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강화도 기행② - '용흥궁(龍興宮)', '성공회 강화성당(聖公會 江華聖堂)'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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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종이 왕이 되기 전 19세까지 살았던 집, '용이 나왔다'는 뜻이 있는 '용흥궁(龍興宮)' ⓒ20120625 세상을 향한 넓은 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용흥궁(龍興宮)
조선 후기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던 집(잠저潛邸),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번지에 소재하며 인천유형문화재 제20호.
용흥궁은 원래는 초가였으나, 1853년(철종 4)에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지금과 같은 집을 짓고 '용이 나왔다'는 의미로 용흥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잠저구기비각 1동, 내전 l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이며,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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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령으로 철종
철종(본명이 이원범)은 고조부가 영조, 증조부가 사도세자였다.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언군(이인)의 아들 이광(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3남으로, 아버지가 모반 사건에 휘말려 가족 모두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순조의 양자가 돼 헌종에 이어 철종으로 등극한다. 한성의 반가에서는 그를 비꼬아서 강화도령이라고 불렀다.
은언군은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출궁되어 제주도 유배 뒤 복권돼 한양으로 왔으나 역모에 휘말려 강화도에 유배되어 탈출하려다가 체포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신유사옥)가 일어나자 그의 처와 며느리가 천주교를 신봉하여 청나라에서 건너온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이에 은언군도 가족이 천주교에 빠지도록 방치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탄핵되었으며 마침내 사약을 받는다.
부모와 장형, 누이가 잇달아 사망하는 불우한 가족사를 겪은 이광(李壙)은 유배지 강화도에서 곤궁한 생활을 보내다 1841년 사망하였다. 1844년 큰아들 이원경은 민진용(閔晉鏞)에 의해 왕위에 추대하려는 모반 사건에 휘말려 사사되었고 일가는 모두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강화도로 이배되어 살게되었다. 3남 이원범은 산에서 나무를 하며 행상을 하거나 농부으로 살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기에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 순조의 비, 본관은 안동, 영안부원군 조순祖淳의 딸)에 의해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라 1851년(철종 2)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비로 맞아들임으로써 순원왕후 수렴청정 하에 안동김씨의 세도가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 삼정의 문란(三政紊亂)으로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세 가지 재정 행정을 둘러싼 정치 부패가 심해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난다.
철종은 세도정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강화도에 살 때 혼인을 약속한 양순(또는 분이)이라는 처녀를 그리워하다, 술과 궁녀로 방탕한 생활을 하다 33세에 후사없이 하직한다.
1857년(철종 8) 순원왕후가 죽자, 안동김씨와 반목하던 조대비(풍양 조씨, 신정왕후神貞王后, 순조의 세자인 익종翼宗의 비)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죽은 후, 조대비는 이하응(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이희,이명복)을 양자로 맞아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고종이다. 조대비는 고종을 보잘 것 없는 여흥 민씨 자영과 혼인시켜 그간의 세도가들의 전횡을 일소하려고 하지만 결국 민씨 세도정치기를 거치며 오비이락으로 조선왕조는 황후와 황제의 비극적 죽음과 함께 나라에 한을 남기고 폭싹 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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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회 강화성당 ⓒ서울포스트 |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
침략전쟁의 승리로 얻어진 것은 단연 영토와 자원이며 종족의 번식이다. 그러기 위해 침략자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종교와 문화의 전파다. 지구상 어떤 나라건 이건 예외가 없다. 전쟁이 우선이냐 종교와 문화가 우선이냐는 상황에 따라 그 순서가 바뀔 수 있다.
강화도를 둘러보자니 종교의 전시장이나 각축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단연 많은 것이 기독교 감리교다. 이날(6월 25일) 마니산에서 내려오는데 중턱쯤 기독교 선교장(기도원)에서 인근 교회의 집단 성회가 있는 날이어서 신도가 바글대며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그런가하면 천주교성당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초기 천주교도들이 전파가 용이한 해로로 강화도를 택했던 것도 사실. 우리나라 최고 사찰인 전등사(傳燈寺)는 고구려 때 아도(阿道)가 창건(381년)했으며 다수의 보물이 있는 곳이다.
강화도 성공회성당은 한국의 전통 한옥과 성공회의 교회 양식이 혼합되어 건축되었다. 태극문양이나 종을 보면 불교적 양식을 살려 우리 정서에 쉽게 다가왔거나 우리가 경계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포교 방식일 수 있다. 전체는 배를 타고 들어왔다고하여 '범선'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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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7월 16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1월 4일 사적 제424호로 변경되었다. 보호면적은 6,452㎡이며, 성공회유지재단 등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성베드로와 바울로성당’이라고도 한다. 1896년(고종 33) 강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1900년 11월 15일 이곳 강화에 한국 최초의 성당을 세우게 되었다. 건립자는 한국 성공회 초대 주교인 존 코르페(C. John Corfe:한국명 고요한)이다.
정면 4칸, 측면 10칸 규모의 2층 건물로, 목골조를 사용하고 벽돌을 쌓아올린 기와집이며, 2층은 바닥이 없는 통층구조이다.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을 본떠 지은 것으로, 외형상으로는 불교 사찰 분위기를 풍긴다.
한국에 서양건축이 도입되던 시기의 초기 건축으로,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 목조건물이면서 지붕과 내부구조는 한국적 건축양식을 많이 가미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한국 토착화를 뚜렷하게 상징하는 듯하다.
1910년대까지 강화 지역 선교의 중심이 되었으며 성공회 신학교인 성미가엘신학교가 이곳에 설립된 이후 성공회 한국선교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한국인으로서는 첫 성공회 사제가 된 김희준 신부를 배출하였다. (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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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령 수 백년의 회화나무 외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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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흥궁공원에서 옆이 보이는 성공회 강화성당 과 거목 ⓒ서울포스트 |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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