개천을 따라 바위 음각서도 둘러보고 도착한 노강서원. 단촐한 분위기였다.

조선때는 유난히 충신과 간신들이 많았다. 그들 스스로 택한 면도 있지만, 역사를 반바퀴 돌려 보면 충신과 간신들은 간신과 충신으로 뒤바뀐다. 이것 또한 정사와 야사 사이겠지만, 그때, 그 시간에 그들은 그 편에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암역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수락산능선에 짠~~하고 고개를 내민 추석 보름달, 이 계절엔 슈퍼문이 된다고 한다. (龍)









※ 박세당(朴世堂 1629~1703) - 자료

요약조선 후기의 학자. 당시의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계의 반대입장에서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주장하였다. 학풍과 사상 연구에서 벗어난 실사구시적 학문 태도를 강조하였으며 《사변록》을 저술하였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등 이다. 이조 참판 박정(朴炡)과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딸인 양주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후기의 학자로 전라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현종 1년(1660)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홍문관 교리 겸 경연시독관·북평사 등을 역임하였다. 1667년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을 때는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올려 신분제도의 모순에 따른 사대부들의 무위도식을 비판하고,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실리주의 정책을 펼 것과 백성을 위한 법률의 혁신, 정치·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1668년에는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있다가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관료생활을 그만두고 양주(楊州) 석천동(石泉洞 : 지금의 도봉산 아래 다락원)으로 물러났다. 그뒤 숙종 23년(1697) 4월에 한성부판윤을 비롯하여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 수차례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주력하였다.

그가 생존했던 시기는 송시열(宋時烈)을 축으로 한 노론계(老論系)가 정국을 주도하였고 있었기 때문에 반주자학적(反朱子學的) 입장에 섰던 그로서는 정치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예를 들면 병자호란 당시 송시열이 청태종공덕비문을 지은 이경석(李景奭)을 비판한 것에 대해 1702년 이경석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찬술하면서 송시열이 이경석을 비판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여 노론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조선의 성리학이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를 보이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1703년에는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밝혀 노론에게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박세당은 관작을 삭탈당하고 옥과(玉果)로 유배형을 받았으나,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유배형이 집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곧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으면서 아들에게 “장례를 지낸 후에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상식(上食)을 설치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이 말은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의 행동양식 표준으로 인식되어 오던 예론(禮論)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서 당시 정치세력에게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그는 당대 조선조 유학을 지배하던 주자설(朱子說)의 절대화된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각적인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정주학적(程朱學的) 학풍과 사상이 강요되던 테두리에서 벗어나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태도로 고전의 본뜻을 찾아보고자 하였기 때문에 관념화된 성리학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이후 진보적인 학문을 촉진시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정치적으로 소론계(少論系)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소론의 거두인 윤증(尹拯)을 비롯하여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 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제자를 길렀다.

그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원(伸老)되었으나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현재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水落山) 중턱 석림사(石林寺) 옆에 그의 묘소가 있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西溪先生集)》, 《사변록(思辨錄)》,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1책 및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6책과 농서인 《색경(穡經)》이 전한다.

※ 박태보(朴泰輔 1654∼168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할아버지는 참판 정(炡)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세당(世堂)이며, 어머니는 현령(縣令)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당숙인 세후(世垕)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서 1677년 알성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다. 이 때 시관(試官)으로 출제를 잘못했다는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80년에 홍문관의 부수찬(副修撰)·수찬·부교리(副校理)·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문묘 승출(陞黜 : 위패를 새로이 모시거나 있던 위패를 출향시킴.)에 관한 문제와 당시 이조판서 이단하(李端夏)를 질책한 소를 올려 파직되었다.

그 뒤 서인들이 여러 차례 그의 환수를 청해 1682년 홍문관의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일정 기간 휴가를 주던 제도)에 선발되었다. 사가독서를 마친 후 이천현감(伊川縣監)을 시작으로 부수찬·교리·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했으며, 호남 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宋時烈)과 윤선거(尹宣擧)가 서로 정적으로 있을 때, 윤선거의 외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친족 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시비를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한 적도 있다.

이어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파주목사로 나갔을 때, 조정에서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어버렸다. 그런데 그가 부임해 재직하는 파주에서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이를 존속시켜나가 인책, 면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해 주동적으로 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재주가 뛰어나 젊은 나이에 장원 급제를 한 경력이 있으며, 학문 태도도 깊고 높아 당대의 명망 있는 선비들과도 깊은 교유를 맺었다. 특히 그가 교유한 친우는 주로 서인의 소론파들로 최석정(崔錫鼎)·조지겸(趙持謙)·임영(林泳)·오도일(吳道一)·한태동(韓泰東) 등이 있다.

타고난 성품도 뛰어나 지기(志氣)가 고상하고 견식이 투철해 여러 차례의 상소에서 보여준 것처럼 시비를 가리는 데는 조리가 정연하고 조금이라도 비리를 보면 과감히 나섰으며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서슴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왕은 곧 후회했고,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을 세웠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豐溪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정재집≫ 14권, 편서로는 ≪주서국편 周書國編≫, 글씨로는 박임종비(朴林宗碑)·예조참판박규표비(禮曹參判朴葵表碑)·박상충비(朴尙衷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노강서원(鷺江書院)] - 자료

조선 숙종 때 문신인 정재 박태보(定齋 朴泰輔,1654∼168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박태보는 호남 암행어사, 파주 목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가는 도중 죽었다. 학문에도 깊고 성품도 강직한 분으로 알려졌으며 죽은 뒤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숙종 21년(1695)에 세운 이 서원은 숙종 27년(1701)에 국가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노강(鷺江)’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원래는 서울 노량진에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68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 동재·서재, 고직사 등과 출입문이 있으며 교육장소로 사용되는 강당은 따로 두지 않았다. 사당은 박태보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으며, 각 칸에는 4짝으로 이루어진 문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을 사용하였는데 가운데 칸에 용머리를 첨가하였다. 동·서재는 온돌방으로 꾸며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기거하는 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eoldj&logNo=220429766123 카리 2015년7월 자료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ingleway&logNo=40201415481 허우단심 2013년11월 자료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ingleway&logNo=40201415481 허우단심 2013년11월 자료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ingleway&logNo=40201415481 허우단심 2013년11월 자료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ingleway&logNo=40201415481 허우단심 2013년11월 자료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ingleway&logNo=40201415481 허우단심 2013년11월 자료


↑ 계곡에 쓰러져가는 정자는 궤산정. 바로 아래 바위에는 석천동이란 글. 눈에 덮힌 바위에도 취승대란 글이 새겨져 있는데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 서계 박세당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후 제자들을 가르치며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 였다고 한다. (출처: http://blog.daum.net/baweesol44/8871851, 바위솔 2013년 2월자료)
↑ 사랑채에서 바라보는 도봉산은 일품 (출처: http://blog.daum.net/baweesol44/8871851, 바위솔 2013년 2월자료)

↑ 삼각산,도봉산,수락산,검암산(불암산),아차산,퇴계원,망우리 등과 건원릉,태릉,의릉,정릉 이 표시돼 있다. 현 중랑천(中浪川)은 본시'속계', 중량포(中梁浦)로 중량천(中梁川), 중량구(中梁區)로 하는 게 맞다. ⓒ대동여지도 자료
↑ 불타는 향로를 연상케하는 수락산 정상부 ⓒ자료사진
↑ 동쪽 남양주(별내신도시)에서 본 불암산 주봉은 붓끝이나 칼끝같다. ⓒ2013 서울포스트자료
↑ 동쪽 백봉산자락에서 본 수락산. 수락산은 대부분의 방위각에서 박쥐가 날으는 모양이다. ⓒ2015년 6월 서울포스트자료
↑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루스가 생각난다. 저 장면은 달을 향해 날고 있는 박쥐 ⓒ서울포스트
↑ 계곡에 쓰러져가는 정자는 궤산정. 바로 아래 바위에는 석천동이란 암각문. 눈에 덮힌 바위에도 취승대란 글이 새겨져 있는데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 서계 박세당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후 제자들을 가르치며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 였다고 한다. (출처: http://blog.daum.net/baweesol44/8871851, 바위솔 2013년 2월자료)
↑ 사랑채에서 바라보는 도봉산은 일품 (출처: http://blog.daum.net/baweesol44/8871851, 바위솔 2013년 2월자료)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ingleway&logNo=40201415481 허우단심 2013년11월 자료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eoldj&logNo=220429766123 카리 2015년7월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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