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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사도세자 로 더 알려진 장조 의 융릉(隆陵)과 아들 정조의 건릉(健陵)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4/11/02 21:23:51)

[탐방] 사도세자 로 더 알려진 장조 의 융릉(莊祖 隆陵)과 그의 아들 정조의 건릉(正祖 健陵)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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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조(사도세자)의 '융릉'은 그의 아들 정조가 심혈을 기울인 길지 로 배봉산(拜峰山 양주,서울)에서 이장, 여기 화성(華城)의 화산(花山)자락 평지처럼 드넓은 곳에 햇볕은 잘받는 남향으로 지어졌다.
ⓒ20141102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장승배기 : 노량진2동 ⓒ서울포스트 자료

조선의 왕권쟁탈은 역사 드라마 로 충분히 재조명된 바도 있지만, 극적인 요소와 재미와 미스테리 들이 많다. (이런 것은 해방후 현재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더욱 심화돼 흥미진진하다. 이러한 '재미'는 사회가 불안정하며 상식이 들축날축해 종잡기 힘들어 이성보다 감정이 결과를 좌우하는 일면도 반영된다.)

조선 19대 숙종은 9명의 부인을 두었고 네번째 희빈 장씨(禧嬪張氏 장희빈, 장옥정)에게서 낳은 경종景宗이 즉위 4년만에 의문사(영조 세력에 의한 독살설)하자, 다섯번째 부인 숙빈 최씨의 둘때 아들 연잉군(延礽君)이 왕에 올라 조선의 국왕 중 최장수와 최장기간 재위한 영조英祖 가 된다(각 82세, 52년).

영조의 둘째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는 이선(李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 왕비로는 정성(貞聖)왕후(1692∼1757),정순(貞純)왕후(1745~1805) 등 2명과 정빈(靖嬪) 이씨(1694~1721),영빈(暎嬪) 이씨(1696~1764), 귀인 조씨, 후궁 문씨,홍씨(혜경궁 홍씨, 헌경의왕후 獻敬懿王后,헌경왕후獻敬王后,경의왕후敬懿王后, 한중록閑中錄 을 씀) 등 후궁 4명을 두었다.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었다(그 중 5녀는 일찍 사망).

첫 아들인 효장(孝章)세자는 즉위하기 전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숙종 45년(1719) 2월 15일, 9세로 요절했다(영조 4년(1728) 11월 16일).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 7년 뒤에 태어났다(영조 11년(1735) 1월 21일).

이선 은 나면서부터 매우 영특했고 글씨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짓기도 했다. 10세 때에는 이미 정치에 대한 안목이 생겨, 집권 세력인 노론들이 소론들을 처형한 정미환국을 비판하기도 하였다(경종때 경종의 지지를 받은 소론이 노론의 역모음모를 이유로 처행한 사건이 신임사화).

한편,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드라마 '동이' 참조)라는 콤플렉스 와 노론의 힘을 얻어 이복형(경종, 장희빈 아들)을 살해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소론과 가까운 사도세자는 이 소문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1749년(영조 25)에 부왕을 대신해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되자, 세자를 싫어하는 노론들과 이에 동조하는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 숙의 문씨(淑儀文氏) 등이 영조에게 그를 무고하기에 이른다.

결국 세자가 정신질환을 얻어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한 나라의 서정을 맡고서도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 그 병의 증상에 대해 그의 장인인 홍봉한은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無可指之形 非病而病 作歇無常)."고 했다고 한다.

1761년 영조는 '세자의 비행 10조목'의 상소를 받아들여 나라의 앞날을 위해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徽寧殿)으로 불러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끝내 자결 하지 않자, 그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했다. 세자가 죽은 뒤 영조는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 때는 친히 나아가 스스로 신주에 제주를 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했다. 사도세자는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莊獻)세자 로 추존되고, 1899년 고종 때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현군으로 평가받는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양주 중량포(中梁浦 현 중랑구) 배봉산(拜峰山 현 동대문구) 아래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 의 묘(영우원永祐園)를 천하제일 길지 라는 수원의 진산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해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가 다시 융릉(隆陵)으로 승격했으며, 그후 옆에 용주사(龍珠寺)를 세워 원찰(願刹)로 삼았다.

정조는 왕권강화와 그는 아버지 복권,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도를 목적으로 *수원 팔달산 동측에 '화성(華城)'과 '행궁(行宮)'을 을 건설했다. 정조의 화성행차길 노량진을 건너 쉬어 간 지점에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워라. 하나는 장사 모양을 한 남자 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자 장승을 세워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으로 하여라" 하여 두 개의 장승이 세워져 오늘날까지 '장승배기'가, 어명으로 세워진 대방(大方)장승이라하여 '대방동'도 유래되었다.
[*당시, 화성=수원. 정조가 행궁으로 건설한 '화성(華城)'에서 화성시(華城市)가 유래하였고, 수원이 화성에서 시로 독립함으로써 수원화성(水原華城)으로 부르나, 각각의 지리적 연혁을 보면 수원(水原) 과 화성(華城) 은 시대에 따라 서로 바뀌어 불린 동일 지명]

1800년 6월에 49세의 나이로 정조가 죽자 그의 유언대로 융릉 동쪽 언덕에 묻혔다가 그의 비 효의왕후가 죽으면서(1821) 융릉 서쪽 언덕에 합장되어 오늘날의 건릉(健陵)이 되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1900년에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宣皇帝)가 되었다.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 본관은 청풍)의 딸.

정조 다음의 순조는 순원왕후(純元王后, 안동 김씨 조순의 딸)를 맞으나, 외척들-특히 경주 김씨와의 싸움에서 안동 김씨가 승리함으로써 세도정치를 맞는다.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안동김씨 세력에 의한 독살설이 상당한 근거가 있다. 세도정치는 다시 풍양 조씨로 이어졌다가 여흥 민씨를 끝으로 외척에 휘둘린 조선은 멸망의 길을 걷는다.

1801년(순조 1) 행궁 옆에 정조의 영정을 모시는 화령전(華寧殿)이 건립되었고, 이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현륭원과 정조의 능인 건릉(建陵)에 전배하고 화령전에 참배하는 원행(園行)을 계속하면서 화성 행궁은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그 기능을 이어가게 되었다.

융릉과 건릉은 부자가 이웃한 부부 합장릉으로 효의 상징이 돼, 인근 용주사도 효행을 근본으로 하는 사찰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추존왕 장조(莊祖)의 융릉(隆陵)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華城市 安寧洞) 산1-1(효행로孝行路 481번길 21-1)

추존왕 장조(莊祖)
능호 : 융릉 隆陵
위치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87-39
지정번호 : 사적 제206호
조성시기 : 1789년(정조 13)

능의구성
융릉은 훗날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훗날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추존된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합장릉이면서 혼유석은 하나이다. 융릉은 세자의 묘인 원의 형식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상계 공간과 하계 공간으로 나누어 공간을 왕릉처럼 조영하였다. 병풍석을 설치하였으나 난간석이 없으며,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상계에는 능침, 혼유석,망주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계에는 문무인석,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 장명등의 8면에 조각된 매난국의 무늬는 매우 아름답다. 공간 구성 상의 특이점 중 또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영되었다고 한다.

능의역사
1762년 윤 5월 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장헌세자는 그해 7월 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1776년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여, 아버지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789년(정조 13년)에는 무덤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1815년(순조 15) 12월 15일에는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여, 1816년(순조 16) 3월 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황제로 즉위한지 3년이 되는 1899년(광무 3) 11월 12일 고종은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렸기에 융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으며 곧이어 12월 19일에는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라 하였다. 그러므로 혜경궁도 헌경의황후로 추존 되었다.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량포 배봉산(中梁浦 拜峰山 현 동대문구 배봉산)에 있었으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1789년 현재의 위치로 묘를 옮겼다.

※ 건릉(健陵)

지정종목 사적
지정번호 사적 제206호
지정일 1970년 05월 26일
소재지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 (안녕동 1-1)
시대 조선
종류/분류 왕실무덤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와 부인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1753~1821)를 합장한 무덤이다. 정조의 아버지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장조(葬祖, 사도세자)와 헌경왕후(獻敬王后) 홍씨의 합장묘인 융릉(隆陵)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건릉은 봉분 안에 2실을 갖춘 합장릉이다. 봉분을 빙 둘러 12칸의 난간석이 에워싸고 있으며, 난간석의 기둥에는 12지 방위가 문자로 새겨졌다. 병풍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봉분 앞에 상석 1좌가 있고, 그 양측에 망주석 1쌍이 서 있다. 봉분 주위로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봉분 바깥쪽으로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봉분 아랫단에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과 장명등 1좌가 있으며, 그 아랫단에는 무인석·석마 각 1쌍이 있다. 금관조복을 입고 있는 문인석은 사실적인 조각기법이 돋보인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에 정자각과 1992년 복원한 비각이 있으며, 정자각 남쪽 참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을 참도(參道)라 하는데 융릉과 마찬가지로 정자각까지 참도 좌우 양측에 박석(薄石)을 깔아놓은 것이 특징적이다. 2002년 정자각 서쪽에 수라간을 복원하였으며, 능역 남측 대로변에 재실이 있다.


※ 융릉 : 장조(莊祖, 사도세자)와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의 합장릉
▲ 융릉 에 들어가는 원대황교(元大皇橋). 고종 때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포스트


※ 건릉 : 정조(正祖)와 효의왕후(孝懿王后) 의 합장릉



▲ 장조(사도세자)의 '융릉'은 그의 아들 정조가 심혈을 기울인 길지 로 배봉산(拜峰山 양주,서울)에서 이장, 여기 화성(華城)의 화산(花山)자락 평지처럼 드넓은 곳에 햇볕은 잘받는 남향으로 지어졌다.
ⓒ20141102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대부분의 조선왕릉은 소나무 숲이 특징이지만, 여기 융릉·건릉은 참나무숲이 오히려 이색적이다. ⓒ서울포스트
▲ 융릉 에 들어가는 원대황교(元大皇橋). 고종 때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포스트
▲ 왕후 비석은 훼손 흔적으로 보이지만 전란의 총탄 자국 등으로 보인다. ⓒ서울포스트
▲ 천연기념물 제 504호 개비자나무(주목과 상록침엽) ⓒ서울포스트
▲ 보기 드문 백송(白松) 도 건강하게 ⓒ서울포스트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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