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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태조 왕비 신덕황후 정릉(貞陵)과 원찰 흥천사,봉국사(興天寺,奉國寺)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4/08/21 23:24:59)

[탐방] 조선 최초 왕비 신덕왕후 정릉(神德王后 貞陵) 과 원찰 흥천사,봉국사(願刹 興天寺,奉國寺)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빗방울이 떨어진 늦은 오후, 북한산 자락과 쭉 연결된 신덕왕후 의 정릉 을 찾았다.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는 약수터도 있고, 녹음과 사초가 시원한 곳 ⓒ20140819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정릉 (貞陵)은 조선 태조의 왕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으로 원래 서울 중구 정동(貞洞)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던 것을 태종 9년에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으며 사적 제208호로 지정돼 있다.

신덕왕후 강씨에 대해서 태조의 계비(繼妃)로 흔히 말하지만 엄밀히 계비 나 후궁 이 아니고 그냥 태조의 비(妃) 또는 원비(元妃)다. 강씨는 이성계의 첫 부인 한씨(韓氏)와의 사이에 장성한 자녀들이 있음에도, 20살 가량 연하인 권문세가의 딸이었지만 서로 정략적으로 결혼해 방번, 방석의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짚고 넘어갈 부분 : 정황 상, 이성계는 본 부인 한씨가 있는 상태에서, 또 한씨와 좋은 관계중임이도 강씨와 혼인)

첩실인 상태의 신덕왕후 강씨는 이성계와 조선을 건국한 동지이자 동반자였고, 이성계 본부인 한씨가 1391년에 죽은 후, 1392년(태조 1년) 7월 17일 조선이 개국함으로써, 그해 8월 25일(음력 8월 7일) 조선 첫 왕비가 되어 현비(顯妃)에 봉해졌다.


조선건국 격동기가 최근 드라마 정도전 에서 구성되었지만, 조선 최초 왕비 신덕왕후 소생과 이성계의 최초 부인 한씨 소생과의 갈등은 쉽게 정의할 수 없다. 이성계라는 개인으로 본다면 강씨가 계비이고 그 자식들이 서자 이지만, 조선이라는 나라를 새로 건국한 관계로 신덕왕후와 그 소생들이 적통이다. 따라서 신덕왕후가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려고 했던 것과 여기에 동의한 이성계와 정도전의 뜻이 맞는 것이다. 문제는 이방원의 생각이었다. [첫째 한씨부인 자녀 - 방우(진안대군), 방과(영안대군, 정종), 방의(익안대군), 방간(회안대군), 방원(정안대군,태종), 방연(덕안대군), 2녀(경신, 경선). 둘째 강씨부인 자녀 - 방번(무안대군), 방석(세자, 의안대군), 1녀(경순공주)]

따라서 이는 당연히 이성계의 첫부인 아들에게 왕위가 돌아와야한다고 본 사가 나 이방원 의 생각이 틀릴 수 있으며, 1,2차 왕자(이방원)의 난을 일으켜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아버지까지 겁박한 이방원의 쿠데타로 볼 수 있다. 정도전이 이방원에 의해 살해된 것도 겸손하지 못한 오만함에 기인되어, 조선 내내 역적 누명을 썼고 아직까지 복권이 안되고 있다.

한편, 1398년(태조 7) 정종이 즉위하면서 이성계의 본 부인 '절비' 한씨를 '신의왕후'라 추존했다. 신의왕후는 1391년 혼미한 정국속에서 병을 얻어 9월 12일 55세로 죽어 경기도 해풍군(海豐郡, 지금의 개풍군, 개성시 일대) 상도면 풍천리에 장사지내졌다.

* 조선시대에 총 27대 왕과 왕비의 릉 과 묘는 총 44기. 그 중 폐위된 연산군,광해군묘 와 북한지역에 있는 제릉,후릉을 제외한 40기(능명 기준)가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제릉(齊陵) : 단릉. 조선 태조의 정비(正妃)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릉. 경기도 개풍군 소재]
[후릉(厚陵) : 쌍릉. 정종과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의 릉. 경기도 해풍군 백마산(白馬山)]


늦장마가 있어서인지 빗방울이 수시로 오락가락했다. 북한산 형제봉능선에서 통하는 보현봉도 구름속에 가물거린다. 정릉은 태종이 주도하여 천장되었고 훼철된 아픔이 있다. 왕위 다툼의 앙금으로 태종(이방원)에게 태조의 후궁으로 격하되고, 4대문밖 정릉으로 옮기면서 나온 석물로 광통교 보수공사에 써 백성들이 그곳을 밟고 지나도록했으며 천창 후 봉분도 깍아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정능은 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릉이다.)

이때 원찰로 지어진 흥천사(興天寺)도 많이 훼손되었고 1510년(중종 5)에는 불이 나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자료를 정리하다보니 흥천사는 억불정책으로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 있었던 원각사처럼 사실상 폐사되었다고 봄이 옳다. 현 흥천사는 1569년(선조 2)에 옛 흥천사 유지를 이어(?) 정릉부근에 절을 지었으나, 1794년(정조 18)에 현 위치로 옮기며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 라고 고쳤고 다시 1865년(고종 2) 대원군의 지원으로 '흥천사'라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미 정릉의 원찰역할을 무학대사가 세운 봉국사(奉國寺)가 해 오고 있었다고 하니, 세상 일이란 사실관계가 복잡한 것이 상당 부분 존재한다. 만약 누군가가 '정릉 의 원찰'을 찾는다면 나처럼 (알려진) 흥천사 만 갈 것이 아니라, 반드시 봉국사 도 들러야 할 것이다. 오늘 봉국사를 길건너 일주문만 보았던 과실로 자료사진 한 점 추가.

정릉은 북한산 군에 해당돼 곳곳 바위지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암반약수터가 있어 동네 사람들의 수시로 즐겨 찾는 곳이다. 지금은 제실 복원이 진행중. 용마산에서 봤더니 정릉계곡일대는 북한산의 절골에 해당하리만큼 크고작은 사찰이 많은 곳이어서 미아(彌阿), 미아리고개 점집들의 성업과 연계된 우리 민간신앙의 기도처로 흘러오지 않았나 생각도 해 본다. (龍)

※ 흥천사(興天寺) ← 신흥사(神興寺)

서울 성북구 돈암동 595번지,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

1395년(태조 4)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가 죽자 1396년 능지(陵地)를 현 중구 정동(貞洞)에다 정릉(貞陵)에 정하여 조영(造營)하고, 그 원당(願堂)으로 능 동쪽에 170여 칸의 절을 세워 흥천사 라고 하여 조계종의 본산(本山)으로 삼았다.

태종,세종때 왕실의 지원을 받았으나 1504년(연산군 10) 12월에 절이 불타고, 1510년(중종 5)에 전소돼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그때의 대종(大鐘)만은 덕수궁으로 옮겨져 현재 남아 있다. 1569년(선조 2) 왕명으로 현 정릉에 있었던 함취정유지(含翠亭遺址, 함취정 기념 터)로 절을 옮겼다. 1794년(정조 18) 흥천사 승려 성민(聖敏)·경신(敬信) 등의 발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신흥사(神興寺)라 하였다.

1846년(헌종 12) 구봉화상(九峰和尙)이 칠성각(七星閣)을 지었고, 1849년 성혜(性慧)가 적조암(寂照庵)을 창건하였으며, 1853년(철종 4) 대웅전(지금의 極樂殿)을, 1855년 명부전(冥府殿)을, 1865년(고종 2)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대방과 요사채를 짓고 이름을 다시 '흥천사'라 하였다. 대원군 친필 흥천사 현판이 만세루 에 남아있다.

※ 봉국사(奉國寺)

서울 성북구 정릉동 637번지,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1395년(조선 태조4) '무학대사 자초(自超)'가 세운 사찰로, 창건 당시에는 약사사(藥師寺)라 불렀다. 1468년(세조 14) 중건하고, 1669년(현종 10) 태조의 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 을 단장하면서 이 절을 원찰로 삼았다. 이 때 나라를 받드는 절이라는 뜻으로 봉국사라 하였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불에 탔으나 이듬해 청계(淸溪)와 덕운(德雲)이 중창하였고, 1898년에는 운담(雲潭)과 영암(永庵)·취봉(翠峰) 등이 명부전을 중건하였다. 1977년에는 일주문 옆에 2층 누각을 짓고 아래층은 천왕문, 위층은 일음루(一音樓)라는 종루로 삼았다.

※ 천중사(天中寺)

정릉 봉국사 옆에 있는 작은 종단의 사찰. 1900년대 초에 조성된 높이 2m정도의 마애석불입상 이 있으며, 경내에서 북한산 보현봉부터 산세가 시원하게 보인다.

※ 정릉(貞陵)


※ 흥천사(興天寺)



※ 봉국사(奉國寺)

ⓒ자료


※ 천중사(天中寺)



▲ 빗방울이 떨어진 늦은 오후, 북한산 자락과 쭉 연결된 신덕왕후 의 정릉 을 찾았다.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는 약수터도 있고, 녹음과 사초가 시원한 곳 ⓒ20140819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대한 신덕고황후정릉(大韓神德高皇后貞陵).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어필(御筆)로서 광무(光武) 4년(1900년)에 세움 ⓒ서울포스트
▲ 천중사 경내에서 본 구름속 보현봉부터 북한산 일대 ⓒ서울포스트
▲ 북향의 능앞으로 흐르는 암반 개천과 산책길 ⓒ서울포스트
▲ '興天寺' 편액은 두 개가 걸려 있다. 사진 왼쪽이 흥선대원군 친필 ⓒ서울포스트
▲ 구립가람어린이집 앞 바위는 문화재급 탑비로 보인다. ⓒ서울포스트
▲ 앞만 스쳐 지났던 삼각산봉국사(三角山奉國寺) ⓒ서울포스트
▲ 다른 종파의 천중사 마애석불입상 ⓒ서울포스트
▲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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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왕후 [神懿王后] - 자료검색 요약

1337(충숙왕복위 6)∼1391(공양왕 3). 조선 태조의 비.

개설

본관은 안변(安邊). 증문하시랑찬성사(贈門下侍郎贊成事) 한유(韓裕)의 증손이고, 증문하좌정승(贈門下左政丞) 규인(珪仁)의 손녀이며, 증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경(卿)의 딸이다.

1405년(태종 5)에 세운 제릉(齊陵)의 비문에 따르면, 그는 “천자(天資)가 현숙하고 아름다우며 곤덕(坤德)이 유순하고 발라서[正] 일찍이 용연(龍淵)에 빈(嬪)이 되어 왕업을 도와 이루게 했으며, 성철(聖哲)을 낳아서 대통을 끝없이 전하니 신이한 공과 아름다운 의범(儀範)이 옛사람과 비교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성계(李成桂)에게 시집와서 함흥 운전리(雲田里)에 세거. 1364년(공민왕 13) 이성계가 동북면병마사로서 삼선(三善)·삼개(三介)의 난을 토평한 공로로 봉익대부밀직부사(奉翊大夫密直副使)에 오르고, 단성양절익대공신호(端誠亮節翊戴功臣號)를 받자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해졌다.

우왕 대에는 포천의 재벽동(滓甓洞) 전장(田莊)에 거주했고,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때 동북면으로 피난하기도 하였다. 1391년 정국의 동요로 상심하여 병을 얻어 9월 12일 55세로 죽자 해풍군(海豐郡) 치속촌(治粟村)에 장사지냈다.

이에 앞서 1398년(태조 7) 정종이 즉위하자 11월에 절비 한씨를 신의왕후라 추존하고 1408년(태종 8)에 승인순성신의왕태후(承仁順聖神懿王太后)라고 시호를 높였다.

조선이 개국한 다음날(태조 1년 7월 17일) 한씨의 시호를 절비(節妃)라 추존. 능호는 제릉으로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에 있다. 능을 개풍으로 정한 것은 조선 건국 이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소생으로는 정종(둘째)·태종(다섯째)을 비롯, 방우(芳雨)·방의(芳毅)·방간(芳幹)·방연(芳衍) 등의 6남과 경신(慶愼)·경선(慶善) 등 두 공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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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후 [神德王后]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1356년 [1] 7월 12일(음력 6월 14일) ~ 1396년 9월 15일(음력 8월 13일))는 조선 태조(太祖)의 계비. 별호는 현비(顯妃), 시호는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이다.

상산부원군 강윤성(象山府院君 康允成)과 진산부부인 강씨(晉山府夫人 姜氏)의 딸로 본관은 곡산(谷山)이다. 조선 태조의 정치적 조언자였으며, 그의 뛰어난 지략은 조선 건국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신덕왕후는 황해도 곡산에서 고려 충혜왕때 세도를 떨친 권문세가의 규수로 태어났다. 신덕왕후의 조상은 호경과 강충으로 이들은 고려 태조 왕건의 외가쪽 선조였다.[2] 강충의 셋째 아들 강보전의 후손으로 그의 8대조 인 고려 고종 때의 문하시중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 강지연(康之淵)의 대에 다시 가문을 일으켰다.

강씨의 숙부 강윤충은 태조의 큰아버지이자 환조의 형 이자흥의 사위였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이성계와 접촉할 수 있었고 곧 그의 계비가 된다.

이성계와의 결혼

이성계가 타고난 무예와 지도력으로 그간 쌓은 군공을 바탕으로 권문세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크게 성장을 한 후 정략결혼을 하였다. 혼인할 당시 강씨는 이성계보다 20살 가량 연하였으며, 당시 이성계는 첫 부인 한씨(韓氏)와의 사이에 장성한 자녀들을 두고 있었다. 이성계와 강씨 사이에서는 방번 · 방석의 두 왕자와 경순공주가 태어났다.

이성계가 강씨와 처음 만난 일화는 유명하다. 어느 날 호랑이 사냥을 하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마침 그 우물가에 한 여인이 있었다. 이성계가 그 여인에게 물 좀 떠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뜨고나서 버들잎 한 줌을 물 위에 띄워주었다. 이에 이성계는 이 무슨 고약한 짓이냐며 나무랐다. 여인은 갈증으로 급히 달려온 바, 냉수를 마시면 탈이 날 것 같아 버들잎을 불며 천천히 마시라고 일부러 그리했다고 수줍게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내심 감탄한 이성계가 그 때서야 여인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여인의 미색이 아주 빼어났다. 여인의 지혜와 미모에 이성계는 한동안 넋을 잃었다. 바로 그 우물가의 여인이 강씨였다. 이 이야기는 고려 태조와 장화왕후(莊和王后)의 만남에 대한 설화와 동일하다. 장화왕후와 신덕왕후는 각각 나라를 세운 시조의 두 번째 부인이며 지방의 세력 있는 호족의 딸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는 점에서 와전된 것이거나, 많은 지방에서 전해내려오는 유사한 구조의 버들잎 설화가 이성계와 결부된 것일 수 있다.

조선 건국 공로

그녀는 1392년 음력 3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크게 다친 것을 계기로 정몽주가 그를 제거하려 했을 때 생모인 한씨의 무덤에서 여묘살이를 하던 이방원(李芳遠)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를 개경으로 불러냈다. 또한 이방원이 그해 음력 4월 자객을 보내 정몽주를 죽였을 때도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며 크게 꾸짖던 이성계의 분노를 무마시킨 것도 강씨였다. 이는 강씨의 수완과 결단력을 상징해주는 대목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대담성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의 개국으로 강씨는 1392년(태조 1년) 8월 25일(음력 8월 7일) 조선의 첫 왕비가 되어 현비(顯妃)에 봉해졌다.

책비와 사망

강씨는 신의왕후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와 공주들을 제치고 자기 소생의 왕자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뜻이 맞은 정도전과 정치적 연합을 하여 의안대군을 왕세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장남도 아니고, 후처 소생의 차남이 왕세자가 된다는 것을 정안대군을 비롯한 신의왕후의 아들딸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계비인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을 지명했다.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이자 가장 정치적 야심이 컸던 방원은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1396년 9월 15일(음력 8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는 몹시 애통해하며 명복을 빌기 위해 능 옆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향차를 바치게 하다가 다시 1년 간의 공사를 거쳐 흥천사(興天寺)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태조는 흥천사가 완공되자마자 그 때부터 능과 절을 둘러보는게 일상사가 되었다. 능과 절을 다 돌아본 뒤 신덕왕후와의 소생들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고, 신덕왕후의 능에 재를 올리는 절의 종소리가 나야만 비로소 침소에 들었다. 뿐만 아니라 수라 때에도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불경 소리를 들은 후에야 비로소 수저를 들어 식사를 하는 등 정성을 보였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의안대군을 포함한 신덕왕후의 아들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사위도 살해당하여 딸인 경순공주는 여승이 되었다. 태조의 마음을 사로잡고 정도전 등의 힘을 빌려 자신의 아들 방석을 세자에 봉하면서 강씨에 대한 신의왕후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와 공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그 분노는 강씨가 죽은 후에도 이어져 훗날 태종이 서얼 금고령과 적서 차별을 제도적으로 만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정릉 파괴와 복권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왕이 된 신의왕후 소생의 다섯째 왕자인 태종 이방원은, 정릉 파괴와 이전을 지시했다.[4] 자신의 소생인 어린 막내를 왕세자로 내세운 신덕왕후를 태조 사후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조가 특별히 가까이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 정릉(貞陵)을 1409년(태종 9) 당시 사대문 밖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현 위치(서울 성북구)로 이장했고,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정자각은 헐어버린 뒤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정자각 석물을 광통교를 보수하는 데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종묘의 제례에서도 신덕왕후에게 올리는 제례도 왕비로서가 아닌 후궁의 예로 올렸다. 그녀의 묘소가 훼철되는 날 많은 비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는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태종은 부왕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정릉을 도성 밖 양주군 성북면 사한리(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천장하라 명했다.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와 가까우니 도성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라는 의정부의 주청을 가납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는 태종의 의지였다.

태종은 삼사와 언관들에게 비밀리에 신덕왕후의 왕릉이 도성 밖에 있는 것이 옳은가를 묻기도 했다. 파헤쳐진 정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 복구에 쓰였으며 목재는 태평관 건축에 사용되었다. 신덕왕후의 능 앞에 세워진 원찰 역시 붕괴되어 재목으로 쓰인다.

이러한 곡절은 기록으로 전해져오다가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병풍석이 발견되면서 그 사실이 밝혀졌다. 사한리 골짜기에 있는 정릉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72년만인 1581년(선조 14년)이었다. 덕원에 사는 강순일이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아가 격쟁한 것이다.

“ 저는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를 봉사하는 사람들은 군역을 면제하는 전례에 따라주소서 -연려실기술 ”

당시 태조의 부모를 비롯한 4대 조상의 묘가 함흥에 있었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정해 묘를 돌보게 하고, 그 사람의 신분을 국묘봉사자(國墓奉祠者)라 하여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즉 조선 최초의 왕비 묘를 돌보고 있으니 군역을 면제해달라는 조심스러운 복위 제청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불거진 신덕왕후 복위 문제는 왕대를 이어가며 논의를 거듭한 끝에 1669년(현종 10년) 우암 송시열에 의해 마침표가 찍혔다.

“ 태종대왕께서는 성대한 덕과 순일한 효성이 천고에 탁월하시니 요임금이 전하듯, 순임금이 이어받듯 질서가 정연하다고 사변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으나 유독 신덕왕후에 대해서만 능침의 의절에 손상이 있고 배향하는 예가 오래도록 결손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예관이 예의 참뜻을 몰라 이렇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형식은 송시열의 상소를 현종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태종의 잘못된 조치를 바로잡는다고 할 수 없으니 모든 죄는 당시 태종을 보필했던 신하가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신덕왕후는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지고 정릉은 왕릉으로서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88년간 이어져온 논쟁이었다. 신덕왕후가 왕비로 복권되는 날에도 엄청난 비가 왔는데, 백성들은 그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하였다.

사후

사후 300년 가까이 지난 1669년(현종 10년) 8월 30일(음력 8월 5일)에야 지위가 왕비로 복위되고 신주를 종묘로 들여왔으며, 황폐하게 버려진 정릉이 복구되었다. 또한 9월 14일(음력 8월 20일)에는 존호를 순원현경신덕(順元顯敬神德)으로 추존하였고, 1899년(광무 3년) 양력 12월 19일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최종적으로 추존되었다. 현재 능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하고 있다.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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