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中初寺址 幢竿支柱,보물 제4호), 3층석탑 의 안양사지(安養寺址)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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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양 석수동 중초사지 당간지주(보물 제4호). 명문(銘文)에서 지주를 세운 연대가 확실해 중요한 사료적 가치 때문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20141010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중초사(中初寺)'도 '도피안사(到彼岸寺)'만큼 절이름이 특이하다. 도피안사(피안에 이름)야, 어디로 도피-도망간다고 내 식으로 풀어 볼 수 있지만, 중초사 는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말한 '초중'학교 뿐 생각나지 않는다.
여길 간것은 신라때 지어진 중초사터 - 보물 제4호로 지정된 당간지주 때문이 아니요, 고려때로 추정된 4층석탑이 60년대 보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근래 형태상 문제로 재심을 거쳐 보물에서 해제(보물 5호는 결번)된 것을 보기위함도 아니다.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제작연대, 경위가 명문(銘文)에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당대(800년대) 유행했던 '필체(필적)'이다. 이 글씨 형태를 꼭 확인해야 한 이유가 있다. 결국 김정희 가 낙서한 북한산비 때문이다.
800년대에 제작된 당간지주 필체는 550년대의 황초령비,마운령비 또 통일전 신라때 유행한 글자체와 동일하며, 북한산비와는 전혀 다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①. 김정희가 진흥왕순수비라고 심정해 자신의 이름을 파 놓은 북한산비는 진흥왕(550년대) 때의 진흥왕순수비가 아니다.
②. ①에서, 삼국시대때(적어도 신라의 6세기까지)는 비석에서 북한산비처럼 정교한 양식과 글씨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때다. 따라서 북한산비가 진흥왕순수비라면, 골동품 상가에 진흥왕순수비는 수 천 개 있으며, 이성계 나 고종이 스마트폰 정치를 했다는 것과 같다.
또 하나는 김정희가 심정하여 자신의 필적으로 직접 진흥왕순수비 라는 내용의 비문을 새겼다는 것은 역사날조로 밖에 볼 수 없다.
③. 설령, 진흥왕과 관련이 있다면, 다른 시대, 다른 장소(예, 남천주, 현 이천지역)에서 제작돼 설치된 것을 어느 시대에 옮겨 놓은 진흥왕순수 기념비 정도다.
종합해서, 북한산비는 진흥왕순수비가 아니며, 김정희 검증이 맞다고 가정해도 비석을 제작해 세운 년대는 적어도 통일신라 후기(800년 쯤) 이후로 봐야한다는 내 주장이다.
여기 중초사지는 승악산(僧岳山) 아래라는 기록이 있다. 오랜 생활을 한 주민의 말에 의하면 이 일대에 절이 많았다고 해 현재 *삼성산(三聖山)을 포함한 관악산(冠岳山)이 '승악'이다. 지금도 인근에 호압사,삼막사 등이 성업하고 있어 북한산의 정릉계곡,도봉산의 도봉계곡처럼 이 개천을 낀 계곡이 절골에 해당한다.
[*삼성산(三聖山)은 관악산의 한 줄기로 신라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潤筆) 등 세 명의 성인(聖人)이 암자를 지어 정진했다하여 이름 지어진 산으로 삼막사(三幕寺)의 기원도 이때로 기인한다. 또 한국 카톨릭과도 인연이 있어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세 명의 신부 성 앵베르, 성 모방, 성 샤스탕 등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곳 =자료]
터를 쭈욱 둘러보면서 기와 명문에 안양사(安養寺)가 나와 안양사터라고도 하는데 아마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사찰명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고, 500m여 떨어진 곳의 국내 유일한 마애종(磨崖鐘)도 여기와 연관이 있을 지 싶다. (龍)
※ 안양 석수동 중초사지(安養 石水洞 中初寺址) - 자료 등
안양 석수동 중초사지는 옛 유유산업 부지로 안양예술공원 부근 현재는 김중업박물관내에 있으며 절터의 당간지주(安養 中初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4호,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와 고려 삼층석탑(安養 中初寺址 三層石塔 처음엔 보물 제5호였다가 재심 탈락 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 그리고 곳곳에서 고려·조선시대의 기왓조각들과 자기편, 그리고 청동제 유물 등이 상당수 발견된 곳이다.
기록 등을 보면 당시 중초사가 중앙에 있는 황룡사(皇龍寺)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종교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 당간지주는 제작 년도가 명문되어 있는 국내 유일의 당간지주이며, 명문에 신라 흥덕왕 1년(826년)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났다고 쓰여있다. '중초사'지라고 하는 것도 명문에 따른 것. 통일신라시대 창건되어 조선 후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 안양 석수동 중초사지 당간지주(보물 제4호). 명문(銘文)에서 지주를 세운 연대가 확실해 중요한 사료적 가치 때문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20141010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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