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충익공 신경진(忠翼公 申景禛) 묘역과 신도비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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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랑구 망우동 산 69번지 1호 에 있는 신경진 신도비. 귀부와 이수가 특이한 예술적 구도이며, 귀부는 한국내 최대일 듯. ⓒ201506029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북한산성 잘록한 허리를 타고 넘어가는 해를 찍는다고 며칠을 왔다갔다하다가, 오늘은 북쪽 망우산으로 가던 중 용마랜드 쯤에서 포기하고, 전에 걸었던 참나무숲으로 내려왔다.
그 길에서 몇 번이나 비각까지 있는 평산 신씨(平山 申氏) 종중 묘역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으나 담장 넘어로 힐끗힐끗 넘보기만 했었다.
전처럼 곧장 내릭말 길로 갈까 하다가, 배드민턴장을 끼고 좌회전해 오던 길로 가기로하고 돌아선 순간, 오래된 비석이 눈에 확 들어왔다. 와.. 이수(옥개석)가 다른 석물과 달라 보이고 비신이 흰색계통이다. 다가가다가 엄청난 크기의 귀부에 또 한 번 놀랐다.
'충익공 신경진 신도비'는 이렇게 서 있다. 연혁을 보니 신립(신입) 장군의 아들이고 인조의 총애를 받았다. 신도비 사진을 찍으며 귀부의 용머리를 멋지게 표현한 걸작으로 생각되었다.
아마, 한반도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 - 이 만큼의 크기를 처음보니 - 로 생각된 지방문화재 도, 보물로 승격하거나 보물급으로 보호해도 전문가들로부터 이의가 없으리만치 완전하다. 귀부만 폭 2m 이상, 길이 4m 이상, 높이 1.5m이상이며, 신도비석은 2m 정도.
귀부는 이제껏 본 것(사진 이미지 포함) 중 가장 크며, 용 두 마리가 틀고 있는 옥개석(이수)의 정교한 아름다움, 비석의 재질, 귀부 용머리의 우락부락하고 강인한 모습,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양은 매우 특이하며 예술적 완성도도 높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나, 신경진 장군과 밀접한 인조의 굴욕적 항복으로 만들어진 삼전도비 는 비석 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청태종이 조선에서 가장 크게 만들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여기 귀부는 삼전도비의 몇 배나 됨으로써 청태종의 조선 폄하의지를 암묵적으로 꺾기위해 엄청난 크기로 만들었을 것, 이라는 내 개인적 생각. 그러나 찬찬히 보면 귀부,비석,옥개석(용머리)가 각기 다른 연대에 제작되었거나 조합된 정황이 보인다.
사료에 보니 서인 계열의 신경진(등)은 인조반정의 주역이다. 광해군을 폐위했기에 인조 의 총애를 받았고, 반정 후 광해군은 강화도유배-태안-강화도(교동도)-제주도를 거쳐 죽는다. 광해가 다시 교동도 왔을 때 그를 눈엣가시로 본 신경진은 경기수사에게 '선처'라고 하면서 죽이라는 암시를 주었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그를 보호했다고 한다.
정변으로 불리는 중종반정과 달리, 인조반정은 세조의 단종폐위처럼 무력으로 정적을 제압하고 왕까지 교체한 반란이다. 또한 신경진도 그렇겠지만 인간의 삶은 여러 면을 형성하고 조선에서 특히 광해군만큼 격동의 시대에 여러 면에 걸려 평가해 볼만한 왕도 드물다, 명청 교체기였으니. (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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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익공 신경진 신도비(忠翼公 申景禛 神道碑) : 자료 등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5호.
시대: 조선 숙종 10년(1684).
소재지: 서울 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산 69번지 1호.
"이 비는 조선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무신 신경진의 신도비 로서 숙종10년(1684)에 세워졌다.신경진은 임진 왜란때 충주 탄금대 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도순변사 신립 의 아들이다.
선전관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오위 도총부 도사로 임명된후 무과에 급제 하였다.
인조 반정의 성공으로 신경진은 정사공신 1등으로 되어 병조 참판등을 엮임하고 인조14년(1636)에는 훈련원 호위청,포도청의 3대장을 겸 하였다.
병자 호란때의 공직으로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640년 평성 부원군에 임명 되었다.인조20년(1642)청나라의 요구로 최명길이 파직되자 그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퇴 하였고 이듬해 다시 영의정으로 임명된지 열흘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비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거북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으며,비몸 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용머리 장식까지 완전한 상태로 세워져 있다. 높이는 3미터 로서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박태유가 글씨를 썼으며 머리글인 두진은 이정영이 썼다.
* 신경진(申景禛)
1575(선조 8)∼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평산(平山)
관련사건: 임진왜란, 이괄의 난, 병자호란
평산부사, 병조참판, 형조판서, 병조판서, 좌의정
자는 군수(君受). 서울 출신. 기묘명신(己卯名臣) 상(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화국(華國)이고, 아버지는 도순변사(都巡邊使) 입(립 砬)이다. 경유(景裕)·경인(景禋)의 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임진왜란 때 전망인(戰亡人 : 전쟁에 참여하여 죽은 자)의 아들이라 하여 선전관으로 기용되었고, 오위도총부도사로 전보되어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태안군수·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가 되었으나 일본과의 화의에 반대하고, 왜사(倭使)의 접대를 거부하여 체임되었다.
이어 갑산부사를 거쳐 함경남도병마우후(咸鏡南道兵馬虞候)로 전보되자, 체찰사 이항복(李恒福)의 요청으로 경원부사와 벽동군수가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파(大北派)가 정권을 장악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중 1620년(광해군 12) 김류(金瑬)·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구인후(具仁垕) 등과 모의, 그와 인척 관계에 있는 능양군(綾陽君 : 仁祖)을 추대하기로 하였다.
그 뒤 기회를 노리다가 1622년 이귀가 평산부사가 되자 그 중군(中軍)이 되기를 자원하여 거사 준비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어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으로 쫓겨나 1623년의 인조반정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다.
반정 직후 왕의 특명으로 공조참의·병조참지에 임명되었고, 곧 병조참판이 되어 훈련도감(訓鍊都監)·호위청(扈衛廳)·포도청의 대장을 겸하여 왕실 안전의 책임을 맡았다.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 때 제일 먼저 반정계획을 세웠다 하여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일등공신(奮忠贊模立紀明倫靖社一等功臣)에 녹훈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1624년 (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는 훈련대장으로 어가(御駕)를 호위하였다. 평정 후 역도에 의하여 추대되었던 흥안군 제(興安君瑅 : 선조의 열째아들)를 처형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공을 믿고 탐오(貪汚)하여 남의 집터 수천칸을 빼앗아 이 때문에 언관의 탄핵을 받았다. 1635년에는 목릉(穆陵)·혜릉(惠陵)의 봉심관(奉審官)으로 보수를 소홀히 하여 파직당했다가 곧 복직되어 형조판서에 훈련대장을 겸하였다. 1636년 병조판서를 겸하도록 했으나 질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수하의 군사를 인솔하여 적의 선봉부대를 차단,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여유를 주었으며, 청나라와의 화의 성립 후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637년 좌의정 최명길의 추천으로 우의정이 되어 훈련도감제조를 겸했는데, 이 때 난 후의 민심수습책을 논하고 수령의 임명에 신중을 기할 것을 개진하였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돌아와 좌의정으로 승진하자 영의정 최명길과 의논하여 승려 독보(獨步)를 은밀히 명나라에 파견,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그간의 사정을 변명하도록 하였다.
1641년 다시 사은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구금되어 있던 김상헌(金尙憲) 등을 옹호하였다. 1642년 청나라의 요구로 최명길이 파직되자 그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다가 병으로 사퇴한 후 이듬해 재차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열흘도 못 되어 죽었다.
무인가문 출신의 손꼽히는 장재(將材 : 장군이 될만한 인물)로서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 주도하여 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항상 훈련도감·호위청 등의 친병(親兵)을 장악했으며 왕의 신변을 책임졌다.
상신(相臣 : 삼의정 즉,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을 이름.)으로 있으면서 특별히 이루어놓은 시책은 없으나, 외교 교섭에 능해 청나라의 과도한 징색(徵索)과 잦은 내정 간섭을 철회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반정 후 서인이 훈서(勳西)·청서(淸西)로 분열하자 김류·이귀·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 등과 함께 훈서의 영수가 되었으나 무신임을 들어 조정의 시비에 간여하기를 극력 회피하였다. 또한 송시열(宋時烈) 등의 사림을 천거하고 장용(奬用 : 장려하여 등용)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공을 믿고 탐오한 면도 있어 식자층의 비난을 받았다. 무인이면서도 김류·이귀·최명길 등의 문인들과도 널리 교유했는데, 특히 김류와는 선대의 인연(瑬의 아버지 金汝岉은 申景禛의 아버지 砬의 從事官으로 충주에서 같이 전사하였다.)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651년(효종 2)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고 송시열이 찬한 신도비문이 전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신경진 [申景禛]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신립(申砬, 1546년 10월 23일 ~ 1592년 4월)
묘지: 경기도 곤지암
충청북도 충주시 인근에서 전사
별명자: 입지(立之),
시호: 충장(忠壯)
삼도 도순변사지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평안도 병마절도사, 삼도도순변사주요
참전: 임진왜란
사후에 의정부영의정 으로 추증.
신립(申砬, 1546년 10월 23일 ~ 1592년 4월)은조선 시대의 무신이자 장수로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도총부와 진주판관, 임진왜란 첫 해에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펼치고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군이다. 신숭겸의 후손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입지(立之)라 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인조반정에 가담한 서인 신경진과 신경인형제의 아버지이며, 신경희의 옥사로 죽은 신경희의 숙부이다.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인 해공 신익희에게는 13대조가 된다.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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