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8년만에 찾은 레이니어 산, 그리고 지구의 위기
-SPn 서울포스트, 권종상 자유기고가
휴가 마지막 날, 집에 막 들어온 참입니다. 사실 저는 내일 휴가가 하루 더 있습니다만, 사실 휴가인지 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보내게 될 겁니다. 오후에 아버지 모시고 병원에 다녀온 후, 저녁엔 아내와 저녁을 먹으러 갈 겁니다. 사실 내일, 그러니까 7월 27일은 저희 결혼기념일이고, 올해로 19주년이 됐습니다.
어쨌든 아이들 뒤치닥거리 덕분에 제대로 못 즐긴 휴가이긴 했어도, 때때로 적재 적소를 찾아 다녔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오늘은 여자친구와 냉전 내지는 내전 중인 지호는 떨어뜨려 놓고, 지원이와 엄마 아빠, 그리고 동서와 처형, 지민이와 이빈이가 함께 산행을 다녀 왔습니다.
아주 멀지 않으면서도 식구들이 적당히 걸을 수도 있고, 또 깊은 자연의 멋을 함께 만끽할 수 있는 곳, 우린 그런 곳으로 레이니어 산을 꼽았습니다. 그리고 보니 몇년만인지도 모르겠군요. 기록한 것을 보니 2008년에 마지막으로 들렀었습니다. 그러니 7년만에 처음이네요. 올해 산행에서 아쉬웠던 것은 눈을 별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눈이 남아 있기에 레이니어라는 이름보다는 '눈산'이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리웠던 이 산에 눈이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 하나의 공포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마 올해 겨울에도, 어쩌면 스키장은 영업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미 지난해 워싱턴주의 스키 산업은 눈이 내리지 않아 큰 타격을 입어야만 했습니다. 천혜의 스키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들이 널려 있는 워싱턴 주에서 눈이 내리지 않아 스키장을 일찍 폐쇄한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 이젠 어쩐지 다반사가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미 수퍼 엘니뇨의 내습은 기정 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을 정도니까요.
이 산에서 발원하는 많은 하천들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쌓인 눈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미국 본토에서 5번째로 높은 레이니어 산은 알래스카를 포함한 미국 전체에서는 17번째의 높이의 산이지만, 1년 내내 눈이 쌓여 있습니다. 빙하가 열 몇개가 있지만, 이중 적지 않은 수가 계속되는 고온으로 인해 급속한 속도로 줄어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국 등 에너지 소비량이 높은 국가들이 만들어 낸 온실 효과와 엘 니뇨가 만나면서 어쩌면 우리가 채 다 알지 못하는 재앙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써 버리는 에너지는 열과 이산화탄소의 형태로 변해 지구를 덮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구를 데웁니다. 지구는 이로 인해 깨어진 균형을 스스로 맞추려 합니다. 우리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거대한 태풍이나, 엄청난 규모의 국지적 허리케인, 해수 온도의 급격한 변화 등은 어떻게 보면 '어머니 대 자연'이 이 지구에 원래 주어져 있던 질서를 있는 그대로 지켜내기 위해 우리에게 가하는 회초리질일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 이기적이고 멍청한 인간들이 그 메시지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대자연의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숲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이빈이와 저를 놀래켰던 사슴이며, 처음 찾아보는 수천년의 나이를 자랑하는 나무들의 흔적이며, 그 거대한 나무들에 매달린 이끼들 같은 것은 신비하기조차 했습니다. 햇빛이 찾아들어오기가 힘든 고목들 사이엔 이끼로 커튼이 내려져 있고, 그 사이에서 뛰노는 짐승들과 새들, 그리고 내 목소리를 다 삼켜버릴 것 같은 그 숲의 고요함과 적막함. 아직도 숲의 정령들이 마법을 부려 그들을 지킬 수 있는 충실한 맹수들이라도 소환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휴가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아, 파라다이스 인이라는 베이스 캠프 겸 호텔 숙박시설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레이니어 산 서쪽에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입구에 닿기 전, 산의 서쪽 엘베라는 마을에서 조금 더 산 쪽으로 들어가다보면 고철과 죽은 나무 등을 이용해 만든 예술품들을 전시해 놓은 엑스 니힐로 공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 '이전엔 아무것도 아니었던' 이라는 뜻으로, 정말로 쓰레기들로 전락할 것들을 이용해 만들어낸 예술품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만일 이곳에 오실 분들이라면 꼭 들러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정말로 쓰레기가 어떻게 예술품이 되었는가를 보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주인장 부부의 진보적인 생각도 함께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우리나라의 정치 역시 고철 쓰레기와 같은 상황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것들로부터 새로 예술을 창조시켜야 할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인내만이 아니라, 무한의 상상력, 그리고 그로부터 이어지는 발상의 전환... 이런 것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아무튼, 올해 첫 휴가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남기고 이렇게 지나갑니다.
시애틀에서...
▣ 재미교포, 자유기고가
(권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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