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강화도 기행① - 항몽의 보루 '고려궁지(高麗宮址)','강화산성(江華山城)'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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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문 가는 길에서 본 고려궁터라는 곳. 고려의 흔적은 없다. ⓒ20120625 세상을 향한 넓은 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강화도는 고려말, 조선말 왕국의 몰락을 예고한 '전쟁터'이기도
(2012년 6월 25일,월)
'강화도(江華島)'는 삼국시대에는 '혈구도(穴口島)'라고 불렸고 고려때부터 강화도라고 했으며, 몽골(Mongolia, 蒙古 몽고)과 전쟁때는 도읍으로 '강도(江島)'라고 불렀다. (사실상 몽고에 항복한) 개경 환도 후 삼별초가 항몽정권을 강화도에 수립했으나 얼마후 진도로 남하했다.
고려는 2차 몽고침략(고종 18년,1231)에 대항하기 위해 고려 고종 19년(1232) 최우의 건의로 도읍을 강화도로 천도했다가 원종 11년(1270) 몽고와 강화조약을 맺어 39년의 강도를 청산하고 개성으로 환궁한다.
한반도의 혈구에 해당해 '혈구도'였음을 증명한 혈구산(穴口山 466m)은 강화도 정중앙에 있으며, 마니산(摩尼山 469m) 이 있는 고가도(古加島)가 강화도로 합해지기 이전에는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강화도를 몇 년 전 차로 뱅뱅 돌면서 사통팔달한 길과 높은 산들로 섬이라기에는 꽤 넓은 곳임을 알았다. 역사에서 수없이 등장한 강화도지만 개인적으로는 먹고살기 바쁜데 그것을 고증할 기회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려산 진달래에 환호하지만 그 곳 홍릉(고려 고종)과 당시 고려 상황을 연계산 고려산이란 이름을 떠올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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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업으로 간 강화도 ⓒ서울포스트 |
오늘은 생업으로 네시 반에 서울에서 출발, 강화군청앞에서 오전 9시 이전에 일을 마치고, 온 김에 마니산까지 오르기로 작정했다. 고려궁지에 가서 관광지도를 펼쳐보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강화고인돌 공원, 고려산에 홍릉, 그리고 고려왕비의 가릉,석릉,곤릉, 선원사지(팔만대장경판각성지), 이규보 묘, 유명한 전등사(傳燈寺), 석모도의 보문사(普門寺), 동막해변, 끝없는 갯벌, 외포리해안선, 손에 닿을듯한 북녘땅... 가 볼 곳이 너무 많았다. 고려궁터와 마니산은 이번에, 다음번엔 오토바이킹으로 둘러봄이 효과적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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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포스트 |
고려궁지(高麗宮址),고려궁터
'고려'는 삼국시대때 고구려의 '고려'를 국호로 채택해 사용했다. 고구려는 장수왕때 국호를 '고려'로 고쳤으나 고구려로 표기한 것은 고려와 구분 짓기 위함이다.
현재 고려궁(高麗宮) 터로 알려진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번지 자리는 고려궁지로 추정될 뿐, 궁터였다는 역사적 근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몇몇 출토물로 확신을 가지고 발굴을 계속하지만 미답인 상태.
이는 당시 개성으로 환도하면서 몽고와 화친 조건으로 궁터를 철저히 해체한 것이 사실이지만,
추론하기로는 조선시대들어 관리소홀이나 의도적 방치였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는 대륙국과 형제국,군신국 관계를 가진 적이 있지만 여말의 요동정벌론이 말하듯 근본적으로는 그들과 대립관계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건국을 조건으로 '왕'을 쓰며 군신관계로 조선을 유지한다. 정책도 고려의 불교정신을 배제하고 고려 흔적을 지우는 데 치중했다. 그 결과 500년 고려 역사는 삼국시대 역사보다 보잘 것 없이 기록돼 있고, 도읍이 이북에 있었던 관계로 고려유적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홀한 감도 있다. (=기자 주관)
따라서 관청리 궁터에는 고려의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 또 '마니산 남쪽 흥왕리(興旺里)에 옛날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조정이 개경과 같은 왕도를 만들 때 지어진 이궁이 있던 흥왕리궁터(흥왕이궁지)라고 불리는 곳'[≪문헌비고≫에는 “고려 고종 46년에 교서랑(校書郎) 경유(景瑜)가 말하기를 ‘대궐을 마니산에 세우면 가히 나라의 복조(福祚)를 늘게 하리라.’ 함에 명령하여 이궁(離宮)을 그 산 남쪽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때는 마니산이 고가도(古加島, 현 화도면)라는 섬이었다. 1664년 강화도 유수인 조복양이 강화도의 가릉포(嘉陵浦)와 고가도의 선두포(嘉陵浦) 사이에 둑을 쌓아 강화도와 고가도를 연결한 것으로 전해져, 고려때 섬이었던 고가도의 작은 섬마을 흥왕리도 조정이 있었던 이궁터라고 하기에는 근거가 미약해 보인다.
고려궁 터를 들러보며 작은 규모에다 안내문에 써진 - '궁터의 유구가 정확하지 않다'는 생각에 솔직히 김이 빠져 버렸다. 조선때 썼거나 지었다는 관청 - 강화유수부 이방청(江華留水府吏房廳),강화유수부 동헌(江華留守府東軒),외규장각(外奎章閣),강화동종 - 사이로 유치원 아이들만 무심하게 재잘댄다. 고려 유적지에 조선의 경복궁이건 지금의 청와대건 아무리 번들나게 지어봐야 선대의 고터가 확실하다면 후대의 것들은 빛을 잃게 마련이다. 역사란 그렇다.
게다가 요즘 드라마 '무신'으로 새롭게 조명된 강화 고려궁지에 황제(이승효)도, 최우(정보석)도, 김준(김주혁), 송이아씨(김규리), 최양백(박상민), 이규보(천호진)도 와 보지 않았단다. 이 드라마는 과거 무인시대에 이어 고려말 무신정권을 다룬 것, '무인시대'가 초기 무신막부(武臣幕府) 외면을 다뤘다면, 이번 드라마 '무신(武神)'은 내면을 다룬듯 김준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으다. (고려사에 기록된 김준은 승려출신이 아닌 최충헌가의 노비로 최우를 받들어 최항(?~1257)을 도와 최씨정권을 이어가지만, 최항의 병사후 그의 서자 최의(?~1258)가 막부 권좌에 오르자, 최의를 제거하고 자신이 도방의 최고 실력자가 된다. 그후 무신정권을 마감하고 왕권에 동조하여 문하시중에까지 오른다.)
그러고보니 우리 역사에서도 왕권보다는 신권시대가 있었고, 이는 오늘날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영국과 일본 등의 (국)왕제,이원집정제,내각제 등의 체제였다고 볼 수 있다.
고려는 화친으로 개성 환궁 후 거의 몽고의 지배체제에 들어간다. 왕의 칭호도 그들이 지어보냈다. 몽고풍이 유행했고 여몽연합군이 왜구 정벌을 할 당시 머문 합포로 인해 (마산)몽고간장이 근래까지 유행했다. 우리 역사에서 몽고의 간섭이나 사실상 지배는 100여 년동안 계속되었다.
몸이 작아 기병을 앞세워 세계를 놀라게 했던 몽고가 현재는 약소국으로 전락해, 우리나라에 온 몽고인이 몽고애들 이라고 하대받기도 하지만, 위구르족을 닮은 외형과 고기 많이 먹은 유목인들이기에 몸집이 장대해져 노가다판에서는 한국사람 두 몫은 한다.
강화산성(江華山城)
고려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晏波樓), 북문인 진송루(鎭松樓), 서문인 첨화루(瞻華樓) 동문인 망한루(望漢樓)가 남아있다.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32호로 지정. (문화재청)
자료들에 의하면 강화도는 삼국시대에도 한강과 더불어 중요한 지역이었지만 고려 뿐만 아니라 조선 때는 연산군,광해군 등의 유배지로, 정묘호란 때에는 인조가 피신했다가 청나라에 항복을 했던 터로 한반도의 근대적 역사의 산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양종교의 전래도 빨라 영국의 성공회성당도 건재하고 천주교로 인한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에 의궤(儀軌) 등이 약탈되어 최근 돌아 온 경우도 있고, 미국의 신미양요, 일본의 강화도조약 이 차례로 일어난 곳이며 6.25때는 많은 양민이 학살되기도 했다. 강화도는 고려말, 조선말 왕국의 몰락을 예고한 역사의 전쟁터로, 한 편 고단했지만 한 편 신문물의 태동지가 분명하다. (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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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유수부동헌(江華留守府東軒)의 명위헌(明威軒)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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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규장각(外奎章閣)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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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굴현장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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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유수부이방청(江華留水府吏房廳)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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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동종(江華銅鐘)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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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문길 수령 650년 된 은행나무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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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문-진송루(鎭松樓)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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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멀리 황해도 개풍군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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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른쪽 '고려산'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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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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