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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내 사색의 공간이었던 '보성녹차밭(다원)'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3/06/01 23:33:34)

[단상] 내 즐거운 사색의 공간이었던 '보성 녹차밭(다원)'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일제때 보성 차밭은 고온다습(안개) 지역인 회천면 일대에 조성되었다. 봇재 근방 원형의 계단식은 제1다원, 거기서 10리정도 떨어진 일림산 아래 평지를 제2다원(아래 사진)이라 부른다. 사진은 자료
ⓒ자료사진

녹차는 달마대사가 수행할 때 눈꺼풀이 무거워 자꾸 졸음이 왔다는데, 이 차를 마시자 정신이 맑아지고 졸음도 달아나 눈이 번쩍 뜨였다 - 졸지 않았다, 수행하여 득도했다,는 중의적 표현 - 는 데서 중국 사람들이 범용하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하긴 달마대사 눈두덩은 유난히 크며 두텁기도 하다.

녹차는 절기상 곡우 이전에 딴 여린 '줄기 끝부분의 잎'을 최상품으로 친 '우전차(雨前茶)'를 시작으로 곡우차(穀雨茶), 작설차(雀舌茶: 잎모양이 참새 혀 같다고해서 붙여진 이름) - 세작(細雀),중작(中雀),대작(大雀) 등 따는 시기가 기본인 비발효 차다(반면 홍차는 발효 차 로, 중국 등 아시아 에서 영국으로 싣고 가던 중 썩어가는 과정에서 발견한 녹차의 변형식품).

녹차는 색(色)과 향(香)과 미(味)가 우선이다. 그러나 처음 이 차를 접할 때 미각에서 실망한 나는 지금도 커피를 더 선호하고 당시 생잎을 끓여 먹다 설사까지 했으니, 나와 연대가 억수로 안맞는 식품이다.

그럼에도 침체기의 부흥을 생생히 접한 녹차의 준원조가 친구와 나 라면 지나친 비약이겠지만, 국민학교 때 소풍을 다닌 다원(茶園)에 다시 들어선 것은 1987년 무렵이었다.

군 제대 후 공고출신 난 공대를 때려치고 의대를 목표로, 상고출신 친구는 법대를 목표로 공부했으나 둘 다 떨어지고 생활고로 낙향하는 신세가 되었다. 친구가 얻은 일자리는 성업공사 경매물건 관리직으로 몇 지역을 오가다 보성다원 산속에 있는 김가공공장으로 발령되었다. 산너머 차밭 중간에 콘크리트 건물 속 녹슨 기계만 덩그러니 놓여있던 곳, 계곡 도랑옆 오두막이 숙소였다.

6개월정도 같이 생활하다가 친구는 이것저것 볼 것없이 서울로 직장을 잡아 떠났다. 직을 승계받은 나는 며칠만에 식량을 가지러 읍내 집을 오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때 실어증이 걸렸을 정도로 텅빈 산 속 사람하나 구경할 수 없는 비문명의 공간. 봄이면 소쩍새 날고 밤이면 부엉이 울어대는 오두막에 기거하며 계절별로 느끼는 남해다도해의 풍광과 차밭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기도 했다.

산마루 폐허가 된 밭에서 잎차를 따 외지인에 매각되어 겨우 명백만 유지한 차공장에 팔아 용돈도 벌어 쓰고, 뒷산 중턱 꿀벌치는 아저씨도 가끔 만나고, 사냥을 하거나 저수지로 낚시를 가고, 무료하면 한밤중에도 율포 바다가로 달려 내려갔다. 새벽까지 촛불아래서 바쉴라르 를 읽고 늦잠을 자거나 흔들의자에 누워 오수를 즐겼었다. 군불을 지펴놓고 룻소 를 옆구리에 낀 석양의 산책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포구는 환상이었다. (사람들은 바보들이다. 이 아름다운 곳을 놔두고 다른 지역으로 여행다닌다니...)

▲ 제2다원에서 내려보이는 득량만과 득량도 ⓒ서울포스트
▲ 제1다원에서 (오른쪽 멀리 일림산, 그 남쪽 아래 제2다원이 있다) ⓒ서울포스트

2년쯤 흘렀을 무렵, 몇몇 단상들을 모아 서울 로 무작정 상경했다. 신춘문예출신 친구가 출판사에서, 또 한 친구는 대형 서점에 근무했으니 출판업계 취업을 목표로 민족문학작가계열 문인행사도 접하면서 추천 등단 기회도 있었으나, 문학적 부족함도 함께 느꼈다. 전문분야 공부가 부족한 내가 추구하는 세계는 그때까지 우리 토양에 없는 회화,음악을 포함한 종합예술 쪽이었으며, 문학에서는 시,소설,수필,희곡,평론이 믹스 된 포스트모던 형식을 취했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보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것이면서 저것이고, 이것 같기도하고 저것 같기도 한 '멀티','잡탕'이라는 말이 어울렸는데, 요즘 고상한 말로 격을 높힌다면 '융합'이랄까?

오지랖 넓게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하던 중 금융기관에 취직해 부러움없는 생활을 시작했다. 사실 우리나라 경기 급팽창기가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로, 그때 사무자동화를 포함한 사회구조적 시스템이 갖춰지기 시작해서 한전,통신공사,사회보험기관 등에 막대한 인력이 소요될 때였다. 친구는 차 유통을 한다고 쓸만한 직장을 관뒀다. 당시 오랫동안 소외된 녹차 판매 및 홍보에 나도 휴일이면 친구 도우미로도 나서던 중, 녀석 사업은 탄탄대로에 올라섰다.

1997년 11월, 만혼에 신혼여행을 필리핀으로 갔는데 공항에서 860원 정도하던 1달러가 갔다오니 1200원 대, 다시 며칠 후에 2000원 근저리까지 치솟았다. IMF때 수입 커피를 대신할 녹차가 건강식품으로 재조명 받으며 친구는 돈방석에 앉고, 이듬해 주식으로 깡통을 찬 나는 퇴직하고 길바닥에 앉은 실격인간 상태가 되었다.

지인들의 권유로 나도 녹차를 만질 기회는 있었으나 친구와 동종업을 피하고 싶었으며, 한다면 그때까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2차가공식품에 관심만 있었다. 이를테면 녹차국수, 녹차라면, 녹차호떡, 녹차된장, 녹차음료... 이런 식이었다.

어쨌든 보성녹차는 관주도의 홍보까지 곁들여져 다향제에서 녹차떡도 선보인다고 하니, 당시 불모지였던 내 사색의 공간은 잘나가는 관광지로 대한민국 사람들 입에 리스트업 되게 된 것이다. 참 다행인 일 아닌가. 한 때 했던 개인사업 상호가 '다향(茶香)', 지금의 '서울포스트'가 녹색 이미지 를 띤 것도 그때 미학적 관점으로만 어설프게 기록한 녹차에 바탕이 있다.

만물이 기를 뻗히고 있는 유월. 지금 고향 다원(茶園)에 쏟아지는 햇빛은 녹색 찬란하게 부서질 때다. (龍)

(- 누가 물어봤냐고요?!)
(- 아니라우!!)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
▲ 한참 뒤 찾았던 율포해변 ⓒ서울포스트
▲ 1997년 11월 필리핀 보라카이 해변에서 철모른 한 때. IMF는 나만 겨냥했는지,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는 국민교육헌장 과 '나라의 망함이 나의 망함의 근본'이라는 생각도 교차했다. ⓒ서울포스트
▲ 산속 생활공간에서 본 천포 앞바다와 고흥반도 일출 ⓒ서울포스트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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