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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특이하게도 남한강변 절터가 아닌 곳에 우뚝 선, 한반도 최대 크기를 자랑하는 중원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中原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국보 제6호)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21/08/08 19:28:25)

[탐방] 특이하게도 남한강변 절터가 아닌 곳에 우뚝 선, 한반도 중원 최대 크기의 충주 탑평리 7층석탑(中原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중앙탑, 국보 제6호)
-SPn 서울포스트, (마이 네임 이스) 량기룡(梁奇龍) 기자

 

▲ 애인을 만나는 설레임으로 다가간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
ⓒ20210808 세상을향한넓은창 -서울포스트 양기용

 ↑ 서울행 고속버스에서 당겨 본 국보 제6호 탑평리 칠층석탑 
↑ 충주시 홍보물 중 탑평리 칠층석탑과 수주팔봉 

 ↑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사진. 천년고탑 아래 형제 내외일까, 옷차림 분위기까지 똑같은 쌍둥이자매 내외일까, 싱글카페 회원들의 쌍쌍나들이일까. 하여간 도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 여성 둘과 매우 시골틱한 남성 둘이 띄엄띄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모양같다. 코로나로 인해 저런 인간적 거리두기가 벌어진다면?  

 

충주(忠州)라는 지명은 백제와 고구려, 신라 순으로 주인이 바뀐 이 지역을 고려 태조 23년(940) 때 고을의 중심이란 뜻의 '충주'(忠州)로 개칭됐다고 한다. 그러니까, 충주가 아니라 중주(中州)가 그 어원일 것이다. 이 중주가 중심으로, 중심(中心)이 충(忠)으로 변해을지 싶다. 결국, 충(忠)이라는 것은 마음의 중심(中+心)에서 나온다는 표의문자일 뿐, 따라서 충청이 충절의 고장, 충효의 본산, 충청도 양반 운운은 충청도 홍보하는 소리일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더하여, 난 오래전부터 이 지방 사람들을 알아  온 결과 충주,단양,제천 등지 보통사람들의 일상언어에 씹,좆이 기본적으로 많이 들어간 특징을 별견했다. 내 고향 전라도가 욕이 많다지만, 전라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 충청도 욕문화다. 다시, 이전 통일신라 시대 때는 5소경(五小京)의 하나인 중원경(中原京)이라고 해, '중원(中原)'이 유래했다. '중원 고구려비'의 기록을 보더라도 어느 지역의 '중앙'의 의의는 매우 중요했다. 중국도 중원을 차지하기 위한 역사가 그들 패권의 역사이지 않는가.    

 

최근, 제법 오래 충주에 머물거나 오가며, 덤으로 주어진 문화유산 탐방기회가 바로 국보 제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다(중원 고구려비 처럼 원래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으로 명명했으나 중원군이 충주시로 편입되면서 충주 탑평리 가 되었다(문화재는 '고유명사'이므로 옛날 명칭을 그대로 쓰는 게 옳다). 이 탑만을 일부러 탐방계획을 했었는데, 이젠 지근거리에서도 일 때문에 늦어졌고 서울을 오가는 고속도로 먼발치에서 기웃거리며 카메라로 그 자태만 담아 봤었다. 오늘 8월 8일, 이 중앙탑과 탄금대를 계획했는데 결과적으로 탄금대는 스킵, 대신 강변 십 리 정도를 걸으며 주변 중원 창동리 오층석탑과 약사여래입상, 바로 강가에 신립장군의 설화가 전해 온 중원 창동리 마애석불을 얻었다. 잠시 쉰 길 남한강에서 모터보트 수상스키를 즐기는 무리, 동쪽 탄금대 너머 충주의 주산인 계명산과 남산이 보인다. 중앙탑 3km,탄금대3.5km 이정표에서 탐방길을 마무리했던 일정.

 

시내버스편으로 공원에 내리자 비가 곧 쏟아질 것 같은 찌푸린 날씨지만 후덥지근한 더위는 여전하다. 먼저 보이는 국보 제6호 지위에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석탑, 흠모하는 여인의 주위를 빙빙 돌다가 조심스레 접근하듯 다가갔는데 그 규모에 압도당할 정도였다. 웅장함은 한반도 석탑 중 단연 으뜸으로 최대 크기다. 전에 잠깐 들러서 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어마어마한 규모지만 원형이 파괴돼 가치가 반감된 반면, 충주 중앙탑은 거의 온전한 상태.   

[* 자료: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 11호로 현재 높이 14.24m이고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석탑이다. 석탑은 거의 전면이 붕괴되어 동북면 한귀퉁이의 6층까지만 남아있으나 본래는 9층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은 1974~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에 의하여 동쪽탑은 목탑이 아니라 석탑임이 밝혀져 이른바 동서 쌍탑의 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동탑은 그 뒤 발굴조사에 의해서 9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9층(높이 27.67m)으로 복원되었다.]

 

충주 탑평리7층석탑은 국보 제6호. 높이 14.5m, 탑이 세워진 중원의 위치가 우리나라 중앙부이므로 속칭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근래 충주시에서 의도적으로 사용,홍보한 '중앙탑'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 게 타당하다. 왜, '중앙'이라는 소리는 제주도에도 있어 언제 어디서고 너무 흔해, 지금 중앙탑이라는 말이 위엄도 없고 전혀 어울리지도 않기 때문. 차라리 굳이 쓸려면 '중원탑'이 어떨까.  
 

이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7층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탑으로 알려졌고 신라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냈다고 하지만, 산속도 아니고 평지 그것도 강변에 건립돼 있는 것, 혹시 어디서 옮겨 왔을까? 인근에 절터가 있다지만 해당지역이 사지(寺址)로 추정될 만한 어떤 것도 없는 점이 특이하다. 넷상 사진에는 탑을 머리위에 올려놓거나 손바닥에 올린 탑놀이 사진도 흔하다. 

 

중앙탑면 국립 충주박물관에는 이 지역 유물도 상당량 전시돼 있으나 '탑평리 칠층석탑'이 그 모든 것을 압도한다고 보면 된다. 야외전사장 유물은, 전 유학사지 석불좌상,전 유학사지 삼층석탑,성불사 석불좌상,율릉리 석불입상,신만리 석불입상,신만리 승탑재,하구암리 석불입상,봉황리 석탑재,용관동 삼층석탑 등등.

 

이 외에도 충주지역엔 탐방할 곳이 많다. 역사성으로 국보 1호급인 중원 충주 고구려비, 남한강이 북쪽으로 흘러 한강을 만드는 충주댐 충주호 전망지, 탄금호리조트도 있고 오늘 연계할려던 탄금대도 나중,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도 보이는 수주팔봉도 물이 달아 감천이라는 달천과 함께 다니면 좋을 것이다. 수안보 내륙 깊숙한 곳에 하늘재를 잇는 미륵대원지의 미륵리 석불입상(보물 제86호)도 가치가 높지만 현재는 공사로 관람이 불가한 상태란다. (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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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忠州塔坪里七層石塔  중앙탑, 中央塔 (자료)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건립시기: 통일신라시대 

소재지: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우리나라 중앙에 건립된 통일신라의 불탑. 석탑. 국보.

 

개설

국보 제6호. 화강암 석재의 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불린다. 충주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였던 곳으로 삼국은 모두 이 지역을 전진기지로 중시해왔다.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로서 주변 경작지에서는 가끔 기왓장이 출토되고, 또한 석탑 앞에는 석등하대석(石燈下臺石)으로 보이는 8각 연화대석(蓮華臺石)이 남아 있어 이 일대가 신라시대의 절터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이곳 유적지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으므로 사찰명(寺刹名)은 알 수 없다.

 

역사적 변천

중앙탑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설화 가운데 통일신라 원성왕(재위 785∼798)과 관련된 설화는 탑의 건립시기와도 관련된다. 내용은 원성왕 때 신라 국토의 중앙 지점을 알아보기 위해 국토의 남북 끝 지점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보폭을 가진 잘 걷는 사람을 정하여 출발시켰더니 항상 이곳에서 만났기에 이곳에 탑을 세우고 중앙임을 표시했다고 한다. 중앙탑면에 있는 지명 중 ‘안반내’라는 지명이 있는데 여기서 반내[半川]라고 하는 것은 남북 끝에서 반이되는 내라고 해서 반내라고 했으며 본래는 ‘한반내’였으며 이는 한국의 반, 곧 중앙을 뜻하는 것이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1916년도의 조사에 의하면, 기단부의 일부가 파손되어 점차 기울어지고 있으며, 심할 경우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하여 다음해에 이 석탑에 대한 전면적인 해체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해체 도중 탑신부와 기단부에서 유물이 발견되어 현장에서 수습되었다.

 

탑신부의 제6층 탑신에서 기록이 있는 서류편(書類片)과 동경(銅鏡) 2점, 목제칠합(木製漆盒), 은제사리합(銀製舍利盒) 등이 나오고, 기단부에서는 청동제 뚜껑 있는 합[靑銅製有蓋盒] 등이 나왔다.

 

그리고 탑신부에서 발견된 은제사리합 안에는 유리로 만든 사리병(舍利甁)이 있고, 그 주변에 몇 개의 사리가 흩어져 있었으며 사리병 안에도 몇 개의 사리가 들어 있었다 한다. 이상의 유물들은 모두 같은 장소에서 출현된 것이나 그 조성연대에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동경 2점은 고려시대의 조성품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이 석탑은 창건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재차 사리장치의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석탑은 탑평리의 한강 중류 연안 폐사지의 높은 대지에 잘 보존되어 있다.

 

내용 및 특징

높이 14.5m인 이 석탑의 구조는 2층의 기단 위에 7층 탑신을 형성하고 그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구성한 방형중층의 일반형이다. 기단부는 10여 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축한 지대석 위에 놓였는데 상층·하층의 면석(面石)과 갑석(甲石)이 모두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것은 이 석탑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하층기단 면석은 양쪽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받침기둥) 3주가 정연하고, 상층기단 면석에는 양쪽 우주와 탱주 2주가 모각(模刻)되었으며, 상층 갑석에는 하면에 부연(副椽: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마련되어 신라식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그리고 갑석 위에는 별개의 돌로 마련된 2단의 각형 받침대가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도 하층부에서는 수매의 석재로 구성하였고 상층부에 이르면서 1매의 석재로 건조하였다. 각 층의 탑신에는 양쪽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었는데 초층은 우주가 별석으로 조성되었고 면석도 별석이며, 2매의 판석으로 조립되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우주가 모각된 4매의 판석을 엇물림식으로 조립하였거나 혹은 앞뒤 양면에만 양쪽 우주를 모각한 판석을 세우고 그 양쪽(좌우)에는 단순한 판석을 끼워서 면석을 삼았는데, 상층부인 6층과 7층의 탑신석은 1석으로 조성하였다.

 

옥개석은 초층이 낙수면부와 처마 밑의 옥개받침부가 도합 8석으로 조립되어 있는데, 상층부로 올라감에 따라 낙수면부와 옥개받침부가 1석으로 되어 전체가 2석으로 조립되었으며, 6층과 7층에 이르러서는 1석으로 되었다. 옥개받침은 각 층이 5단씩이고 옥개석 상면에는 각형 2단의 받침대를 만들어 그 위에 탑신을 받치고 있어 신라석탑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낙수면이 평박하고 추녀가 수평이며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反轉)도 잘 표현되어서 대규모의 석탑으로서는 경쾌한 탑신부를 이루고 있다.

 

특히, 전각부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창건 당시에는 웅장한 규모에 장엄도 잘 갖추었던 당대의 유수한 석탑이었을 것이다. 상륜부에서 특이한 것은 노반석(露盤石: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을 이중으로 놓고 그 위에 복발(覆鉢)과 앙화(仰花)를 구성한 점이다.

 

복발 측면에 한 줄의 띠를 돌리고 앙련(仰蓮)을 조각한 앙화석을 얹은 것은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상륜양식이라 하겠으나, 노반석 2석을 겹친 것은 아직 그 유례를 보지 못한 특수한 형식이라 하겠다. 이 노반석은 일반형과 같이 상단이 갑석형으로 되고 그 밑에 1단의 받침이 마련되었으나 그것이 신라시대 석탑에서 보는 바와 같은 단면수직단층을 이루지 못하고 안으로 굽었는데, 이러한 점은 아마도 고려시대의 보수(補修)가 아닐까 짐작된다.

 

의의와 평가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기단부와 탑신부의 세부 수법에 있어서 약식(略式)과 섬약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며, 전체적인 형태도 높이에 비하여 너비의 비례가 적어서 지나치게 고준(高峻)한 감을 주며 안정감이 적어 보인다.

 

석탑의 건조연대는 기단부에서의 탱주의 배치, 탑신 굄대, 탑신부 탑신과 옥개석 등의 짜임 등 각 부 양식수법으로 보아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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