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l  로그인  l  회원가입  l  아이디/비밀번호찾기  l  2026.10.26 (월)
 http://www.seoulpost.co.kr/news/29653
[중국기행] 4편 - 자금성, 영화 '마지막 황제' 그 감동의 무대
 나종화 객원기자 (발행일: 2015/01/27 20:27:59)

[중국기행] 4편 - 자금성, 영화 '마지막 황제' 그 감동의 무대
-SPn 서울포스트, 나종화 객원기자



​▲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의 즉위식이 열렸던 자금성의 심장 태화전
​▲ 자금성을 구성하는 자주색과 황금색은 절대 불가침의 권위 상징합니다.
​▲ 폭 50미터의 해자 외금수하는 황제와 백성의 세계를 완전히 분리하는 경계선입니다.
​
자금성에 들어서면서 영화 [ 마지막 황제 ] 한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

자금성을 지키는 경비원의 아들인 어린이가 자금성 궁궐 보좌에 앉은 허름한 인민복차림의 노인에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건넵니다.
​ “ 아저씨 거기는 출입금지 구역인데 들어가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 보좌에 앉은 노인은 어린이를 향해 여유롭고 인자한 표정을 지어보입니다.
“ 허허~~ 그래 아저씨는 예전에 여기서 살았던 사람이란다. 그래서 오랜만에 앉아보는 거니 걱정 말어라. ” 그러면서 푸이는 어린시절 몰래 숨겨 두었던 귀뚜라미 모형을 찾아 어린이에게 건넵니다.

1988년 개봉된 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의 한 장면입니다. 아카데미상 9개 부문을 휩쓸면서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지요. 자금성은 마지막 황제 푸이와 더불어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덕분에 세계인들은 스크린을 통해서 중국 역사와 예술이 집약된 자금성을 속속들이 드려다 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금성은 일약 세계적인 명소로 떠오르게 되었구요.

은둔의 제국 중국이 서구 영화사에게 자금성 로케이션까지 허용 한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관광객 출입을 통제하고 몇 주에 걸쳐서 촬영을 진행 했는데, 때마침 중국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조차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문화부 차관이 배우로 출연하고,엑스트라만 해도 무려 19,000명이 동원되었다고 하니, 중국은 자신들을 서방에 알리는 수단으로 이 영화를 십분 활용한 거죠. 결과는 대 성공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계기로 서구인들은 중국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으니까요.

개봉 당시 해외 체류중이라서 저는 이탈리아에서 관람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훗날 다시 TV에서 본 것 같은데, 내용은 가물가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에 어떻게든 구해서 다시 보려 했는데 아직까지도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ㅠㅠ

이번에 가장 큰 기대감을 품고 간 것도 역시 영화, [ 마지막 황제 ]가 촬영된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안문을 통과하여 자금성을 향해 다가서는데 짜릿한 전율이 온몸으로 번지더라구요. 어지간한 곳이 아니면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천안문을 빠져나오니 또 다른 문이 기다리고 있네요. 상서로운 문이라는 의미의 서문(瑞門)입니다. 가이드 말로는 서문은 왕조시대 건물이 아니라고 하네요. 서문을 통과한 다음 인파로 가득 찬 회랑에서 잠시 대기 합니다. 거기서 부터는 입장권을 끊어야 들어갈 수 있거든요. ​

각이 잘 잡힌 붉은 벽체 위쪽에 촘촘하게 들어선 붉은 기둥과 황금색 지붕을 하고 있는 누각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여행자를 내려다봅니다. 자금성의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오문(午門)입니다. 옛날 조선 사신들도 여기서 황궁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동안 저와 비슷한 감회를 느꼈을지 모르겠습니다.
​

5000년 중국 역사와 문화가 하나로 집약된 고궁 박물관, 자금성 ​

원어로는 쯔진청( Zǐjìnchéng 紫禁城 )이라 하지요. 애초부터 이 궁궐은 황제의 권위를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습니다.

자금성은 이름 그대로 벽체도 기둥도 죄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짙은 자주빛입니다. 자주색은 어느 민족에게나 고결함과 고귀함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색이잖아요. 고대 로마에서도 자주색 염료는 황금의 열배 정도 비싼 가격으로 거래 되었다고 합니다. 지붕은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황금색이구요. 오히려 이 두 가지색의 단순한 조합이 자금성의 카르스마를 더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자금성은 길이 960미터 폭 750미터 직사각형의 공간에 엄청난 양의 석재를 깔고 그 위에 무려 800여개의 목조 건축물과 9000여 칸의 방을 배치한 역사상 가장 큰 궁궐이 아닐 싶네요. 높이 10미터의 성벽이 궁궐을 둘러싸고 그 바깥으로 폭 50미터의 해자가 빙 둘러있어 외부 세계와 궁궐을 완벽하게 차단합니다. ​

내부를 드려다 볼까요? 태화전을 비롯하여 나란히 서 있는 여섯 개의 대전을 중심으로 부속건물들이 좌우대칭을 이루며 뻬꼭이 들어서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좌조우사(左祖右社)라 하여 임금의 보좌 방향 왼쪽에는 사직의 제사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선왕들에 대한 제사와 관련 된 건물이 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전조후침(前朝後寢), 앞쪽에는 황제의 집무와 관련된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들어서 있고, 뒤쪽으로는 황제의 사적영역 즉 교태전같은 빈궁과 후궁의 처소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건물은 음양오행과 풍수지리적인 조건을 따르고 있구요. 그래서 자금성을 50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중국의 문화와 역사가 집약 된 고궁 박물관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

제국의 심장부 태화전 ​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자금성의 남쪽 정문역할을 하는 오문(午門)을 지나면서 구중궁궐속으로 조심스런 발걸음을 내 딛습니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내수금교 건너편에는 지나온 오문에 비해서 훨씬 규모가 커 보이는 태화문이 하얀 대리석 기단위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군요. ​

태화문을 지나자 널따란 광장과 더불어 중세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 건물인 태화전이 묵직하고 우람한 모습을 하고 우뚝 서 있습니다. 중국의 황제들은 이곳에서 조선. 일본. 몽골. 베트남. 태국. 티벳. 아라비아등 주변국들의 사신들을 접견하여 연회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황제의 목소리를 듣고 말고 할 것 없이 태화전 마당에 서는것 만으로도 주눅이 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양 옆으로 붉은 갑주에 기치창검을 든 수천 명의 근위병들이 도열해 있을 경우에는 오금이 저리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당시의 자금성을 아주 속된말로 표현한다면 중국의 주변국에 대한 후까시? ㅎㅎ

조선의 경복궁 근정전만 해도 대단한 규모인데, 태화전에 비해서는 쫌 거시기 합니다. 어떤 개념 없는 가이드가 중국 관광객들에게 근정전을 자금성 화장실 정도 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가 SNS에서 몰매를 맞은적 있었잖아요. 한중일의 문화재를 중립적 시각으로 바라본 유럽 여행 작가 상당수가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일본의 황궁은 물론이고 자금성에 비해서도 한수 위로 꼽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자금성을 다녀온 그 다음 주에 일부러 창덕궁에 다녀왔는데 제가 봐도 우리 쪽이 훨씬 더 아름답고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건물들이 눈에도 쏙 들어오면서 사람 사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ㅎㅎ 한가지 덧붙힌다면 자금성은 인간의 공간이 아닌 권력을 위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말이죠.

막강한 권력을 가졌지만 생활은 불안했던 자금성의 황제들​

블로그에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유적지 여행의 가장 큰 묘미는 그 공간을 스쳐 지나간 시간과의 교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인물, 사건 그리고 시대상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합니다. 또 하나의 조건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시간에 구애받지 말아야 합니다. 지식도 부족한데다 일정에 쫓기느라 깊이 드려다 볼 수 는 없었지만 태화전 석조 기단위에서 광장을 내려다 보면서 자금성을 처음 건설한 주인공인 명나라 3 대 황제 영락제를 생각했습니다. 명나라를 창업한 남경을 출발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왕조에 대한 구상을 실현시킨 대역사의 결과물인 자금성에 도착한 첫 날, 아직 칠 냄새가 가시지 않는 태화전 보좌에 앉아 저 광장을 가득 채운 만조백관의 하례를 받으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 탄 것 같은 불안한 기분으로 “ 살고 싶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그러니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저 이리 승냥이떼들을 밟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본인 스스로가 조카를 몰아내고 개국 공신과 충신들을 척살하고 쿠테타로 황위를 찬탈한 주역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겉으로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자금성이지만, 자세히 드려다 보면 영락제를 비롯해서 이곳을 거쳐 간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들의 불안한 숨결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듯 합니다. 자금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생쥐 한 마리 함부로 얼씬거리지 못하는 난공불락 요새입니다. 후원 일부를 제외하고 자금성 내부에는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하 수 미터까지 돌덩어리가 채워져 있다고 합니다. 자객이 나무에 숨거나 땅굴을 파고 들어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랍니다. 그런가 하면 특수제작 된 전각벽돌로 궁궐의 주요 통로를 깔았다네요. 주변이 어수선해서 직접 느낄 수 는 없었지만, 고요한 밤에 그길을 걷게 되면 특유의 소리가 난답니다. 게다가 황제들은 잠자리를 숨기기 위해서 십여개로 구분된 각각의 침실에 황제를 대신해서 아바타를 재웠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자객을 막기 위한 방편이었겠지요.

역사를 드려다 보면 지구상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인구가 많은 제국 대명과 대청 황제들은 자금성에서 살면서 늘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황제 주변에는 충신 보다는 빨대를 꽂아놓고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간신배들과 대놓고 황제자리를 노리며 침을 흘리는 정적들로 득실거렸으니까요. 겉으로 충성을 맹세하지만 속이 뻔이 드려다 보이는 황실 종친이나 똑똑한 신하들은 물론 피를 나눈 형제와 자신의 아내와 그리고 자식들 심지어는 어머니까지도 황제에게는 경계의 대상이었으니까요.

​다시 자금성의 상징으로 부활한 마지막 황제 푸이 ​​​

태화전을 떠나기에 앞서 다시 광장을 내려다봅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보았던 푸이의 장엄한 즉위식 장면이 떠오르네요. 시간이 흘러 같은 장소에 쓸쓸한 표정으로 서 있는 청년 푸이가 오버랩 됩니다. 1912년 신해혁명을 끝으로 숱하게 왕조를 바꾸어가며 50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오던 중국의 군주제는 종지부를 찍습니다. 그래도 푸이는 1924년까지 12년을 더 자금성에서 기거하게 되지요.

푸이가 우울증을 앓았다는 기록이 있던데, 그것은 대부분의 궁녀와 환관들 그리고 신하들이 떠나간 텅 빈 자금성에서 겪어야 했던 사무친 외로움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한 군벌에 의해서 자금성에서 쫓겨난 푸이를 주목한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이었습니다. 한반도에 이어 대륙을 집어 삼킬 야욕에 불태우던 일본은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우고 푸이를 데려다가 허수아비 황제로 앉힙니다. 일제가 항복하고 난 다음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서 전범으로 잡혀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송환되어 공산당에 의해 이루 말할 수 모욕과 없는 고초를 겪게 됩니다.

중국의 황제보다 더 막강한 권력의 정점에 오른 마오쩌뚱이 그런 푸이를 보면서 연민을 느꼈을 까요. 그의 선처에 의해 푸이는 1959년 구금에서 풀려납니다. 그리고 정원사로서 또 중국 공산당 간부로 일하면서 1967년 신장암으로 사망할때까지 비교적 편안한 여생을 보냅니다. ​

그가 공산당에게 구금되어 있던 시절에 ‘내 죄악의 전 반생’이라는 자아비판 반성문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이 글은 훗날 [ 나의 전 반생 ]이라는 책으로 출간되구요. 그 내용이 이탈리아 영화감독 베르나르도 배르톨루치에 의해서 1988년 영화 [ 마지막 황제 ]로 부활한 거지요. 그래서 푸이는 다시 자금성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아쉬움을 남겨두고 떠난 자금성 ​​​​

줄곧 혼자서 자금성을 둘러보던 저는 황후가 기거했던 교태전 앞에서 일행들과 합류했습니다. 자금성 북쪽으로 높이 100미터 가량의 동산과 더불어 전각이 보입니다. 자금성 궁궐 정지작업과 해자에서 나온 흙을 쌓아 올려 조성한 인공산이라네요. 그걸 보니 15년 동안 150만 명을 동원한 대 역사의 규모가 비로소 짐작이 됩니다. 자금성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그곳도 여행 일정에 옵션으로 포함 되어 있었는데, 가이드는 도리질을 치네요. 이것이 바로 패키지 여행자의 비애입니다. ㅎㅎ 다음에 오게되면 이른 아침 경산공원부터 올라가서, 새벽안개에 덮여 있는 자금성을 보고 싶습니다. 시간에 쫓긴 탓일까요.

황제의 정원 어화원을 구경하고 북쪽 정문인 신무문을 통해서 자금성을 빠져 나와 궁궐을 둘러싼 해자 외금수하 천변을 걷는데 살짝 현기증이 느껴지네요. 불과 두 세 시간 만에 중국의 현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를 한꺼번에 넘나들었잖아요. 이 대단한 공간을 너무 대충 훑어 봐서 정말 아쉬웠습니다. 다음에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금서의 건축물과 유적에 담긴 예술성을 음미해보려 합니다.




▲ 천안문을 통과하여 중정에 들어서면 또 하나의 문이 기다리는데 서문입니다.
▲ 서문을 지나면 또 문이 나타납니다. 실질적인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입니다.
▲ 오문은 완벽한 기하학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어, 자금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왕조시대때는 이곳 광장에서 출정식을 비롯한 각종 기념식이 열렸다고 합니다.

▲ 오문과 태화문 사이에는 인공강이 흐르고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조각된 내수금교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 자금성은 마치 대리석 조각품 전시장을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 자금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태화전으로 들어가는 태화문은 그 규모가 지금까지 통과한 문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 자금성의 심장일 뿐만 아니라 제국의 심장이었던 태화전에서 황제의 즉위식이 열리고 외국 사신을 맞아 연회가 열렸습니다.

▲ 태화전 열병식 삽화
▲ 태화전 주변의 부속건물들
▲ 태화전으로 올라가는 대리석 기단은 황제를 상징하는 화려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 궁궐 주변에는 수많은 놋쇠 향로가 놓여 있었습니다. 무슨 용도였을까요. 조명?
▲ 태화전에는 황제의 보좌를 구경하기 위한 관람객으로 북적였습니다.
▲ 황제의 보좌입니다. 계단도, 기둥도 온통 용 문양이었습니다.

▲ 고구려 벽화 사신도에 등장하는 현무가 아닐까 합니다.
▲ 농업 국가인 고대와 중세의 중국에선 말. 홉. 되 같은 도량형이 군사력 못지 않게 중요했음을 태화전 앞에 놓여있는 이 표준 도량용기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 태화전 뒷쪽으로 황제의 상시 집무공간인 중화전과 보화전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곳은 황제의 어머니라도 출입할 수 없는 여성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고 합니다. 황후도 일생에 한번 즉위식때만 이곳에 드러와볼 수 있었다네요.
▲ 태화전 좌우측으로는 부속건물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 지붕 장식품인 귀신을 물리치는 잡상 배치는 한국과 중국이 약간 다릅니다. 한국은 손오공, 삼장법사등 서유기 등장인물들을 차용해온 반면에, 중국은 도인과 선인을 맨 앞에 배치하고 뒤쪽으로는 10가지 상징 동물인 용. 봉황.사자.기린.천마.해마.물고기.해태.원숭이를 배치했습니다.
▲ 두분 선배님과 포토존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 경산공원에 오르면 자금성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답니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 주요 건물만 둘러 보았는데, 자금성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름다운 누각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 우리나라와 중국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많이 다릅니다. 궁궐의 색이 그렇습니다.
▲ 보화전엔 영화에 등장했던 푸이의 옥좌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 자금성의 부속건물들은 좁고 미로같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 황제의 휴식을 위해서 도교의 이상향을 지상에 구현해 놓은 어화원으로 들어갑니다.
▲ 이 삭막한 자금성에 이런 정원조차 없었다면 여기를 거쳐간 황제들은 아마도 돌아버렸을 것입니다.
▲ 어화원 한 누각의 천장장식인데 탄성이 절로 나오네요.
▲ 자금성의 나이와 비슷할것 같은 후원의 수목들...
▲ 자금성을 둘러싼 해자 외금수하의 멋드러진 풍경이 계속 눈기을 끌더군요.
​
(나종화 객원기자 )

[NEWStory makes History - 서울포스트.seoulpost.co.kr]
'서울포스트' 태그와 함께 (상업목적 외) 전재·복사·배포 허용
(*포털 다음 에 뉴스 송고)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독자의견 (총 0건)
독자의견쓰기
* 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 등 목적에 맞지않는 글은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등록된 글은 수정할 수 없으며 삭제만 가능합니다.
제    목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스팸방지            스팸글방지를 위해 빨간색 글자만 입력하세요!
    

 

  게시판모음

서울포스트
 
뉴스소개 | 광고제휴 | 이메일구독 | 공지알림 | 개인정보보호 | 기사제보

신문등록: 서울 아00174호[2006.2.16, 발행일:2005.12.23]. 발행인·편집인: 양기용.
서울시 중랑구 겸재로 49길 40. Tel: (02)433-4763. seoulpost@naver.com; seoulpostonline@kakao.com
Copyright ⓒ2005 The Seoul Post. Some rights reserved. 청소년보호책임자: 양기용.
서울포스트 자체기사는 상업목적외에 전재·복사·배포를 허용합니다.
Powered by Newsbuil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