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조선민국(朝鮮民國) ②③
-SPn 서울포스트, 심천 자유기고가

제1부 우리는 하나

(1, 북에 가다. - [소설] 조선민국(朝鮮民國) ①)


2, 추방

제2기생들 강의가 시작된지 꼭 1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호텔에 돌아와서 방문을 여니 왠 편지봉투가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얼핏 뇌리를 스쳐 갔지만, 애써 태연한척 봉투를 살펴봤다. 국가안전보위부에서 보낸 공문인 듯 싶다. 봉투를 뜯어 봤다. ‘앞으로 1주일 이내에 우리 공화국을 떠나라’는 추방 통지서였다. 사이몬 리와 나는 아연실색치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아무리 공산 파쇼 정권이지만 이럴 수가! 밑도 끝도 없이, 아무런 죄목도 설명도 없이 그냥 떠나라니! 도대체 왜? 아니! 어쩌면 선처인지 모른다. 느닫없는 체포 구금이 아니라 그냥 떠나라니 다행인지도 모른다. 사이몬 리에게,
“뭐, 걸리는게 있습니까?”
물어 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뿐 대답이 없다. 리 순남에게 전화해 봤지만 예상데로 받지 안는다. 대충 짐을 싸고 다음주 월요일 아침, 혹시나 하고 강의실에 가 보았다. 정문 수위가 가로 막는다.

“나, 문 박산데, 수강생들 오지 않았나요?”
“아, 모르고 계셨나요? 강의가 중단된줄 아는데?”
“네 ?, 으- - 음- - “
뻔히 알면서도 확인해 보고 싶었던 내가 바보지. 이것이 공산주의 파쇼정권의 속성이라. 미련없이 떠나는 수 밖에 도리가 있는가 ? 하지만 아직 시간이 있으니 정말 마지막으로 평양 시내를 한 바퀴 돌아 보았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이몬 리는 그냥 이 길로 곧바로 떠나자고 한다.
그 길로 짐을 꾸려 사이몬 리와 둘이서 압록강을 건넜다. 용정의 한 식당에 점심 먹으러 들어갔다가 우리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일본 국민 투표에서 헌법개정이 부결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군대를 보유하게 되면 중국과 전쟁이 터진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부표가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어찌 그 한낱 뜬소문때문에 중대 결정이 좌지우지 되었겠는가? 아마도 일본인들 뇌리에는 태평양 전쟁의 악몽을 두번 다시 떠 올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따라 모리 내각이 물러나고 야당인 민주당의 요시다 내각이 들어섰단다. 미국의 배경을 믿고 삼류 정치 행태를 보이던 모리 패거리들이 보기좋게 물러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국민투표 부결과 우리의 추방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자! 이제 어찌한다?”
사이몬 리는 미국으로 가잔다. 나는 한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다. 우선 당장 살 집이 없다. 미국으로 가자니 아파트도 없고 생계 보조금도 끊긴 상태다. 보조금이야 다시 신청하면 되고 아파트는 다시 수소문 해 봐야 하지만 우선 당장 짐은 어디다 붙이며 임시 거처도 없으니 어쩐담? 사이몬 리는 자기가 도와 줄테니 일단 미국으로 가자고 한다. 하기야 쓰다 만 소설도 마저 써야하고, 무엇보다도 우선 당장 생계수단이 문제라 사이몬 리의 제안에 못이기는 체하고 일단 북경 미국 대사관으로 짐을 부치고 북경행 비행기에 지친 몸을 실었다. 대사관에서는 벌써 우리가 오는 줄 알고 있었다. 대사관에서 무려 열흘을 짐이 오도록 기다려야만 했다. 연길에서 부친 짐이 이토록 오래 걸릴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었다. 짐을 찾아서 사이몬 리가 일러주는 미국 주소로 부치고 다음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오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10 몇년간 살아 온 달라스로 향했다. 사이몬 리는 집이 워싱턴인데도 나때문에 당분간 달라스에 머물면서 나의 임시숙소 문제도 해결해 주었고 노인아파트도 얻어주고 생활보조금 신청도 도와줘서 무난히 해결되었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갔다. 어찌 생각해보면 마치 북한에 여행이라도 다녀온듯 하고 어쩌면 잠시 꿈을 꾼 것 같기도 하다.
통일은 아직도 요원한 것일까? 아니면 바로 코앞에 있는데 모르고 있는 것일까?

내가 집필하던 소설은 대충 마무리 지었지만 별 신통한 반응도 없었다. 글재주? 나의 재능이 이같이 형편 없을 줄이야? 발표하는 기관이 이름있는 문학지가 아니라서 그런가? 덩달아 교포 주간지에 기고하던 칼럼 쓰는 일도 그만 두었다.
이제는 내가 미국에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다. 생계 보조금도 나오겠다 죽을 때까지 그럭저럭 시간이나 보내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남은 생이 단 하루밖에 없을 지라도 그 짧은 여생이나마 결코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사이몬 리 와 상의해서 한국으로 가기로 했다. 서울에 아파드도 한체 사이몬 리가 얻어 주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사이몬 리가 개인적으로 얻어 준 것이아니라 아마도 미 국무성에서 후원을 해 준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직도 내가 미국에 쓸모가 있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도 내가 북한에 간 것이 도대체 미국에 어떤 도움이 된 것일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무엇인가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노리다가 실패한 것일까 ?

3, 제가(濟家)-I

이제 한국을 떠난지 18년 만에 고국에 돌아 왔으나, 우선 먼저 해야 할 일은 집안 정리일 것이다. 친구들에게도 일가친척들에게도, 심지어 자식들에게도 밝히지 않은 남모르는 고민을 가슴에 안고 살아왔다. 이제 그것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가정법율상담소란 곳울 찾아갔다. 모두들 의아한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안내에서 찾아온 사연을 말했더니 픽 웃으면서,
“저 책상으로 가 보세요”
한다. 책상 위에는 <도기종 변호사>라고 적힌 팻말이 놓여있다. 변호사는 샛파랗게 젊은이다. 내가 다가가자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상담좀 하러 왔는데요”
“아, 예 - -, 이리 앉으시지요”
하며 의자를 가리킨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일장 연설을 한다.
“선생님, 사연은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데 - - -, 애 - - -, 왠만하면 집에 돌아 가셔서 좀더 심사숙고 해 보신 다음에 다시 오시지요. 선생님 같으신 분들께서는 대부분 오래동안 같이 사시다가 사소한 말다툼으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그르치시려는 경향이 있거든요”
“나도 그렇게 보여요?”
“보나마나지요”
“이 봐! 젊은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봐! 내가 할일 없이 넉두리나 늘어놓으려 온 사람처럼 보여?”
“아니, 뭐, 저 - -“
“나를 설득시키려 하지 말게. 자네보다 삶을 세배는 더 살았고, 따라서 경험도 세배 정도 더 많으며, 모르긴 해도 책을 봐도 자네보다 세배는 더 보았을 것 아닌가? 어때? 상담좀 해 주시겠소? 변호사 양반?”
변호사는 흠칫 놀라며 머뭇거리다 불쑥 한마디 한다.
“저 -, 상담료가 - -“
나는 변호사 말을 가로 막았다.
“우리 세대는 그런거 모르네, 일이 잘 되면 내가 받을 돈이 한 10억은 되니 1활을 자네에게 주도록 하지. 일이 잘 되면 조금 더 줄 수도 있고. 일이 신통치 않으면 그때 가서 상담료만 주고 말지. 자! 어때? 내 말 들어 보겠나?”
잠시 생각해 보는 듯 하더니,
“좋습니다. 이리 오시지요”
하고는 나를 상담실로 안내한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넉두리같은 장광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39세 되던 해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아내 명의로 약국을 내어 경영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처음 한 두 해는 약국을 보는 듯 하더니 차츰 약국경영은 나에게 맡기고 약사회에 볼일이 있다며 밖으로 나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40세, 아내가 35세 되던 해에는 전문 댄서를 파출부라 속여 고용하고 본격적으로 춤을 배우기 시작했던것 같다. 어느날 파출부(?)로부터 춤을 배우는 모습이 목격 되었지만, 단순히 호기심에서 한 번 해 본것뿐이겠지 라고 여기게 되었고 그 후로는 그 파출부가 보이지 않아 그러려니 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이때부터 “약사회 간다”, “한약 배우러 간다”, “동창회다” 등등 교묘한 핑계를 둘러대며 거의 매일 나이트 크럽, 캬바레 등을 쏘다닌 것같다. 약국에 잠시도 진드거니 앉아 있지를 못했다. 한 두어시간 안절부절 하다가는 아느틈에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나는 어리숙하게도 아내의 인격을 믿고 있었다. 부모형제, 일가친척, 친지들의 체면도 있고 한데 사리분별할 줄 아는 대학 나온 여자가 그런 짓을 하고 돌아 다니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춤이라는 것이 이 나라 한국 땅에서는 묘하게도 퇴폐적으로 변하여 팔꿈치로 여자의 젖가슴을 문지르거나 무릎으로 상대방의 중요 부위를 더듬도록 추는 경우가 많다. 하여 남녀 모두 춤을 추고나면 그냥 견디기 어려워 누구의 제의라할 것도 없이 근처 호텔이나 심지어 여관 등 눈에 뜨이는 곳으로 가서 끓어 오르는 욕정을 풀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각자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렇게 해서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토끼같은 자식들이 순진하게도 “엄마 - -“하며 품에 안긴다. 아무리 탕녀요 화냥년이라 해도 이럴 때는 티끌만큼일 망정 모성애가 발현될 수 밖에 없다. 잠시나마 탕녀행각에 젖은 자신에 대한 회한이 밀려오기도 한다. 자연히 아이들에게 잘 해주게 된다. 어쩌면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감추기위해서 아이들 환심사는데만 급급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모르고 아이들은 점점 더 자기들에게 잘 대해주는 엄마를 더욱 따르고 신뢰하게 된다.

변호사가 말을 가로 막는다.
“그건 단순한 추측입니까? 아니면 구체적인 사례가 있습니까?”
“구체적인 사례가 많이 있지요.”
나는 말을 이어갔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 왜 아빠는 모르는게 없어?”
무엇이던지 물으면 알기쉽게 대답해 주는 아빠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이럴 때 왠만큼 현숙한 아내같으면, ‘응, 아빠는 머리가 좋아 책도 많이 읽고 또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잘 잊어버리지 않으니까 그렇단다. 그러니, 앞으로는 아빠 말 잘 듣고 존경해야 한다.’ 라는 정도로 대답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 엄마는,
“가정교사를 오래 해서 그렇단다”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가정교사가 뭐야?”
“돈 없고 가난한 학생들이 부자집에 들어가서 학교 공부외에 집에서 공부 가르치는 거란다. 그러니 자기 공부는 제대로 못한 거지”
이와같이 아이들에게 아빠를 비하해서 설명해 준다. 또 한번은, 큰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쪽지 시험에서 40점을 받아 왔다. 공부를 곧잘하던 아이가 이게 왠일인가 하고 깜작 놀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몇년사이 이사를 세번이나 다녔으니 환경도 바뀌고 학업 진도도 서로 달라 마음이 해이해진 것이 아닌가 해서 한번쯤 마음을 다잡아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생전 처음으로 종아리 몇대를 때렸다. 밤늦게 돌아온 엄마는 아이 종아리를 보고,
“왜 ? 아빠한테 맞았어 ?”
“응, 시험 본것때문에”
“어디 보자. 아유! 애를 잡아 놨네, 세상에! 아들아, 아프지? 세상에 애비가 이렇게 못될 수가 있나? 너 이러고도 이 다음에 아빠 제사 지낼꺼야?”
“안 지낼거야”
“너, 엄마 앞에서 다짐했다. 마음 변하면 안된다. 알았지?”
“알았어”
하고 다짐을 하게된다. 이와같은 아이들의 다짐은 대개 일회성으로 끝나기 마련이고 지나고 보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잊어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집사람은 달랐다. 뭇 남성들과 놀아나면서 남편이 자연 미워졌고 그 미움을 어린 아이들에게 수시로 토로했던 것이다. 어느듯 아이들은 제 어미에게 동조하게 되고 아무 이유 없이 아빠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제사’ 건만 해도 그 후에 수시로 ‘제사 안 지내겠다’고 다짐을 받아서 나이 40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사 안 지내겠다’는 마음은 변치 않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생이 뭘 안다고 스스로 ‘제사 안 지내겠다’는 말을 했겠는가? 설령 그렇더라도 ‘그러면 못써’라고 해야 옳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아이가 이렇게 된 것은 제 엄마가 유도해 낸 것임에 틀림 없다.

“어릴땐 그래도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겠지요?”
“안 그럴꺼요”
나는 일예를 들어 예기해 주었다.

큰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서 선산에 성묘하러 갔을 때, 집안 어르신들 앞에서 감히,
“나는 이 다음에 아버지 제사 안 지낼꺼요”
라고 당당히(?) 말했다가 그 어르신들로부터 오래도록 호되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나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남녀 어느 쪽이던 좋아하는 이가 생기면, 배우자가 극도로 미워진다. 배우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경우는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경우이고 잘만 하면 치유될 수도 있겠지만, 배우자가 미워지는 경우는 이미 파경이 온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런 경우 심하면 배우자를 독살 또는 청부 토막살인을 하는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게 된다. 참으로 다행이랄까? 내 아내는 나를 ‘죽이겠다’고까지 생각한 것같지는 않지만 그 대신 친구, 일가친척, 친지들을 만날 때 마다 남편을 헐뜯고 욕을 해 대며 돌아 다녔다. 심지어 이제 겨우 초등학교 4학년 그리고 유치원에 다니던 자식들에게까지 만날 때마다 아빠 욕을 해 대기 일쑤였다. 여의치 않을 때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옷가지 등을 사주어 환심을 산 다음에 눈물을 훌리는 쇼를 벌리기도 한다. 의아해 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약국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닌데 너희들 아빠라는 자는 빈둥빈둥 놀면서 도와 주지도 않는다”
라며 생판 거짓말을 하고 온갖 감언이설로 아빠를 헐뜻고 욕을 해 댄다. 사실은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몸이 망가지도록 약국을 보는 것은 아빠인데도 아이들은 엄마에게 깜박 속아 넘어간다. 이렇게 하여 아이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좋은 여자는 엄마요,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럽고 못된 남자는 아빠라고 머리 속에 각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즉 제 어미로부터 단단히 세뇌교육을 받은 것이며, 이같이 어릴 때 세뇌된 사고방식은 장성해서도 결코 뒤바뀌지 못하게 된다.
‘인생을 즐기자’
며 뭇 남성들과 놀아나고 있는 엄마를, 그런 줄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여자, 우리 엄마’
라고 생각하며,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오직 가족들의 생계만을 생각하며, 죽어라고 일만 하는 아빠에 대해서는,
‘이 세상에서 제일 혐오스럽고 미운 남자’
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제 세월이 흘러 큰 아이가 43세, 둘째가 38세, 셋째가 36세 장년이 다 된 오늘날까지도 엄마가 하는 일은 무엇이던 옳고, 아빠가 하는 일은 무엇이던 그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약국 경영은 중학교 정도 나오고 눈치 빠르며 장사에 소질이 있는 이들이 훨씬 잘한다. 반면 우직스러운 나의 경우는 약국 경영이란 것이 지옥보다 더 고통스럽다. 매일 아침 옆 가게의 한사장, 기사장, 서사장 이렇게 셋이서 찾아와서 박카스를 마시고,
“이 약국이란게 창살 없는 감옥이야”
라고 말하며 나를 위로 했었다. 어떤 이는 나에게,
“며느리요 딸이요?”
하고 묻기도 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나 혼자서 약국을 보는데, 어쩌다 한번씩 아내가 나와 있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다. 나는 피곤에 지쳐서 바싹 늙어 보이는데 비해 아내는 한껏 다듬고 있으니 그렇게 보였나 보다. 이무렵 아내는 약국에 어쩌다 나와 한 두 시간 앉아 있다가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러고는 밤 늦게 귀가 하거나, 아예 밤을 새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놈팽이와 제주도 여행도 다녀왔고 또 어느 작자와 일본 여행도 다녀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용수철처럼 탁탁 튀기 일쑤였고 모든 부동산 문서와 보석 등을 어디엔가 감춰두고 장농에는 춤출 때 입는 것으로(지금 생각하니) 보이는 옷이 20여벌이 넘게 걸려 있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왜 이때 아내의 일탈에 대한 어떤 단서를 포착하여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는가? 나는 어리숙하게도 ‘산골 오지마을에 무료 투약하러 몇일 다녀온다” “약사회에서 함께 여행간다” 라고 하면 고지곧데로 믿었을뿐 아니라 이 무렵 나는 뒤늦게 대학원에 다니고 석사 박사학위를 받고 또 교수자리를 구하느라 한눈을 팔거나 딴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내가 이렇게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아내는 탕녀로 화냥녀로 온갖 짓을 다 하고 돌아 다녔던 것이다. 아마도 낭비한 돈이 30년 동안 지금 돈으로 수 십억은 될성싶다. 입버릇처럼 부모님이 ‘나 쓰라고 준 돈’ ‘내가 번 내돈’ 내맘데로 쓰는데 누가 뭐라냐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내와 심하게 다투고 나서 혼자 미국행을 감행했다. 한 3년이 지나서 큰아이가 결혼한다고 연락이 와서 한국을 다녀왔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날 공항에 따라나온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요. 한국에 와서 같이 살 수 없어요?”
같이 살면서 평생 처음으로 고개를 숙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던 집이며 약국이며 모두가 자기 것이니 자기 집에서 나가라고 나를 쫓아낼 때는 언제이고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이게 무슨 말인가? 둘째 아이와 딸 아이도 이 말을 같이 들었다. 갑작스런 태도에 당황한 나는,
“미국에 벌려놓은 일도 있고-----, 하여간 가서 보고 연락하자”
그러나 그 뿐이었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방탕한 행각을 눈치첸 친정 언니가 불러 앉혀 놓고 호되게 나무라자 잠시 제정신이 들었던 것 뿐이며 금방 탕녀로 뒤 돌아 갔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잠시 돌아 온 정신을 또 믿고 있었다. 마침 아내의 회갑을 기화로 함께 크루스 여행을 친구 부부들과 함께 다녀왔다. 너무너무 좋아서 매년 가기로 하고 16년째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하나는 처음부터 나와 동침을 거부하고 따로 자는 것이다. 둘째, 값비싼 보석을 마구 사 달라고 떼를 쓰는가 하면 내 크레딛 카드로 물건을 마구 사 재끼는 것이다. 크루스 비용도 전적으로 내가 부담하는데 이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럴 때 보면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남남이지 누가 부부라 하겠는가? 그 뿐만 아니었다. 크루스 여행 가서 땐스 곡만 흘러 나오면 춤추고 싶어서 그야말로 환장을 하는 것이다. ‘환장’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간이 뒤집어진다고나 할까? 어찌 보면 정신이상자 같았다. 왠만한 여자같으면, 들통 날까봐 자제할텐데 오히려 나이트 크럽, 캬바레 께나 들락거렸다는 것을 과시하는 듯 했다. 친구가 말했다.
“한국 가서 들으니 네 마누라 춤바람 났다고 난리더라”
모든것이 자명해졌다. 탕녀! 아 - - -, 그러나 그렇다고 이제와서 어찌하랴? 이미 한세상 다 가고 나이70 이 넘은 이제 와서 - - -. 그저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자식들을 봐서도 남은 여생을 다 할 수 밖에 - - -. 그러나, 세상일은 그렇게 안이하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늙어서 하기싫어도 해야할 일이 있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2011, 4, 26일 아무도 없는 만리 타국에서 나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생을 마감하는듯 했다. 때마침 인공호흡에 대해 잘 아는 동료가 옆에 있다가 응급조치를 잘 하여 일단 소생은 되었지만, 나중에 들은 담당의사의 말에 의하면 살아날 가망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보통 건강한 사람의 심장 박동 수치가 50 이상이고, 30 이상이면 약물 조치 등으로 사는데 큰 지장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나의 심장 박동 수치는 20에 불과했다. 도저히 살아날 수도, 앞으로 살아 갈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정말이지 기적이란게 있는가 보다.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살아났다. 모두들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라고 했다.
살아났다고는 해도 건강은 말이 아니었다. 체중은 50 몇 kg 으로 20 kg 이상 빠져 있었고 다리가 후들거려 누가 부축해 주지 않으면 걸음을 제데로 걸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이 미국땅에 홀로 있기보다 그래도 큰아이가 의사로 있고 처자식이 있는 한국으로 가고져 했다. 한국에 전화 했더니 아내는 내 건강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오직 앞으로 크루스 여행 계속할 수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는 것같았다.
“앞으로 이젠 미국에 다시 못 오지 싶다”
그땐 정말 그렇게 생각되었었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태도가 180도로 돌변했다. 내가 한국에서 살 곳을 마련한다며 내가 미국에서 보낸 돈으로 저 멀리 떨어진 대전에다 방 한칸짜리 오피스텔을 얻어놓았단다. 그러고 내 도착날자에 맞추어 공항 가까운 곳에 호텔 예약을 해 놨으니 도착하면 바로 호텔로 들어가서 자고 다음날 바로 대전으로 가라는 것이다. 그 속 뜻은 ‘내 집이나 아들 집에 발도 들여 놓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몸도 제데로 가누지 못하는 환자가 가족 품이 그리워서 고국에 가는데 혼자 호텔에서 자고 혼자 저 멀리 대전으로 가라니!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도 일체 나에게 연락을 못하도록 엄명(?)을 내려 놓았고 내 전화도 일체 받지 못하게 해 놓았다. 그동안 내가 미국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심장수술을 받았는데도 아이들한테서도 일체 연락이 없다.

“예, 알겠습니다. 충분히 이혼이 성립되겠습니다. 그런데, 부인 재산은 얼마나 됩니까?”
“현 시가로 한 25 – 7억 쯤 될 겁니다.”
“재산 형성은 약국경영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까?”
“아니지요. 약국에서 나오는 돈은 모두 춤추는데 다 갖다 썼지요. 제가 회사를 그만 두고 영등포구 독산동에 골프 연습장을 개장했었지요. 82년도인가? 그것 판 돈 800만 원에 장인 어른이 보태준 300만 원을 합쳐서 흥인동에 약국을 냈었지요. 그후 지금 자리에 건물을 장인 어른께서 1,500만 원인가에 사 주셔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때 약국보증금은 건물 살 때 보탰는지 아내 혼자 몰래 썼는지 잘 모릅니다. 하여간 현 약국 건물이 현 시세로 한 7억 정도 되나 봅니다. 그러고 낙원 아파트 1012호를 장인 어른이 보태 준 1000만원과 동대문 아파드 보증금 500만원을 합쳐 제 명의로 샀지요. 그게 지금 한 2억쯤 될겁니다. 또 장인 어른한테서 돈을 빌리고 1012호 월세 보증금을 합쳐 1102호를 사고 1012호 월세는 모두 장인 어른께 드렸지요. 단순 액수로만 계산한다면 장인 어른 돌아가실 때까지 빌려주신 액수의 약 3배 이상을 가져 가셨을 겁니다. 그 아파트가 지금 한 3억 나갑니다. 그리고 장인 어른 돌아 가시고 남기신 재산을 아내 형제들끼리 분배하여 아내 명의로 소유한 월곡동 건물이 한 7억, 오피스 텔이 한 6억, 아내가 가진 현금, 보석 등 한 2억, 모두 27억 쯤 되지요”
“재판을 받아 봐야 알겠지만 유산은 선생님에게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약국 건물 7억과 1102호 3억만 공동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재산 분배로 선생님에게 5억 정도, 위자료 한 3천 만원 정도 합계 5억 3천 정도 되겠네요. 모든 것은 재판을 받아 봐야 확정됩니다”
“혹시 형사처분은 가능합니까?”
“글쎄요? 재판을 받아 봐야 알겠지만, 워낙 오래된 일이라 증명할 길도 어렵겠고 - - -, 뭐, 그보다 이혼만 성립되면 재산 분배 받고 모든걸 끝내시지요?”
“증거를 확보할 방법은 있다고 봅니다 만 - - -. 저, 혹시, 친구분 중에 검사로 계신 분이 있습니까?”
“왜요?”
“30년간 아내의 행각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ooo이란 사람이 댄스 교습료 청구 소송을 걸어 왔다. 그러니 사실 여부 확인 차원에서 자세한 행각을 알아야겠다. 뭐, 이런 식으로 제 아내 스스로 모든 행각을 진술하게 하는 것이지요”
“뭐, 그거 다 필요 없습니다. 현재 상태로 분명히 이혼 사유가 성립됩니다. 걱정 마세요”
“걱정해서 그런게 아니라, 자식들이 진실을 모르고 있으니 알려서 아이들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해서요”
“돌아올 아이들 같으면 벌써 돌아왔을 겁니다. 그만 포기하시고 운명에 맡기세요”
“마치 인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말 하네요, 젊은이!”
“법율을 다루다 보면 법율적 결론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래! 아이들을 포기하라!’ 그 순간 나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흘러 내리려는 것을 억지로 막으려고 애를 썼지만 나의 의지와는 달리 두 불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돌아올 아이들 같으면 벌써 돌아왔을 겁니다’ 란 말이 자꾸만 뇌리를 스쳐간다. 옛 어른들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절대 아이들 듣는 자리에서 부모 흉보는게 아니다’. 그래 애비 흉보는 단계를 넘어 애비를 욕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니 어릴 때부터 세뇌가 되어도 단단히 된 모양이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 ?!

(계속)

▣ 재미교포 자유기고가 (심천-민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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