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벚꽃과 잠실 송파나루터,석촌호수,삼전도비,제2롯데월드타워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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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에 만개한 벚꽃이 오히려 이채롭다 ⓒ20140329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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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실은 잠실도,부리도 라고 불리는 송파진의 섬이었다. ⓒ자료 |
며칠 불볕같은 봄이 진행되더니 벚꽃이 활짝 피었다. 아직 흐드러질 꽃잎까지는 2,3일 걸리겠지만 3월에 만개한 경우는 매우 드문 현상이다. 겨울부터 따뜻했던 터, 잠실 석촌호수 벚꽃축제를 알리는 플래카드 에 예년보다 훨씬 앞당겨진 일정(4월 4,5,6일)이 오히려 이채롭다.
오늘은 봄비가 안개처럼 내리는 날. 현장일을 끝내고 부러 호수주변을 걷기로 작정했다. 90년대 잠실 본사에 근무할 적 나와바리 나 다름없는 곳이 여기. 현장에서는 사무실은 물론 내가 지내왔던 추억과 이력들이 훤히 내려다 보여, 일 순간 부끄러움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상전벽해,벽해상전 은 정확히 미래의 잠실을 두고 과거에 생겨난 사자성어인 양, 잠실엔 뽕밭과 누에를 치는 잠사가 많았고 푸른 물이 흐르는 강과 섬이었다. 70년대 강남개발로 매립된 잠실 사거리는 롯데월드다. 그야말로 롯데 세상이다. 롯데월드,롯데백화점,롯데호텔,롯데매직아일랜드 에 현재는 코아 가 70여층 올라간 제2롯데월드타워(123층,555미터 높이 계획)까지 가세해 놀랍도록 변화한 상태다.
이 지역은 옛부터 한강의 송파나루터가 있었고 50년대까지 배가 다녔다고 한다. 위 1920년대 지도에 보면 잠실도,부리도 라는 지명이 나오고 거기에 과거에는 삼전도(三田渡, 현 삼전동)라는 구릉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강의 본류를 막아 만든 석촌호수 서호(西湖) 입구에는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있다. 1983년 송파대로 확장때 송파구 석촌동 289-3 삼전도비 어린이 공원내로 이전하고 2010.4월 고증을 통해 당시 가장 근접한 위치 잠실동 47번지로 옮겨왔다.
현 삼전도비는 총높이 5.7m(비신 3.95m)에 이르는 매우 커다란 비석으로,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크게 만들라는 청의 명에 따랐다고 한다. 옆에 비신이 없는 또 하나의 귀부가 옮기는 장소에 따라 좌측에 있거나 우측에 따라 다닌다. 귀부가 두 개인 이유가 궁금해 자료들을 찾아 보니 '더 크게 만들라는 청나라측의 변덕' 이라는 추측이 있으나 전혀 근거가 없고, 인근 어떤 용도의 폐기된 비석의 귀부가 어느 시기 합류해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1호로 지정된 삼전도비는 조선 인조 17년(1639년12월)에 세워졌으며 당시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현재 비신에 써진 명칭)'로 한강의 높은 언덕(삼전도)위에 누각을 짓고 계단을 쌓은 단(檀)위에 세워졌다.
[※ 1627년 1월 후금(後金)의 제1차 침입(정묘호란 丁卯胡亂 약 2개월간)으로 강화도로 피했다가 형제지국 맹약을 맺으나 이후 군신지의(君臣之義)를 요구하자 인조는 후금과 결전의지를 불태운다. 이미 후금의 태조(청태조 淸太祖 누르하치 Nurhachi, 努爾哈赤 노이합적, 1559~1626)에 이어 2대 태종(太宗, 1592~1643) 된 홍타이지( Hong Taiji, 皇太極)는 1636년 자신을 황제에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쳐 조선을 계속 압박했다. 마침내 1637년 12월 9일 청나라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제2차 침입(병자호란 丙子胡亂 약 2개월간)을 해왔다. 광해군때는 청에 우호적인 반면, 인조반정 이 청태종 홍타이지 에게는 눈의가시 였던 차, 폐위된 광해군의 원수를 갚아주겠다는 심사도 컸다고 한다.]
1895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치욕스런 흉물이라 하여 넘어 뜨려 방치한 것을 1913년 일본이 다시 세우고 1916년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이 제정되자 삼전도비를 '등록번호 제11호'로 등재했다. 다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1935년 '삼전도 청태종공덕비'란 명칭으로 국보 제164호(당시는 국보,보물이 분리되지 않았음.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187번지)에 지정했다.
해방후 1955년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에서 치욕의 산물로 규정 1956년 지하에 매몰하고 1957년 고적 제147호 '삼전도 청태종공덕비지(터)'로 지정했다. 1963년 재정된 문화재보호법으로 발굴, 사적 제101호로 재분류. 1981년 '삼전도 청태종공덕비'가 '삼전도비'로, 지금은 '서울 삼전도비'로 이름돼 있다.
2007년에는 백모씨에 의해 병자호란 후 370년이 흘렀다는 뜻의 '철거 370 병자'의 붉은 페인트 글씨가 칠해진 적도 있으나, 자체만의 완성도로 본다면 한국에서 손꼽을 수 있는 예술이다. (龍)
※ 삼전도비[三田渡碑] - 브리태니커 등
1639년(인조 17)에 한강의 상류인 삼전도(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세운 청(淸)태종의 공덕비.
사적 제101호. 비신 높이 395㎝, 너비 140㎝. 이수(螭首)와 귀부를 갖춘 커다란 비. 비문에 새겨져 있는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고립되었던 인조가 삼전도에서 직접 청태종(청태조 누루하치의 8번째 아들 홍타이지) 에게 항복한 사실을 담아 세우고 이것을 대청황제공덕비라고 했다. 당시 청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울에 침입하여 삼전도에서 진을 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항복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려는 청태종의 강요에 의해서 세워졌다.
당시 인조는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땅을 찧으며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비문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오준(吳竣)이 해서로 썼으며, 여이징(呂爾徵)이 새겼다. 비의 표면 왼쪽에는 몽골문으로, 오른쪽에는 만주문으로,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사방 7품의 해서로 씌어진 우리 민족의 치욕적인 역사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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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이로드롭 의 즐거운 '아비규환'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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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를 다시 새기게 한 '서울 삼전도비' ⓒ서울포스트 |
※ 이하는 넷상 자료사진 첨부
▲ 3월에 만개한 벚꽃이 오히려 이채롭다 ⓒ20140330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잠실은 잠실도,부리도 라고 불리는 송파진의 섬이었다. 매립된 이곳에 제2롯데월드가 올라가고 있다. ⓒ자료
▲ 자이로드롭 의 즐거운 '아비규환' ⓒ서울포스트
▲ 역사를 다시 새기게 한 '서울 삼전도비'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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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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