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프레지던트 데이 연휴의 일요일 오후
-SPn 서울포스트, 권종상 자유기고가
계속 비가 오다가 드디어 처음으로 맑은 일요일. 몇 주 만에 이런 맑은 일요일을 보는 지 모릅니다. 기분마저 좋아지는 그런 날. 땅이 말랐을까 싶어 론 모워(잔디 깎는 기계)를 돌렸더니, 아직 흙은 물을 많이 머금고 있군요. 그래도 이왕 시작했으니, 하면서 일을 본격적으로... 라벤더가 너무 번져서 모두 뽑아 버렸습니다. 튤립이 라벤더에 눌려 나오질 못하니. 분홍색 헤더(히스꽃이라고도 하고, 에리카라고도 합니다. 여성의 이름중에 꽃 이름들이 꽤 있지요. 로즈, 릴리... 이런 이름이 조금 구식이라면 헤더나 에리카는 그래도 조금 나중에 유행된 여자이이들의 이름이지요)가 화단을 가득 메우다시피 피었고, 벌들이 벌써부터 분주합니다. 얘들은 놔 둬야겠다.
미국에서 집을 갖고 있다는 건, 돈이 아주 많은 경우에야 사람 써서 정원관리하면 되겠지만, 이른바 '미국의 중산층'이란 사람들에게, 그것도 캘리포니아처럼 정원관리업이 멕시칸 정원사들의 경쟁으로 인해 매우 저렴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것도 꽤 돈 드는 일인데다가, 이것이 또 하나의 취미처럼 되어 버리기도 해서 일단 시작하면 이것도 하나의 중독성 있는 킬링타임이 됩니다.
원래 일요일이란 시간이 늘어지기 좋은 때인데다가, 성당에 다녀오고 나면 우선 제일 먼저 소파에 쓰러져 자기 일쑤였던 제가 정원일을 하겠다고 하자 아내는 좋아합니다. 아이팟에 큰 헤드폰 하나 끼어 들으면서 잔디도 깎고 화단 정리하고 잔디밭 가장자리를 잘라내고... 일은 많지만, 거기에 맞는 기계들이 있으니 일은 수월합니다. 미국에 와서 하드웨어 샵들을 처음 갔을 때, 왜 저렇게 잔디깎는 기계는 많은 것이며 온갖 공구가 필요한 건가 했는데, '내 집'을 갖고 나니 그 이유를 알겠더군요.
알뜰한 미국인들은 이런 공구나 연장들을 제돈 다 주고 사기보다는 중고샵이나 혹은 그라지 세일에 가서 삽니다. 그라지 세일이란 집 주인이 차고에 앉아 사람들을 맞으며 자기가 쓰던 물건들을 헐값에 내 놓는, 미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긴 한데, 특히 늦봄부터 초가을까지는 주말에 이 세일만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꽤 될 정도로 미국인들에겐 인기가 있습니다. 사실 공구에 별로 관심이 없는 저는 집에서 가까운 시어즈 백화점에서 공구와 연장, 정원일 관련 기계등을 사기도 햇는데, 아주 기본적인 것들만 샀고, 처음에 집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옆집 루디가 제게 블로워를, 그리고 이웃 데이먼이 트렌처 같은 것들을 제게 그냥 건네 주었고, 저는 감사의 뜻으로 불고기와 갈비를 재어 나눠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게 이웃들과 매우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기도 했구요.
같은 집에서 산 지 13년이 다 되어가지만, 원체 손재주가 없는 저는 이웃 루디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루디는 기꺼이 우리를 도와주고, 대신 아내가 만든 한국음식들을 즐기니 일종의 상부상조라고 해도 되겠지요. 그래도, 좋은 이웃, 기꺼이 도와주고자 하는 이웃이 있다는 것은 제 큰 복입니다.
일요일 오후, 대략 정원일을 마치고 이제사 첫 커피를 마십니다. 사실 이 피곤함의 이유엔 어젯밤 자야 할 시간을 놓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호가 발렌타인 데이라고 장미꽃 몇송이와 '빼빼로' 과자 큰 통을 포장해서 며칠을 자기 손으로 쓴(그 악필 알렉스가 알아보려나 몰라) 편지와 함께 알렉스에게 주고 싶다고 해서 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샤워만 하고 바로 데리고... 아니 모시고 알렉스의 집으로 갔고, 거기서 알렉스를 태워 이 두 어린 연인들을 인근 쇼핑몰의 레스토랑에 모셔드리고 나서 집에 돌아와서 쉬고 있었는데, 열두시가 넘어가니 이것들이 뭘 하고 있는지 연락도 없고, 살짝 전화해 봤더니 계획에도 없이 알렉스의 집에 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화 하면 데리러 와 달라고 해서 전화를 기다렸는데, 마침내 전화가 와서 시간을 보니 새벽 두 시. 그 시간까지 깨어 있는 알렉스의 부모님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며 집으로 돌아와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 평소엔 열두시쯤 잠자리에 들어 네시 반이면 일어나는 것이 완전히 생활화된 제 리듬이 깨지고 오늘은 성당 사무실에서 재정 일을 마치고 나서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습니다.
어쨌든 이 나른함을 떨쳐보려고 몸을 움직이고, 그리고 나서 커피를 마시며 이 오후의 한 때를 즐기는 것은 기분좋은 일입니다. 내일은 프레지던트 데이. 그리고 모레는 원래 비번날. 그래서 내일과 모레도 일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 리듬이 조금 흐트러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조금은 듭니다. 프레지던트 데이라고 하는 날은 말 그대로 '대통령의 날' 입니다. 조지 워싱턴의 생일과 링컨의 생일이 2월이고 열흘 차이가 납니다. 미국은 삼권분립을 처음으로 실천해 대통령제를 만든 첫 국가지요. 이들이 자기들의 대통령 제도를 자랑하는 의미도 조금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리고 이 대통령제가 다른 나라로 수출되어 어떤 식으로 변질됐는가에 대한 생각도 안해 볼 수는 없습니다. 사실 대의민주주주의란 제도가 진짜 민주적인 정치를 보장하는가를 생각해보면 여기에 대해선 회의감이 일기도 합니다. 특히 그 대통령제가 이상하게 변질되어 버린 나라들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런 나라들'을 손꼽을 때 대한민국은 절대로 빠지지 않을 겁니다.
여느 2월같지 않은 날씨는 응접실 창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될 정도의 마음의 여유를 줍니다. 뒷마당 쪽에서 들어와 응접실을 채우는 오후의 대기가 편안함을 줍니다. 잠시 답답한 생각들은 좀 옆으로 치워 놓고, 커피 한 잔의 여유에 어울리는 음악이라도 들어야겠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평소의 이 계절같지 않은 날씨가 이렇게까지 사람에게 활력을 주고, 그 덕에 저는 그만큼 즐겁게 노동을 했고, 그 덕에 조금 더 깊은 여유를 즐길 수 있으니.
시애틀에서...
▣ 재미교포, 자유기고가
(권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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