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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 사가정 에서 용마산 계곡이 감춰놓은 '얼음폭포'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 ▲ 처음 발견한 용마산 북편 숨은 폭포. 조금전까지 도봉산과 불암산이 보였는데 금새 눈발이 날린다. ⓒ20131229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 | ▲ '사가정' 은 조선조 대학자 '서거정' 의 호를 따 서울시가 붙인 지명 ⓒ서울포스트 |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한 길 물 속을 제대로 알 리 없고, 한 길 산 속도 제대로 알 리 없다.
용마산을 제법 다녔고 북한산 보현봉부터 백운대 구간만큼이나 길쭉한 아차산-용마산(아차산 용마봉)-망우산 길을 걷으면서 서울을 싸고 있는 그림같은 산야를 감상했지만, 용마산이 감춰놓은 비경을 오늘에야 접한 것 같다.
금새 눈이 내릴 것같이 찌푸린 하늘에 정상가는 것 대신 여기저기 한가롭게 기웃거려 본 곳에서 발견한 빙폭(氷瀑). 저쪽에 인공폭포를 두고 동양최대 운운하는데 그건 가짜고, 요게 용마산에서 유일한 폭포다운 폭포다. '사가정' 공원 입구에 조선시대 대학자 '서거정'의 시 '한중(閑中)' 이 새겨져 있다.
자세히 읽어보니 어쩜 그리도 내 한가로움과 같을까,는 생각이 들었다. 비교할 수 없는 조선의 대문호이고 여기 '사가정'이라는 지명도 그가 용마산 근처에서 머문 적이 있어 서울시에서 그리 붙여줬다는데, 그의 재주에 비해 사후 사람들의 입에 그다지 회자되지 못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또 북쪽 수락산에는 그와 쌍벽을 이룬 '김시습'이 생육신으로 떠돌 때 승려로 은거한 곳이 있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이하 '서거정, 김시습' 검색 등 참고
한중 (閑中) - 한가한 즐거움
- 서거정 -
백발홍진열세간 白髮紅塵閱世間 홍진에 묻혀 백발이 되도록 살아 왔는데
세간하락득여한 世間何樂得如閑 세상살이 가운데 어떤 즐거움이 한가로움만 같으리
한음한작내한보 閑淫閑酌乃閑步 한가로이 읊조리고,한가로이 술 마시며,한가로이 거닐고
한좌한면한애산 閑坐閑眠閑愛山 한가로이 앉고 한가로이 잠자며 한가로이 산을 사랑한다
■ 서거정 [徐居正] 1420(세종 2)∼1488(성종 1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달성(達成), 자 강중(剛中), 호 사가정(四佳亭), 시호 문충(文忠)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을 지냈다. 14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 후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 등을 거쳐 1456년(세조 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57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460년 이조참의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시대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1466년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장원한 후 육조(六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45년간 여섯 왕을 섬겼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했으며, 또 왕명을 받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國譯)했다. 성리학(性理學)을 비롯, 천문·지리·의약 등에 정통했다.
문집에 《사가집(四佳集)》 저서에 《동인시화(東人詩話)》 《동문선(東文選)》 《역대연표(歷代年表)》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筆苑雜記)》 가 있으며 글씨에는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忠州)가 있다. 대구(大邱)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 김시습 [金時習] 1435(세종 17)∼1493(성종 24)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서울 출생.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이이(李珥)는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매월당집』에 전하는 「상류양양진정서(上柳襄陽陳情書)」, 윤춘년(尹春年)의 전기(傳記), 이이의 전기, 이자(李耔)의 서문(序文), 『장릉지(莊陵誌)』·『해동명신록』·『연려실기술』 등이 있다.
증조부 윤주(允柱)는 안주목사(安州牧使), 할아버지 겸간(謙侃)은 오위부장(五衛部將), 아버지 일성(日省)은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으며, 그의 어머니는 울진 선사 장씨(仙槎張氏)이다.
김시습은 서울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1437년(세종 19)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한시를 지을 줄 아는 천재였다. 『정속(正俗)』, 『유학자설(幼學字說)』, 『소학(小學)』을 배운 후 5세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 그가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졌다.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고 하여 ‘오세(五歲, 5세)’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은 일가 할아버지가 그의 재능을 알아 논어(論語)의 학이(學而) 편(學而時習之不亦說乎, 학이시습지불역열호)에서 따 지어 줬다고 한다.
1449년(세종 31)에는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15세의 나이로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러나 3년상이 끝난 후,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가정이 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고,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입문을 하였다. 그 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21세 때인 1455년(세조 1)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왕위찬탈 - 계유정난(癸酉靖難)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을 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후 그는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이는 『매월당집』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으로 남아 있다.
그가 쓴 발문에서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고 적었다.
26세 때인 1460년(세조 6)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여 지은 시를 모아『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고, 29세인 1463년(세조 9)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그 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교정(校正)일을 맡아 열흘간 내불당에 거쳐한 일이 있었다. 1465년(세조 11) 원각사 낙성식에 불려졌으나 짐짓 뒷간에 빠져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鄭昌孫)이 영의정이고, 김수온(金守溫)이 공조판서로 봉직하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세 때인 1465년(세조 11)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31세(1465) 때부터 37세(1471)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겼다.
그동안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 2)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481년(성종 12)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당시 양양부사(襄陽府使)였던 유자한(柳自漢)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양양·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무량사(無量寺)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사상과 문학
김시습은 지금까지 『금오신화』의 작자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자못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불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으며, 그뿐 아니라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들도 그의 전반적인 사유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몫으로 주목을 요한다.
그는 문(文)에서도 각 체 문장을 시범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이 그의 사상편(思想篇)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김시습의 시는 현재까지 그의 시문집에 전하는 것만 하더라도 2,200여수나 되지만 실제로 그가 지은 시편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스스로 술회한 그대로 어릴 때부터 질탕하여 세상의 명리나 생업과 같은 것을 돌보지 아니하고, 마음 내키는대로 산수를 방랑하면서 좋은 경치를 만나면 시나 읊으면서 살았다. 원래 시란 자기실현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역대의 시인 가운데서 김시습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시로써 말한 시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시로써 자신의 정신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었기에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 시적 충격과,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시적 동기도 모두 시로써 읊었다. 시 말고는 따로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시를 쓰게 된 그는, 시를 쓰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했기에 시를 택하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므로 그는 그에게서 유출되는 모든 정서가 시로써 표현할 가치가 있는지 여부도 고려하지 않았다. 실천적인 유교이념을 가진 그의 지적 소양에서 보면, 그는 모름지기 경술(經術)로써 명군(明君)을 보좌해야만 하였고, 문장으로 경국(經國)의 대업에 이바지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가 몸을 맡긴 곳은 자연이요 선문(禪門)이었으며, 그가 익힌 문장은 시를 일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선문은 이단이요 시작(詩作)은 한갓 여기(餘技)로만 생각하던 그때의 현실에서 보면, 그가 행한 선문에 몸을 던진 것이나 시를 지음에 침잠한 것도 이미 사회의 상도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의 행적이 괴기하다든가 그의 시작이 희화적(戱畵的)이라는 평가는 당연하였다. 우리 나라 한시가 대체로 그러하지만, 김시습의 시에서도 가장 흔하게 보이는 주제적 소재는 ‘자연’과 ‘한(閑)’이다. 몸을 산수에 내맡기고 일생을 그 속에서 노닐다가 간 그에게 자연은 그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도 그 일부가 되곤 하였다. 평소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한 그는 특히 자연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현실에 대한 실의가 크면 클수록 상대적으로 자연의 불변하는 영속성 때문에 특별한 심각성을 부여하고 비극적인 감정이 깃들이게 하였다.
일생을 두고 특별한 일에 종사하지 않았던 그에게는, 어쩌면 ‘한(閑)’이 전부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관심과 욕망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가지고, 자연과 함께 평화스러운 상황에 놓이기가 어려웠다. 한의(閑意)가 일어났다가도 세상일이나 다른 사물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흔들어 놓곤 하였다.
때문에 「한의(閑意)」·「한극(閑極)」·「한적(閑適)」·「우성(偶成)」·「만성(漫成)」·「만성(謾成)」 등 그의 시에서 보여준 그 많은 ‘한(閑)’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한 한일(閑逸)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의 시에 대한 뒷사람들의 비평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으로 집약된다.
첫째는 힘들이지 않고서도 천성(天成)으로 시를 지었다는 점이며, 둘째는 그 생각이 높고 깊으며 뛰어나 오묘한 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이 모두 인상비평의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시인 자신이 “단지 시의 묘한 곳을 볼 뿐이지 성련(聲聯)은 문제 삼지 않는다.”라고 하였듯이 그의 시에서 체재나 성률은 말하지 않는 쪽이 나을 듯하다.
저서
그의 시 가운데서 역대 시선집에 뽑히고 있는 것은 20여 수에 이른다. 그의 뛰어난 대표작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산행즉사(山行卽事)」(7절)·「위천어조도(渭川漁釣圖)」(7절)·「도중(途中)」(5율)·「등루(登樓)」(5율)·「소양정(昭陽亭)」(5율)·「하처추심호(何處秋深好)」(5율)·「고목(古木)」(7율)·「사청사우(乍晴乍雨)」(7율)·「독목교(獨木橋)」(7율)·「무제(無題)」(7율)·「유객(有客)」(5율)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도중」·「등루」·「독목교」·「유객」 등은 모두 『관동일록』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그가 마지막으로 관동지방으로 떠났을 때의 작품이며, 대체로 만년의 작품 가운데에서 수작(秀作)이 많다.
『금오신화』는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등 5편이 전부이며, 이것들은 김시습의 사상을 검증하는 호재(好材)로 제공되어 왔다. 그러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를 제외한 그 밖의 것들은 모두 감미로운 시적 분위기로 엮어진 괴기담(怪奇譚)이다.
이 전기의 틀을 빌려 그에게 있어서 가장 결핍되어 있던 사랑을 노래함으로써, 우리나라 역대 시인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염정시(艶情詩)를 남긴 시인이 되었다. 그의 역사사상은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문제를 풀어 가는 소재로 인식하였으며, 역사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 한국 최초의 역사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고금제왕국가흥망론(古今帝王國家興亡論)」이란 논문에서 역사적 위기도 인간의 노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파악하고, 항상 인간의 마음씀씀이를 중시하였다. 그가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고 한 점은 단순히 성리학적 견해만이 아니라 불교의 근본이론이기도 하다.
또한 「위치필법삼대론(爲治必法三代論)」에서는 삼대의 군주들이 백성들의 생활에 공헌을 하였기 때문으로 해석하였으며 인간의 고대문화의 발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상훈과 추모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단종이 복위된 1707년(숙종 33)에 사헌부 집의(執議)에 추증되었고, 1782년(정조 6)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84년(정조 8)에는 청간(淸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매월당집(梅月堂集)』
『한국유학사략』(이병도, 아세아문화사, 1986)
『매월당집해제』(최진원, 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 1973)
「김시습의 역사철학」(정구복, 『한국사학사학보』2, 2000) 외
이하 다음블로거 '김규봉 ... 사는 이야기'에서 부분 발췌
서거정은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의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 어지러운 현실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이었던 김시습(金時習)과는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역사에 가정(假定)이란 없지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 낸 계유정난(癸酉政亂)이 없었다면 서거정과 김시습의 운명은 이처럼 엇갈리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어릴 때부터 비범한 능력으로 주위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조선시대를 통털어 김시습만큼 불운한 삶을 산 지식인이 없었다면, 서거정만큼 영화로운 삶을 산 지식인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한 작가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작품 안팎에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래서 부귀영화를 누리던 작가와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어야 했던 작가의 작품은 한 눈에 구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서거정은 시벽(詩癖)과 주벽(酒癖)이 있다고 스스로 고백하였다. 전하는 작품만 하여도 6,000首가 넘는데, 그의 작품에는 그의 영화로운, 한가로운 삶이 녹아있다.
서거정과 김시습은 시우(詩友)의 교분을 맺고 지냈다. 살아서의 삶은 극명하게 대비되지만, 죽어서의 평가 또한 반전을 이루며 극명하게 대비된다.
서거정의 "사가집(四佳集)"에는 서거정이 김시습에게 준 시(詩)가 42편이나 남아 있다. 그 중 하나. 기청한 (寄淸寒). 청한자(淸寒子)는 김시습의 호(號)이다.
아애설선자 我 愛 薛 禪 者 나는 설잠선사(김시습)을 사랑하노니
본래면목진 本 來 面 目 眞 본래의 면목은 진실하였다네
도종혜능출 道 從 惠 能 出 도(道)는 혜능에게서 나왔고
시여무본친 詩 與 無 本 親 시(詩)는 무본과 가깝다네
고의기문주 高 誼 己 聞 主 높은 의(義)는 이미 임금이 들었고
청담능동인 淸 談 能 動 人 맑은 이야기는 능히 사람을 감동시키네
교유다자행 交 遊 多 自 幸 사귐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니
갱결후생인 更 結 後 生 因 후생의 인연을 다시 맺었으면
죽어서 잊혀진 자 (서거정)과 죽어서 살아 난 자 (김시습)
조선 초기의 문인은 조정에서 활동하던 관각파(館閣派)와 산림에 은거하여 心性을 도야하던 사림파(士林派)로 나뉜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판적 지식인을 방외인(方外人)이라고 한다.
서거정이 이러한 관각파(館閣派)를 대표한다면, 김시습은 방외인(方外人)을 대표한다. 서거정이 조정에서 활약하며 남긴 역할은 대단하다. 개인 저술뿐만 아니라, 국가 사업인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삼국사절요,동문선 등 대단하였다. 이에 비하면 김시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매우 흥미롭다. 조선왕조실록의 사관(史官)은 서거정이 죽던 날 "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였고, 후진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다. 이로써 세상에서 그를 작게 여겼다. "라고 혹평하였다. 권력 독점에 대한 비판이고, 변절에 대한 비판이었다.
김시습은 생전에 한번도 왕조실록에 등장하지 못 한다. 그러나 그가 죽고나서 상황이 달라진다.그가 남긴 글을 수습하여 간행애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된다. 대의명분을 중시한 사림(士林)들이 김시습의 절의(節義)에 주목한 것이다.
결국 정조는 김시습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청간공(淸簡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서거정과 김시습은 죽어서도 엇갈린 삶이었다. 역사는 준엄하며, 올곧게 산 자의 편이었다. 이런 면에서는 요즘의 세태보다 훨씬 훌륭하다.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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