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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포토] 인왕산 아래 옥류동천(수성동계곡)에서 본 신비로운 수석바위(가칭 남근석男根石,남근바위), 치마바위의 일제 '東亞靑年團結(동아청년단결)' 암각 흔적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9/02/04 23:35:39)

[탐방포토] 인왕산 아래 옥류동천(수성동천)에서 본 신비로운 수석바위(가칭 남근석男根石,남근바위), 치마바위의 일제 '東亞靑年團結(동아청년단결)' 암각 흔적
-SPn 서울포스트, (마이 네임 이스) 량기룡(梁奇龍) 기자

 

▲ 휴일을 맞은 오후, 종로 서촌마을 배화여중고 뒤 켠에 있는 백사 이항복의 집터 필운대, 수성동계곡을 찾았다. ⓒ20190204 세상을향한 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바위에 자라 수석같은 소나무가 이 산 가장 멋진 생명체. 경복궁,종묘숲,낙산숲,용마산, 멀리 예봉산이 보인다. ⓒ2012 서울포스트
↑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가 쓴 ‘동아청년단결’ 등의 글씨를 스즈키 긴지로 가 새긴 병풍바위(1939년 촬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원판사진

 

인왕산(仁王山 340m) 명물 선바위(입암,입석)는 장삼을 걸친 스님같이 생겼다. 오랜 풍화작용에 변한 모양에 영험한 기도처로 통했고 인왕사 라는 절의 구심점이 되었다고 한다. 이번에 사진으로 수집한 바위도 인왕산 명물바위 대열 상위에 오를 수 있는 자태다. 바위 이름조차 없는 걸 보니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넷상이나 사진들도 많지 않고 언급도 없지만 생태까지 본다는 단연 '으뜸'이다. 바위 꼭대기에 인공수석처럼 소나무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마치 제주도 외돌개 같거나 추암 촛대바위, 도봉산의 주봉를 옮긴 것 같다.     

 

입구에서부터 범바위와 남근석(가칭) 사진을 찍는다고 정상부근을 몇 번이나 올려다 보면서, 병풍바위라는 치마바위에 부자연스런 흔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료(아래 첨부)를 뒤져보니 아니나 다를까, 일제의 흔적이 있었고 그걸 지운 게 남아 있다. 더 깔끔하게 지울 수 있는데 우리 정부는 왜 그렇게 놔둘까,에 의문이 든다.

 

인왕산(仁王山)은 일제때 仁旺山으로 쓰다가 1995년 원래 이름인 '王'자로 바꿨다.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남근바위 모양은 높게 쳐들고 있는 꼭대기에 소나무가 생장한 것이 신비하다. 공식적인 명칭이 없지만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에도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누군가가 더 좋은 이름을 지을 때까지 내가 임의로 붙이건데, 남자성기를 상당히 닮아 '남근석(남근바위)'으로 명명해 두자. 그래서 일제때는 감히 상상도 못할 행위지만, 그들의 '東亞靑年團結(동아청년단결)' 음각글씨에 내 오줌을 쫘악 깔기는 상쾌함을 맛보고 싶다. 


 

※사진 설명

 

▲ 휴일을 맞은 오후, 종로 서촌마을 배화여중고 뒤 켠에 있는 백사 이항복의 집터 필운대, 수성동계곡을 찾았다. ⓒ20190204 세상을향한 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인왕산산행 중 발견한 수석모양의 바위.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생태가 더욱 신비롭다. 남근석,남근바위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서울포스트

▲ 겸재 정선 의 인왕제색도 謙齋 鄭敾筆仁王霽色圖 ⓒ자료

▲ 치마바위 위쪽을 보면서, 처음에는 불곡산에 있는 악어모양의 바위로 보았으나, 악어등으로 보기엔 무늬가 너무 규칙적이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햇빛이 저 각도 아니었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울포스트

 

넷상 자료 출처 : http://cafe.daum.net/jangchung1969/Hloa,  

http://blog.daum.net/jib7717/8349310 즐거운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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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부한 자료는 '구룡초부'님의 글이고, 그 분은 인왕산이 보이는 경복고등학교 출신이신 듯.

 

인왕산 치마바위와 東亞靑年團結 | 한양진경

구룡초부 2013.04.14 20:56
 

사진: 최근 복원한 수성동에서 찍은 인왕산

 

사진 우측 상단 그러니까 정상 바로 밑 ‘ㄴ’자 소나무 열(列)이 있고 그 주위에 뭔가 흔적이 보인다.

 

난 저 암벽이 ‘치마바위’라고 생각했는데, ‘병풍바위’ 란 말이 또 들린다. 생각하면 치마나 병풍이나 주름졌다는 면에서 같다. 물론 병풍도 좍 펴면 팽팽해 지겠으나, 일단은 주름이 연상되니, 치마나 병풍이나 같은 바위 두고 달리 부르는 이름 아닌가 한다.

 

사진: 위 같은 사진에 뭔가의 흔적 부분을 표시해 봄. 이거 자라면서 계속 보고, 특히 고등학교 때는 교실과 교정에서 눈만 쳐들면 바로 보이고, 산악반 좇아가 암벽도 타 본 적도 있는데, (인왕산 슬라브 별거 아닌 줄 알았다가 막상 붙으니 몸이 떨려 그쪽으로는 포기했으나 바위 밑에서 자주 놀기는 했음), 이순우 씨 글 읽기 전엔  전혀 몰랐다.

 

각서(刻書) 흔적

 

이제 카메라 줌을 당겨 보면 분명히 각서(刻書)-글씨를 새겼다가 뭉갠 흔적이다.

 

사진: 인왕산 치마바위 각서(刻書) 흔적

 

도대체 뭘까?

서울 지역 근대문화유적을 조사, 연구하는 이순우 씨가 최근 저 흔적에 대해 소상히 밝힌 바, 그 요지를 간추리면서 내 느낌도 몇 자 덧붙여 본다. 우선 쓰여 있던 글씨를 암벽 사진에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사진에 글씨 넣는데 한자 지원을 받지 못해 한글로 썼지만 원래는 모두 한자(漢字)로, 사진 오른 쪽 열부터 다음과 같다.

 

제 1열; 東亞靑年團結

제 2열; 皇紀二千五百九十九年 九月十六日

제 3열; 朝鮮總督 南次郞

다시 제 3열과 약간 사이를 띄어 그 왼쪽에, 대회 개최 사실과 기념하는 사유를 ‘한 열에 28글자씩, 네 줄로’ 한자(漢字)로 새겨 놓았었다.

 

설명은 이와 같으나, 바위를 보면 사유 부분이라는 왼쪽 끝 작은 글씨로 줄당 28자-4줄 옆 왼쪽으로 줄이 더 보이니 어찌 된 셈인지 모르겠다.

 

황기(皇紀)란 일본 아이들의 이른바 신무(神武 ;진무) 천황부터 따진 연대로, 원년(元年)이 BC 660 년이다. 신무(神武)나 황기(皇紀)나 다 가공(架空)이다. 그러나 너무 씹으면 ‘너네 단기는 뭐 그리 대단한데?’ 하고 역습 당할 수 있으니 이쯤 하고, 황기 2599년은 서기 1939 년이다.

 

일본 애들 무기(武器) 관련 이야기 읽다 보면 ‘99식’ 이란 용어가 나오는데, 황기 2599년-1939년 개발했다고 붙인 이름이고, 진주만 습격 당시 일본이 자랑하던 전투기 제로(零戰)는 개발년도인 황기 2600년(서기 1940년)의 끝 디지트- 00을 ‘제로’라고 부른 것이다.

 

남차랑(南次郞)은 1936-1942년 7대 조선 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다. 전쟁 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나 사형은 면하고 종신형을 받았다. (이럴 땐 죽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954년 고령에(1874년 생) 건강악화로 석방되어 1955년 사망한다.

 

경위(經緯 (역시 이순우 씨 조사의 요약임)

  • 1938/09/24; 조선연합청년단 결성
  • 1939; 조선연합청년단에 대일본연합청년단에 가맹
  • 1939년 가을; 제 15차 대일본청년단대회(大日本靑年團大會)를 조선 경성에서 개최하니, 일본, 중국, 만주, 몽고, 대만에서 대표단이 옴.

이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기념하기 위하여 글씨를 새기기로 하고 문구를 검토하다가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의 여섯 글자로 결정.

  • 새길 장소는 경성-서울 시내 어디서나 잘 보이는 인왕산 암벽.
  • 1939/9/17일; 인왕산에서 기념 각자 기공식

갑자기 ‘대일본청년단’이 나오고 거기에 뜬금없이 조선, 만주, 몽고, 중국(실재는 대만인) 청년이 산하에 들어가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이른바 오족협화(五族協和) 개념에 따른 것이다.

 

일본 제국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이 표면적으로 선전/표방하던 바는 오족협화(五族協和), 팔굉일우(八紘一宇)였다.

 

오족은 앞서 말한 일본, 조선, 만주, 몽고 중국이고, 팔굉일우(八紘一宇)란 팔굉(八紘)-전 세계가 일우(一宇) 하나의 집으로 된다는 것이다.

 

거 참 근사하고,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 것 같다. 실재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한, 중, 일 지사들 사이에는 동양이 협력하여 백인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했었다. 일본 구상(?)의 문제는 오족(五族)의 맏형은 당연히(?) 일본인이고, 팔굉을 아우른 일우(一宇)의 지붕 꼭대기에는 일본 천황이 군림한다는 점이다.  이런 경위로 새기게 된 각서의 작업 당시 사진이 있다.

 

사진: 각서 작업 당시. 경복궁 옛 국립박물관-자선당 터에서 담은 풍경이다.

…..서울 어디서나 쉽사리 올려다 보이고, 크고 널찍한 암벽을 갖춘 탓에, 일제의 기념 각자(記念刻字)가 새겨 지는 수난의 공간이 되고 말았다…운운 (이순우 씨 글 중에서)

 

 ‘東亞靑年團結글씨는 ‘동아청년의 아버지’ (요즘 들으면 개도 웃고 소도 웃겠으나 그때는 그런 식으로 부른 모양)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  (南次郞)휘호(?)를 받았다.  글씨 한 자의 크기가 아홉(9) 자(), 10 자, 12 자 등 신문마다 다른 내용이나, 각서 완성 될 때 나오는 기사가 한자의 크기 사방 12 자(척)로 나오니 그게 맞는 듯 하다. 다섯 치 깊이로 팠다니 상당히 정성을 쏟은 듯.

皇紀二千五百九十九年 九月十六日 의 15자는 글자 크기가 사방 4자(),

朝鮮總督 南次郞 7자는 글자당 사방 다섯 자씩 크기였다고 한다.

 

글씨를 새기게 된 경위를 적은 3줄 줄당 18자의 작은 글씨 크기는 내가 본 문건에선 찾지 못했다.

 

1940년 2월 보도에 나온 글씨 새긴 각수(刻手)가 스즈키 긴지로(鈴木銀次郞) - 일본식 이름이나, 그땐 이미 창씨 개명이 시작되어, 이름만 가지고 단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금강산 구룡연에 해강 김규진의 미륵불(彌勒佛) 글씨를 새긴 적도 있다니 조선인 석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각수가 일본인이던 조선인이던 별 중요 사항은 아니고, 하여튼 진행 과정을 보니 일제(日帝) 당국이 상당히 정성을 쏟은 듯 하다. 이 글씨는 해방 후에도 몇 년간 있다가, 1950년 되어서 쪼아 낸 듯 하다.   6.25 나던 해 2월에 다음과 같은 신문 기사가 나왔다니 말이다.

 

……인왕산 절벽 암반 위에는 일제가 최후 발악을 하던 때 새겨 놓은

‘대동아청년단결(大東亞靑年團結) 황기(皇記) 2599년 9월16일 남차랑(南次郞)

운운’ 이라는 문구가 그냥 남아 있는데, 이번 서울시에서는 민족정신 앙양과 자주정신 고취에 미치는 바 영향이 많다고 하여 82만원을 들여 삭제 공사를 추진 중이라 하며 3월 말까지는 끝날 것이라..운운…조선일보 1950/2/25

 

‘대동아청년’이 아니라 ‘동아청년’이다. 그땐 신문사에서 창문만 열면 바로 보였을 텐데. 예나 지금이나 신문은 대충 쓰는 버릇이 있는 듯.

 

큰 글씨는 다 뭉개 졌으나, 작은 글씨는 글씨 형태가 남은 듯 하지만, 똑딱이 카메라 줌 당겨 본 게 그렇고, 큰 대포알 렌즈로 보면 또 모르겠다. 확실하기로는 암벽 타고 가서 보는 것이다.

 

하여튼 인왕산 저 잘 생긴 바위에 고 따위나 새겨 놓다니, 이념을 떠나 그 식견, 왜놈 새대가리에 탄식을 금치 못하며 한국인이면 누구나 ‘이 나쁜 노무 시키들’ 할 것이다.

 

그건 당연하고…

그런데 우리 동아시아 문화에서는 일단 구호부터 큼직하게 써 붙여야 뭔가 되도 되는 듯이 여기는 전통이 있다.  호적(胡適) 박사는 이런 현상에 대하여 명교(名敎)라는 글 쓴바 있다.

 

이 ‘東亞靑年團結에피소드(?)에서 하나 연상되는 것은 ‘초전박살’ 때려잡자 김일성’ 이다. 이거 한 때 산지사방에 엄청나게 크게, 그것도 빨간 글씨, 당연하게도 졸필로 써 놓지 않았던가? 거기가 천하의 절경(絶景)인가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지.

이 초전박살 류는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이제 거의 없어진 듯 한데, 북에서는 문구는 다르겠지만, (음 거기는 구호가 강성대국, 주체사상 인가?)  아무튼 그런 종류(類)가 아직 많을 것 같다. 중국도 뭔 구호가 그리 많은지? 이런 거 안 붙이는 사회가 잘 하고 있는 것이다.

 

東亞靑年團結 크게 써 봐야 동아의 청년들이 전혀 단결하지 못 하는 실정만 누설할 뿐이고, 강성 대국은 실제로는 ‘연성’ 일지 모른다. 이상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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