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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자료2] 한국의 종교① - 한국불교 태고종(太古宗) [펌글]
 온라인팀 (발행일: 2014/09/14 20:58:46)

[서울포스트 온라인팀=] 현재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불교는 북방계의 대승불교계이지만, 남방계의 소승불교가 변형된 밀교 등이 일본에 전래되면서 한반도에도 상륙했고 현재는 SGI라는 이름으로 일본산 불교도 수입 성업하고 있다. 서양종교라는 천주교,기독교는 7개(?)교단 외에도 성공회, 여호와의 증인, 미국기독교라할 수 있는 몰몬교(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 통일교, 대순진리교, 원불교 그리고 각종 사이비 종교 등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일본의 불교종파는 200여개, 한국은 100여개, 이중 법인 등록은 20여 종파다.

조선이후 한국은 근 세기 세계 종교역사에 유래가 없는 기독교의 선교 기적(?)이 일어난 나라다. 이런 가운데 한국불교의 현실은 어떤가, 무엇이 종파간 대립을 이룬가를 봤더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없는 불교계 현실이다.

한반도의 불교는 5교9산(신라,고려초) - 교종선종(양종兩宗, 고려말,조선초) - 선종(조선말,현재) 라고 할 수 있다. 교리를 공부해서 점진적으로 깨닫는다는 교종(敎宗)과 달리, 참선,염불 등으로 '화두(話頭)'을 단방에 깨우쳐 누구나 부처의 경지(부처가 될 수 있다)에 이른다는 사상이 선종(禪宗)이다. 이 가운데 교종 원리는 없어진 것이 아니고 선종에 완전히 흡수되었다고 본다. 목어(木魚)에서 유래한 목탁(木鐸)을 두드리는 행법도 교종이 아니라 선종방식이다. 북방계의 대승불교에서 도교적 요소가 가미된 선종의 탄생은 달마대사(인도 승려 보리달마菩提達磨) 부터라고 한다. 이후 중국에서 6조 혜능에 이르러 발전한 것이 한반도에 들어왔다.

자, 현재 선종 만 있는 우리불교 교단이 독신승(조계종)과 대처 가능한 승(태고종 외)이 벌이는 재산과 파벌 싸움 5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우리가 판단할 사항이다.

수집된 자료에 저작권을 행사하실 분은 메모 남겨 주십시오.


출처 : 다음 카페 http://cafe.naver.com/bubhwa/613[게시자: 지광(2005.01.12)]

[한국의 종교] 한국불교 太古宗 - 이지성 (태고종 총무원 총무부장

태고종은 신라시대 5교9산 중 전남 장흥 보림사에서 도의국사가 개산한 가지산문의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고려말 태고보우국사를 종조로 모시며 한국불교의 전통을 잇고 있다. 또한 중생을 위한 불교, 현대화된 불교를 표방하며 대중 교화에 힘쓰고있다.

1993년11월4일 성철 스님이 입적하였다. 그후 우리 사회에는 일명 ‘성철 신드롬’이 유행하였다. 주요 언론들은 앞다퉈 특집을 꾸몄다. KBS는 94년 1월 초 신년 특집으로 ‘큰스님 성철’을 방영하였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성철 스님이 청담 스님 등 도반들과 왜색불교를 척결한다며 입고 있던 붉은색 가사(紅袈裟)를 태우는 장면이 나왔다. 나레이터인 작가 고원정씨가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붉은 가사를 입고 있었는데, 한국 가사로 바로잡기 위하여 홍가사를 불태웠다”고 해설하였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공영방송인 KBS가 승려의 복식에 대한 고증을 안했기 때문에 생긴 불상사였다. 그 프로그램의 책임자인 남성우 PD는 “조계종단의 중진 승려와 해인사의 큰스님들에게 자문받았다”고 했지만 허물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홍가사야말로 한국불교 1천6백년을 이어온 전통 가사이기 때문이다.

모든 불자들이 의식(儀式)의 교과서로 삼고 있는 “석문의범”에 ‘홍가사’라고 가사의 색을 명기하고 있으며, 현재 조계종 본사급 사찰에 봉안되어 있는 조사 스님들의 영정을 보면 스님들이 전부 홍가사를 수하고 있다. 즉, 신라시대의 원효와 의상, 고려시대의 보조국사와 태고보우국사, 조선시대의 무학·서산·사명은 물론 근세의 백용성·한용운 스님 등이 모두 홍가사를 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청주의 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해인사 장경각의 팔만대장경판 조성 모형인형’에도 스님들이 홍가사를 수하고 있는 등 조금만 관심을 갖고 관찰하면 홍가사가 한국불교의 전통 가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태고종은 지금까지 이 한국불교 고유의 홍가사를 지켜오고 있다. 이 엄연한 사실을 공영방송이 미처 알지 못한 원인, 오히려 진실을 왜곡시켜 방송한 배경에 한국불교계의 허점이 도사리고 있다. 이는 불교계에 내재된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왜곡된 내용에 항의방문한 태고종단 간부들의 시정 요구와 전문가들의 질책에 당황한 KBS 관계자는 부랴부랴 고증 절차를 밟아 명백한 잘못을 시인하고 나레이터인 고원정씨의 입을 빌려 사과방송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실상 현재 조계종 승려들이 수하고 있는 밤색 가사는 54년 불교법란 이후 이른바 독신승들이 기성 승려와 차별화를 목적으로 만들어 제도화시킨, 그 역사가 40여년에 불과한 가사다. 오히려 밤색 가사는 일본 승려들이 사용하는 고동색 가사를 본떠 만든 것으로 국적이 불명하고 정통성과 역사성이 없는 가사다.

‘조계종만이 정통’이라는 고집에 사로잡힌 조계종 중진 승려들은 홍가사의 정통성을 애써 외면하고 PD에게 왜곡된 자문을 하였고, ‘조계종만 정통’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방송 관계자는 고증에 입각해 사실보도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

종교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건 일정한 문화적 역할을 한다. 한국불교는 곧 한국사상이며 민족정신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불교는 1천6백년 동안 우리 민족과 고락을 같이 하며 한국문화의 중심적 위치를 지켜왔다. 현재 우리나라 국보와 보물의 대다수가 불교문화재인 것만 봐도 불교의 문화적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

한국불교는 중요무형문화재로서 불교미술인 단청(무형문화재 제48호), 불교의 음악과 무용이 망라된 범패(무형문화재 제50호)를 보유하고 있는데, 모두 태고종 스님들이 전승하고 있다.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스님(단청)과 박송암 스님(범패)이 대표적인 예다. 일반인의 상식과는 달리 태고종이 이들 전통문화를 보유한 정통 종단으로서 한국불교의 맥을 잇고 있다.

태고종은 신라시대 5교9산 중 전남 장흥 보림사에서 도의(道義)국사가 개산한 가지산문의 법통을 이은 고려 공민왕 때의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를 종조(宗祖)로 모시고 있다.

고려 충열왕 27년(1301)에 출생한 태고국사는 13세에 양주 회암사에서 출가하여 가지산 보림사 총림에서 수행한 후 38세에 활연히 대오견성(大悟見性)하여 “뇌관을 쳐부순 뒤에 맑은 바람이 태고를 불어주네”라는 게송(偈頌)을 읊었다.
56세에 공민왕의 간절한 요청으로 왕사(王師)가 된 스님은 당시 난립하여 서로 다투던 5교9산을 통합하여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였는데, 이 해(1356)를 태고종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 이로써 한국불교의 특징인 통불교(通佛敎)가 정립되었으며, 따라서 현재 한국 불자들은 모두 태고국사의 법손들이다.

뿌리깊은 종단 태고종의 역사

이런 통불교의 전통에 따라 태고보우국사는 한국 불교계 전체의 종조로 모셔져 왔는데 불교법란 이후 이른바 비구 독신승단은 기성 종단과의 차별화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종조를 고려시대 보조국사로 바꾸고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한국불교를 이어온 법맥을 이탈한 처사였다. 성철 스님도 저서 “한국불교의 법맥”(장경각 발행)에서 태고국사를 진정한 종조로 인정하고, 현 조계종에서 종조를 바꾼 실책을 질타하였다.

공민왕 20년(1371) 국사가 된 태고 스님은 원융사상에 의거하여 교(敎)와 선(禪)을 함께 수행하는 승풍을 정착시켰다. 태고 스님은 세간과 출세간도 원융하여 38세에 오도한 후 먼저 부모를 찾아 효양하는 본보기를 보였다. 국사가 82세(법랍 69세)로 입적하자 국왕은 목은 이색에게 탑비명을 짓게 하였고 그 문도(門徒)에는 최영·이성계·권근·정도전·이숭인 등이 동참한 국가적 법회가 봉행되었다.

이후 숭유배불 정책을 편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시대에 다시 단일 종단을 구성하고 종명을 조계종으로 하였을 때도 종조에 대한 시비는 없었다. 그러나 자유당 독재 시절인 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불법 유시로 법란(法亂)이 발생하자 상황이 돌변하였다. 단일 종단을 구성하고 태고국사의 원융사상에 따라 창건한 태고사(현재 서울 종로의 조계사)를 이른바 독신승들이 강제점유하는 폭력행사에 이어 지루한 소송·재판이 불교계를 뒤덮었다. 이어 가사를 새로 만들고 종조를 바꾸는 등의 변칙적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독신승들이 승리한 셈이 되었다.

종조까지 바꾸는 현 조계종측의 환부역조(換父易祖)하는 행위를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스님들은 당시 악법이나 다름없던 ‘불교재산관리법’(지금은 폐지됨)에 따라 70년 한국불교 태고종으로 문화공보부에 종단 등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는 창종이나 분종이 아닌 한국불교의 전통과 법맥을 계승하기 위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태고종이 태고보우국사를 종조로 모시고 전통 홍가사를 수하고 있으며, 불교 전통문화인 불교미술(단청·불화)과 범패(음악·무용 등 불교전통의식)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50년대의 불교법란(분규)은 왜 발생했을까. 여기에는 우리나라 근세사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우리가 줄기차게 추구해온 것은 개화, 즉 현대화·국제화·서구화였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던 시기가 지나가고 쇄국은 곧 망국이라는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1백여년간의 노력 끝에 어느 정도 현대화를 이루었고, 보다 국제화되기 위한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는 아시아·아프리카 대륙 대부분 나라의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현대화를 일본을 통해 시작했다는 게 비극이었다. 조금 먼저 현대화를 이룬 일본이 우리 땅을 점령하였고, 그 시대의 선각자들은 서구 열강보다 주로 일본을 통하여 개화하였다. 한말의 군인 사진을 보면 핫바지 군복이 보이는데 이처럼 허술한 군대가 지금의 막강한 국군이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치러야 했다.
행정이나 교육 등 다른 분야도 대동소이하였다. 가뜩이나 온갖 박해로 인해 산중으로 쫓겨나 법맥을 겨우 유지하던 불교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선각자적 스님들은 일본에 유학하여 서양문명의 힘을 보았고, 새삼 산중불교에서 벗어나 대중불교를 해야 함을 깨달았다. 이때의 상황은 만해 한용운 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불교를 위한 불교가 아니라 중생을 위한 불교로 혁신해야 한다는 처절한 외침이었다. 그러나 일부 보수적인 승려들의 생각은 달랐다. ‘중은 모름지기 삭발염의 하고 산속에서 경을 읽거나 수행해야 하며 세속의 일에는 관여치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50년대 法亂과 불교계의 분열

선각자 스님들은 산업화시대를 맞이하여 중생을 제도하려면 직접 뛰어들어 같이 살면서 교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제는 배불정책도 사라졌고 한국불교 본래의 사상인 대승불교 이념을 되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남방아시아의 소승불교·비구불교가 아니라 대승불교·보살불교를 구현해야 한다’고 여겼다. 해동초조(海東初祖)라 불리는 원효 스님처럼 결혼 등은 개인의 자유에 맡기고 ‘스님’의 정신으로 대승교화를 실천할 것을 주장하였다. 대표적으로 만해 한용운 스님이 있는데 그분에게 처자(妻子)가 있다고 해서 친일파니 왜색이니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원효 스님 또한 설총이란 아들을 두었지만 파계승이라 불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국 역사상 위대한 사상가이며 성스런 스승이란 의미로 성사(聖師)로 추앙받고 있다.

이러한 진보적인 생각은 곧 보수적인 승려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고, 이는 불교법란(분규)으로 이어졌다. 즉, 이념의 대립과 갈등이 50년대 불교법란의 원인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철저한 기독교인이자 미 군정이 원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자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추김에 불교계가 놀아난 셈이었다. 북한에서도 역시 소련이 원하는 소련식 공산주의자 김일성이 민족주의자를 숙청하였다. 민족주의 세력은 남북 공히 배척 대상이었다. 물론 해방 이후 불교계에서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할 필요는 있었는데 자체적으로 청산했어야 했다. 그러나 불교계의 일제 잔재 청산은 유감스럽게도 정권을 등에 업고 진행되었으며, 결국 ‘절 빼앗기 싸움’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당시 기존 승려가 7천여명, 소위 독신 비구승은 3백여명이었다. 보수적 독신승들은 ‘일제청산’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공권력(경찰)과 폭력배들을 앞세워 무자비하게 사찰을 차지하였다. 이런 폭력적인 방법으로 전국의 사찰들을 점거한 까닭에 오늘날까지 그 후유증이 남아 불교계의 분규라 하면 흔히 뉴스에 보도되듯 폭력사태로 치달아 일반 국민들이 고개를 흔들 지경이 되고 말았다. 적어도 태고종에서는 절 빼앗기 다툼이나 폭력행위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태고종은 ‘대승교화’를 표방하며 그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교화를 하고 있다. 불교 교육기관으로는 총무원사(서울 성북동 태고사)에 있는 종립 동방불교대학과 선암사(전남 순천) 전통강원을 비롯하여 충주·동해·춘천·제천 등에 대학과정 교육기관이 있다. 또 언론출판기관인 월간불교사·한국불교신문사·한국불교출판부를 총무원장이 발행인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어린이 교육과 복지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현재 석왕사·용화정사·영통사 유치원을 비롯, 나나유치원·반야유치원·진선미유치원·경인몬테소리유치원·보리수유치원·수보리유치원 등이 있는데, 여러 사찰에서 유치원·유아원·탁아소·놀이방 등을 개설할 준비를 하고 있어 급속도로 늘어날 전망이다.

본격적인 사회복지기관으로는 무료직업안내소·청소년독서실·양로원·신용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있으며, 대승교화를 위해 종단에서는 별도의 사회복지법인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태고종의 무엇보다 가장 큰 특징은 종단이 3천여개의 사설 사·암(寺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선암사·봉원사·백련사·청년사(세칭 안정사)·관악산 성주암·강남 일원동 불국사 등 10여개의 큰 사찰을 제외하면 모두 사설 사·암이다. 사설 사·암이란 조계종이 보유한 크고 역사 깊은 사찰이 아니라 개인이 설립한 규모가 작고 역사가 짧은 사찰을 말한다. 불교법란으로 전통사찰에서 물러난 스님들 주축으로 건립한 사찰이 대부분이다. 숫자상으로는 조계종단의 1천5백여 사찰보다 갑절이나 많다.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역사 깊은 사찰도 많고 수행이 높다고 소문난 큰스님이 있는 조계종 사찰도 부지기수다. 그런데도 왜 사설 사·암이 유지되고 있으며 차츰 늘어나고 있는가. 이는 바로 종단의 대승교화 이념 때문이다. 대다수의 태고종 사찰은 깊은 산속이 아니라 도심이나 마을 근교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하여 주민들과 애환을 같이하며 교화하고 있다.

대중과 더불어 함께 살며 교화활동

큰 절은 아무래도 관료적이고 권위적이지만 바로 이웃에 있는 작은 사찰은 마치 친정집 같다. 큰스님 한번 만나려면 절차가 까다롭고 절을 수없이 해야 하지만 태고종 사찰은 수시로 찾아가 가정문제·경제문제·정신적 고통을 털어놓고 부처님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사설 사암의 주지는 평생직이므로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위는 할 수 없다. 또한 승려의 자제도 지역주민들의 아이들과 함께 같은 학교에 다닌다. 그래서 이웃과 신도들 사이에 오랜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근래 명산대찰은 늘 수백억, 수십억원이 드는 불사를 하고 있어 돈 없는 서민들은 마음놓고 동참하기 어렵다. 그러나 태고종 사찰은 돈 한푼 없어도 부담 없이 찾아갈 수 있고 나란히 밥도 같이 먹고 하룻밤 쉬어 가기도 한다. 이는 태고종 스님들이 ‘불교를 위한 불교가 아닌 중생을 위한 불교’를 실천하려는 원력이 있는 탓이다. 중생 속에 뛰어들어 더불어 살면서 교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민중불교에 헌신하는 태고종 승려는 현재 5천5백여명이며 신도는 5백50만명을 웃돈다.

때문에 태고종의 미래는 밝다. 점차 민주화되고 다양해지는 현대사회의 특징에 그 이념이 맞기 때문이다. ‘나는 성직자이기 때문에 속인들과는 다르다’는 권위주위는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무조건적인 권위는 더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다. 만나보고 진정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권위여야 가치가 있다. 또한 대량생산보다 소량의 맞춤이 선호되는 추세다. 각자의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시대인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내가 좋아야 한다는 독창성의 시기다.
이러한 시대에 교화하려면 우선 상대방의 개성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친밀한 인간관계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를 바탕으로 상대방에 맞는 방편을 써야 제대로 교화할 수 있다.

또한 우리 사회는 이제 주체성 회복의 풍조가 유행하고 있다. 그동안 너무 물질문명·황금만능과 서구지향적으로만 치달았다는 반성과 함께 ‘우리 것’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고 있다. 전술한 대로 태고종은 전통 불교문화를 보유한 유일한 종단이므로 국민들의 문화적 갈등을 풀어줄 수 있다.

그러나 취약점도 있다. 사찰을 창건한 주지가 운영권을 갖고 있다는 특징 때문에 중앙집권적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조계종과 달리 실질적인 주지 임명권이나 재산관리권이 총무원장에게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극히 민주적이고, 따라서 사찰 차지 싸움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기는 하지만 종단 차원의 큰 불사를 할 때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힘이 아니라 덕으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고종단의 발전은 간부들의 덕성에 따라 그 속도가 결정되리라 전망된다.

이승만 대통령 ‘대처승 담화’로 분규 촉발

일제 말기인 41년 기존의 조선불교 선·교 양종 단일종단은 종명을 조선불교 조계종으로 정하고 종헌(宗憲)을 제정했다. 또 태고사(현 조계사)를 창건하여 총본산으로 삼고 단일종단을 구성했다.
해방 직후인 46년에는 조선불교 교헌(敎憲)을 제정하여 선·교 양종 단일종단을 구성한 데 이어 54년 대한불교 조계종 종헌을 개정, 공포함으로써 태고보우국사를 종조로 하여 이판승과 사판승이 공존하는 체제를 정립했다.
그러나 이해 10월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는 유시를 발표함으로써 속칭 비구승(선학원측)과 전통승(대처승)의 분규가 일어나게 되었다. 사찰 강제점거 등으로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며 분규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55년 11월 대법원에서 국성우(국묵담·태고측 전 종정) 종정의 조계종을 정통 합법종단으로 판결하자 선학원측은 별도로 종단을 구성했다.

61년 5·16 후 군사정부는 불교 내분을 자율적으로 해결하도록 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으나 다음해 3월 법륜사측(현 태고종)이 정부의 비현실적인 강제통합안에 반대, 불참한 가운데 통합종단 종헌 제정을 강행했다. 이어 동년 5월 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 공포하면서 정부는 선학원측의 대한불교 조계종 등록을 받아들이는 한편 통합종단 구성에 불참한 법륜사측의 등록신청서를 반려한 후 강제해산시켰다. 이에 법륜사측은 종명을 한국불교 조계종으로 변경, 등록신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양측간의 대립과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70년 5월 법륜사측 일부 승려들이 한국불교 태고종으로 종명을 바꿔 문공부에 종단으로 등록했다(종정 박대륜·총무원장 박덕봉). 이어 11월 종래의 한국불교 조계종(종정 국묵담)과 통합, 오늘에 이르고 있다(초대 종정에 박대륜·총무원장 안덕암).

이런 연유로 태고종의 역대 종정(1, 2세는 敎正이라 함) 계보는 제1세 박영호 교정(46년 5월 취임)으로부터 시작하여 방한암(2세)-송만암(3·4세)-국묵담(5·6·7세)으로 이어지며 70년 5월 취임한 박법운 종정(8·9세)을 태고종 1세 종정으로 꼽는다. 이어 국묵담(10·11세)-정보성(12세)-안덕암(13세)-우백암(14세)-정보성(15세) 종정을 거쳐 지난 2월 취임한 안덕암 현 종정에 이르고 있다.

<월간중앙 1999.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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