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l  로그인  l  회원가입  l  아이디/비밀번호찾기  l  2026.9.27 (일)
 http://www.seoulpost.co.kr/news/29312
[탐사] 인조 의 행궁지, 항몽·항청의 보루 남한산성(南漢山城)-①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4/12/21 19:30:49)

[탐사] 인조 의 행궁지, 항몽·항청의 보루 남한산성(南漢山城)-①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인조 의 성'으로 불리는 남한산성은 시대마다 치러진 전장의 최후 보루 역할을 해 왔다.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사진은 산성 4대문 중 가장 큰 지화문(至和門 남문)이나, 성문의 완성도는 떨어진다.
ⓒ20141220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이거,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멀리 북한산이 보이는 남한산성에서 '가장 의미있는 유물'로 추정되나 아무 설명없이 방치되어 있다. 매우 정교하게 가공된 석조 팔각 기단 위 원형탁자는 직경 약 2m, 두께 약 15cm, 높이 약 70cm. 해당영역(약15m*15m) 중앙부에 위치하며 식탁모양이다. 수 백년 세월에 씻긴 흔적이 역력해 인조때 연회용 진짜 식탁으로 사용되었거나, 원탁회의 장소이었거나, 사직단 처럼 어떤 단(壇)이었거나, 조선과 청나라의
▲ 다음 스카이뷰 로 찾은 수어장대 부근. 빨간 선 안 원형의 '단'이 선명하다. ⓒ서울포스트

군대에서 남한산성 하면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악명이 있다. 이제 이 성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새롭게 시민의 품으로 다가왔다.

남한산(南漢山 522m)은 경기 동북부에 도드라진 산이기에 밤보다 낮이 길다고 해 일장산(日長山)·주장산(晝長山)이라고도 한다. 한강을 기점으로 이북의 북한산(北漢山 836m), 이남에 남한산이 되었고, 아래 성남시(城南)는 '성의 남쪽'에서 이름지어졌다.

남한산 정상부에 '벌봉(罰峰)' 이라는 봉우리는 누군가가 벌을 주고 받아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돼, 군대의 영창이나 청나라에 항복한 인조 와 연관있지 않을까. 주변의 봉암(蜂巖 벌바위)은 모양이 벌같다고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문의 '벌봉'과 우리말 '벌바위'의 유사성에서 '벌'과 관련됨은 분명하다.

오늘도 야밤을 각오하고 느닷없는 맛보기 탐사는 또 동행한 녀석의 제안 때문이었다. 예전에 두어번은 성곽 주변을 걸었던 터, 늦은 김에 아예 성남에서 9번 버스를 이용하여 산성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목표는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산성 남서쪽 청량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단층누각으로 '서장대(西將臺)'라 부르던 것을 1751년(영조27)에 유수 이기진(李箕鎭)이 대 위에 2층 누각을 증축했다고 한다.

외부 정면에 ‘守禦將臺’라고 쓴 현판이, 안쪽에는 ‘無忘樓(무망루)’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증개축으로 봄)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로, 당시 '수어서대(守禦西臺)'로 부른 흔적이 '박종래(朴宗來)'라는 도장과 함께 바위 명문으로 남이 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매가 자주 날아 들었다고 해 매바위(응암鷹岩, 매봉)라 부르고 신성시했다고 한다.

남한산성은 대부분의 역사지리지에서 백제의 왕도로 기록돼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의 조선시대 지리서들이 남한산성을 백제의 고성(古城)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입증 자료는 미비한 상태.

남한산성이라는 지명은 선조 대에 자주 등장하며 조선 초기에는 일장산성, 또 672년(문무왕 12) 신라가 당의 침공에 대비하여 쌓은 주장성(晝長城)일 가능성도 삼국사기에 나온다.

그러나 무엇보다 경기도 화성(華城)이 '정조의 성' 이라면 남한산성은 '인조의 성'이라는 호칭이 붙어 있다. 광주행궁(廣州行宮) 이라고 불리는 남한산성 행궁지는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췄다고 한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한 다음, 중립외교를 포기하고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내세운 인조는 1627년 1월 후금(後金)의 제1차 침입(정묘호란 丁卯胡亂 약 2개월간)으로 강화도로 피했다가 형제지국 맹약을 맺으나 이후 군신지의(君臣之義)를 요구하자 후금과 결전의지를 불태운다. 이미 후금의 태조(청태조 淸太祖 누르하치 Nurhachi, 努爾哈赤 노이합적, 1559~1626)에 이어 2대 태종(太宗, 1592~1643) 된 홍타이지( Hong Taiji, 皇太極)는 1636년 자신을 황제에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쳐 조선을 계속 압박했다.

마침내 1637년 12월 9일 청나라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병자호란 丙子胡亂 약 2개월간). 광해군때는 청에 우호적인 반면, 인조반정 이 청태종 홍타이지 에게는 눈의가시 였던 차, 폐위된 광해군의 원수를 갚아주겠다는 심사도 컸다고 한다. 12월 14일 밤 강화로 피난가려던 인조는 이미 청군에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그러나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킴으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마침내 1월 30일 인조는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기에 이른다.

탐방로에 매우 특이한 단(壇?)을 보았다. 여기 원탁이 어떤 역할을 했던, (개인적으로) 어쩜 산성에서 가장 의미있고 중요한 사료(史料)일 것으로 사료(思料)되지만 설명이나 고증 자료가 없다. 한강과 북한산이 한 눈에 보이는 점에서 당시 국사를 논한 회의장이었을까, 왕의 연회지였을까, 청국과의 외교장이었을까, 아니면 둥근형태로 보아 하늘에 제사 올리는 천제단(天祭壇) 이었을까.

수어장대 옆에는 '리대통령각하 행차 기념식수'와 기념비가 남아 있다. 현재 표기로 '이(李)대통령'이라는 불합리한 국문법을 바로 잡아 '리(李)대통령'이 맞다. (龍)




▲ '인조 의 성'으로 불리는 남한산성은 시대마다 치러진 전장의 최후 보루 역할을 해 왔다.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사진은 산성 4대문 중 가장 큰 지화문(至和門 남문)이나, 성문의 완성도는 떨어진다. ⓒ20141220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이거,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멀리 북한산이 보이는 남한산성에서 '가장 의미있는 유물'로 추정되나 아무 설명없이 방치되어 있다. 매우 정교하게 가공된 석조 팔각 기단 위 원형탁자는 직경 약 2m, 두께 약 15cm, 높이 약 70cm. 해당영역(약15m*15m) 중앙부에 위치하며 식탁모양이다. 수 백년 세월에 씻긴 흔적이 역력해 인조때 연회용 진짜 식탁으로 사용되었거나, 원탁회의 장소이었거나, 사직단 처럼 어떤 단(壇)이었거나, 조선과 청나라의 외교담판장으로 추정된다. 무심코 넘길 문화재가 아니다. ⓒ서울포스트
▲ 다음 스카이뷰 로 찾은 수어장대 부근. 빨간 선 안 원형의 '단'이 선명하다. ⓒ서울포스트

[아래는 검색에 의존]

※ 남한산성 수어장대 (南漢山城 守禦將臺)

1972년 5월 4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 1층 면적 105.08㎡, 2층 면적 43.29㎡이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수어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며, 수어청의 장관(將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하부 구조는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쌓은 낮은 축대 위에 한 단 높여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마련하고, 맨 바깥 둘레에는 8모뿔대 주춧돌을 세우고 안두리기둥 밑에는 그보다 낮은 반구형(半球形)의 주춧돌을 받쳤다.

기둥은 모두 민흘림 둥근 기둥이고, 1층은 초익공, 2층은 2익공으로 되어 있다.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로서 고주(高柱) 위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마루보를 받쳤다.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바름을 하였고 기와골 끝에는 막새를 사용하였다.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아래층 내진의 북동쪽 칸에 설치되어 있으며, 단청은 모로단청이다. 바깥 정면에 ‘守禦將臺’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고, 안쪽에는 ‘무망루(無忘樓)’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 수어장대 (守禦將臺) - 정조대왕 글

층층 봉우리에 겹겹돌로 쌓은 한남성이여 / 層巒疊石漢南城
서장대 높직하니 군사를 주둔시킬 만하네 / 西將臺高可按兵
삼전도에 완악한 빗돌 서 있는 걸 보게나 / 請看三田頑石立
당시에 진평 같은 기묘한 계책 없었던 게 부끄럽구려 / 當時奇計媿陳平

※ 숭렬전(崇烈殿)

숭렬전은 산성의 서문 안 일장산 중턱에 있는 전각으로, 원래 백제의 시조이며 남한산성을 처음 축조한 온조왕의 넋을 기리는 초혼각(招魂閣)이었다. 여기에 인조 4년(1626) 남한산성 축성에 힘쓰고 병자호란 때 적과 싸우다가 병사한 수어사 이서(守禦使 李曙)를 함께 모시고 있다. 정조 19년(1795)에 '숭렬전' 편액이 내려졌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이다.

※ 남한산성 지화문(南漢山城 至和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의 남문(南門).
남한산성 서남쪽 해발 370m 지점에 있다. 선조 때 남문·동문 등을 수축(修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의 사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며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산성으로 피신할 때 이 문을 통과하였다. 정조 3년(1779년) 성곽을 개축하면서부터 지화문이라 불렀다.

※ 행궁(行宮)

남한산성의 행궁은 1624년(인조 2) 7월에 착공하여 1626년 11월에 완공된 조선시대의 별궁(別宮) 또는 이궁(離宮)으로, 후금(後金)의 침입에 대비해 백제 때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해 축조하였다. 유사시에 임금이 임시로 머무르던 궁궐의 하나로, 병자호란 당시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었다.

※ 남한산성 (Namhansanseong Fortress, 南漢山城)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中部面) 산성리(山城里) 남한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사적 제57호(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 1 번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築城)하였다.

《남한지(南漢志)》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沈器遠)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李曙)가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賦役)은 주로 승려가 맡아 하였다. 성가퀴는 1,700첩(堞)이고, 4문(門)과 8암문(暗門)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官衙)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다. 다만 성의 둘레가 6,297보(步), 성가퀴는 1,897보라고 하는 등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시설은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인조 때부터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 확장은 계속되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은 상궐(上闕) 73간(間) 반, 하궐(下闕) 154간이었다. 재덕당(在德堂)은 1688년(숙종 l4)에 세웠고, 1711년에는 종묘를 모실 좌전(左殿)을 세웠다. 그리고 사직단(社稷壇)을 옮길 우실(右室)도 세웠다. 1624년에 건립된 객관(客館:人和館)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되었다.

관아로는 좌승당(坐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 등이, 군사기관으로는 비장청(裨將廳)·교련관청(敎練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을 비롯한 20여 시설과 더불어 종각(鐘閣)·마랑(馬廊)·뇌옥(牢獄),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묘(溫祚王廟), 서낭당·여단(厲壇) 등이 들어서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僧軍)을 총괄하였다. 당시에 나라를 지키는 성군(聖軍)으로서의 불도(佛徒)의 힘은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산성의 축성에도 승려 각성(覺性)이 도총섭(都摠攝)이 되어 8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옥정사(玉井寺) 외에 개원(開元)·한흥(漢興)·국청(國淸)·장경(長慶)·천주(天柱)·동림(東林)·동단(東壇)의 7사(寺)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경사만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고, 여기에는 전(前)·좌·중·우·후의 5영(營)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陣)을 쳤다. 현재는 서장대(守禦將臺라고도 함) 하나만이 남아 있다. 장대는 높은 섬돌 위에 2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팔작(八作)이며 겹처마에 위층은 판문(板門)으로 막았으나 아래층은 틔어 있다. 성문은 홍예문(虹霓門) 위에 성가퀴를 두르고 단층(單層) 문루(門樓)를 올려 세웠는데, 매우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축성 뒤에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인조 14)에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和議)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役事)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NEWStory makes History - 서울포스트.seoulpost.co.kr]
서울포스트 태그와 함께 상업목적 외에 전재·복사·배포 허용 (*포털 다음 에 뉴스 송고)


관련기사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독자의견 (총 0건)
독자의견쓰기
* 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 등 목적에 맞지않는 글은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등록된 글은 수정할 수 없으며 삭제만 가능합니다.
제    목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스팸방지            스팸글방지를 위해 빨간색 글자만 입력하세요!
    

 

  게시판모음

서울포스트
 
뉴스소개 | 광고제휴 | 이메일구독 | 공지알림 | 개인정보보호 | 기사제보

신문등록: 서울 아00174호[2006.2.16, 발행일:2005.12.23]. 발행인·편집인: 양기용.
서울시 중랑구 겸재로 49길 40. Tel: (02)433-4763. seoulpost@naver.com; seoulpostonline@kakao.com
Copyright ⓒ2005 The Seoul Post. Some rights reserved. 청소년보호책임자: 양기용.
서울포스트 자체기사는 상업목적외에 전재·복사·배포를 허용합니다.
Powered by Newsbuil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