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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설날, 광화문 사거리에서 경복궁까지(향원정,건청궁 일원)②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5/02/20 11:38:39)

[탐방] 설날, 광화문 사거리에서 경복궁까지(향원정,건청궁 일원 香遠亭 乾淸宮)②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설날 찾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경복궁까지② ⓒ20150219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향원정(香遠亭)은 비(妃)나 궁녀들이 나들이 할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건청궁(乾淸宮)은 궁 안의 또 다른 궁 으로 역할을 한 곳. 건청궁은 경복궁 중건이 끝나고, 1873년 고종이 사비를 들여 짓기 시작하여 1884년부터 고종은 장안당에서, 명성황후는 옥호루에서 기거했다. 일제가 짓지 못하도록 간섭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 곳은 1895년 을미사변 때 건청궁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어, 한국 근대사에 있어 비극의 장소가 되었다. 을사조약 후 일본인들은 경복궁 안에 있던 대부분 건물을 파괴하고 1909년에 건청궁도 함께 헐었다. 광복 후 1945년 11월 건청궁이 있던 자리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들어섰고, 그 동쪽에 3단 기단을 쌓아 '明成皇后遭難之地(명성왕후조난지지)'라는 표석을 세웠다.

현재 복원된 건청궁은 자리를 이동했다. 어쨌든 곤녕합 옥호루(坤寧閤 玉壺樓) 앞에서는 가슴이 먹먹해 왔다. 비단잉어도 노니는 향원정 주변은 오늘 숨을 멎은듯 고요하다. 설날, 연못에 비치운 봄맞이 오후 햇살은 렌즈를 통해서도 아프게 눈을 찔러댔다. 가을 단풍들 때 무척 아름다운 풍경일거라 생각했는데, 마음 편하게 사진찍기는 틀렸다.

아,참! 불암산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상(저 아래 사진)은 명성황후 불심으로 조성되었다는 발원문이 화승 장엽 과 석수 5명 이름과 함께 명문으로 새겨져 있다. 직관력이 도인의 경지에 오른 필자가 보기에(ㅎㅎ), 이 보살상의 앉은 품세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인 것으로 보아, 그들은 명성황후를 그 바위에 새겼을 것으로 확신한다. (龍)

※ 을미사변(乙未事變) - 자료 추가

[1895년(고종 32)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 등이 친로세력을 없애기 위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살해한 사건.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에 대해 더욱 노골적으로 침략성을 드러내다가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기세가 꺾임에 따라, 외국세력의 동향에 민감한 민씨일파는 급히 친로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면서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친로파인 이범진·이완용 등을 중심으로 제3차 김홍집내각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이노우에(井上馨) 공사를 소환하고 군출신인 미우라를 공사로 보내 세력만회의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대원군과 손을 잡고 10월 8일 새벽을 기해 민비살해 계획을 결행했다.

미우라는 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인 정치깡패(浪人)들을 지휘,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궁내부대신 이경식·연대장 홍계훈 등을 살해한 다음, 왕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민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후 뒷산에 묻었다. 그리고 고종을 위협하여 친로파 내각을 몰아내고 유길준·서광범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내각을 수립케 했다. -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9.10, 가람기획 중]

↑ 당시의 옥호루(玉壺樓) ⓒ자료
↑ 경복궁에 있는 명성황후 조난비 [明成皇后遭難之地(명성왕후조난지지)] ⓒ자료

[주한영국영사 힐리어(Walter C. Hillier)는 사건의 현장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1895.10.11).

“건청궁의 앞뒷문을 통해 일본군의 엄호하에 침입한 민간인 복장의 일본인들은 한 무리의(조선군 복장을 한)군인들과 함께 일본군 장교와 사병들이 경비를 서 주었다. 그들은 곧바로 왕과 왕후의 처소로 돌진하여 몇몇은 왕과 왕태자의 측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후의 침실로 향하였다. 이 때 궁내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은 서둘러 왕후에게 급보를 전하였고, 왕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숨으려던 순간이었다. 그 때 흉도들이 달려 들어오자 이경직은 왕후를 보호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흉도들 중 하나가 왕후를 찾아내기 위해 왕후의 사진을 손에 지니고 있었던 데다, 그의 그러한 행동은 오히려 흉도들에게(왕후를 알아보게 하는) 용이한 단서가 되었다. 이경직은 내려친 칼날에 양팔목을 잘려 중상을 입고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었다. 왕후는 뜰 아래로 뛰쳐나갔지만 곧 붙잡혀 넘어뜨려졌다. 그 뒤 흉도들은 왕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일본도를 휘둘러 거듭 내려 쳤다. 실수가 없도록 확실히 해치우기 위해 그들은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함께 살해하였다. 그 때 왕후의 의녀(女侍醫)가(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 손수건으로 왕후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한 둘의 시신이 숲에서 불태워 지고, 나머지는 궁궐밖으로 옮겨가 처리되었다”(『주한영국영사의 보고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중]


▲ 불암산 학도암 에 있는 마애관음보살좌상. 3년전 처음 무심코 봤으나, 자료를 보다가 "저 보살은 여성의 자태이며 그렇다면 명성황후 를 모델로 새겼을 것이다"는 생각에 다시 찾았다. 학도암 마애보살상 은 명성황후의 염원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20140919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설날 찾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경복궁까지② ⓒ20150219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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