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정조 의 개혁의지 - 신도시 의 꿈 '화성행궁(華城行宮)'③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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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궁'을 지은 후 '화성'을 축조한 정조는 개혁적인 자신의 세계를 설계했으나,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고 조선은 몰락기에 접어든다. ⓒ20141116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화성행궁(華城行宮)'은 정조가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장현세자 추존)의 묘를 화성 화산 현륭원(華城 花山 顯隆園)으로 천봉 이후 총 11년간 12차례에 걸친 능행을 하면서, 여러 차례의 증축을 통해 경복궁(景福宮) 다음의 부궁(副宮)이라 할 정도의 규모와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이곳은 정조가 행차 때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소에는 부사(府使) 또는 유수(留守)가 집무소로 활용되던 곳. 조선시대에 건립된 행궁 중 규모면에서 가장 크다. 경기도기념물 65호에서 사적 제478호(2007년 6월 8일 지정)로 승격 지정되었다.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에 들어서 마당을 가로지르면 좌익문(左翊門)이 있고, 다시 중양문(中陽門)을 지나면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奉壽堂)이 있다.
이처럼 행궁이 제 모습을 갖추고 유지된 것은 정조가 특별한 포부를 펴기 위함이 정설이다. 그러나 세도정치기에 들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음으로 그의 꿈은 미완으로 끝났고 조선을 망국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결국 화성과 행궁은 완공되었으나, 개혁의 꿈은 미완으로 끝난다. 순조1년(1801) 행궁 옆에 정조의 영정(影幀)을 모시는 화령전(華寧殿)이 지어졌고, 이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현륭원과 정조의 능인 건릉(建陵)에 전배, 화령전에 참배하는 원행(園行)을 계속하면서 화성행궁은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행궁으로서의 기능을 이어가게 된다.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축조된 화성(행궁 포함)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광장을 가진 행궁은 화성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성안에 상권도 잘 조성된 모양. 여민각(與民閣) 이라는 종루 근방, 종로와 팔달시장으로 이어진 생활권에서 성(城)문화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인상 깊던 '통닭거리'은 정조가 행차 때마다 제례로 닭고기를 선호한 데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상상도 해 보았다.
눈에 거슬린 것은 화성 한가운데,행궁광장 옆에 현대계열 건설사에서 짓고 있는 초고층 아파트 다. 요건 이명박이나 새누리당 인사의 개입없이는 도저히 허가가 나지 못할 곳으로, 행궁을 복원하기 위해 막대한 혈세를 들여 전 공공건물 등을 이전한 것과 반대된 미친 개발의 하나다. (龍)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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