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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인터넷상 삼천사지 답사(글,사진) 자료(글쓴이: '흔적'님)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4/08/03 17:03:51)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삼천사 탐방을 하면서, 티스토리 (http://wildwater.tistory.com/2) 계정에 '흔적'이라는 닉으로 글과 여행기, 등산기를 쓰신 분의 삼천사지 답사기가 무척 공감이 가 서울포스트에 옮긴다.

흔적 님은 스리랑카, 파키스탄 K2, 히말라야 by 칭짱철도, 히말라야 (네팔) 등을 등반한 산악인이고 국내 유명산도 거의 등정했으며, 불교에도 조예가 깊은 분. 여기 삼천사지는 2012년 2,3월 두 차례에 걸쳐 탐사를 한 기록. 처음 우연히 발견한 후 두번째 충분한 답사를 한 것으로 추정해 본다. 현재는 1년간 글이 없으시다.

※ 흔적 님이 보시거든: 혹시 이 글로 인해 불편한 점, 저작권 관련에 이의가 있으시면 메모 남겨 주십시오. = 서울포스트


1차. 삼천사지(三川寺址) / 흔적 2012/03/30 00:24

한국의 산은 절이 깃들어 있는 터이다. 골짜기 마다의 사연에는 늘 그 끝에 해당하는 절과 절터가 있다. "길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라는 제목의 책도 있지 않는가. 좋은 절은 좋은 산 속에 있을 때 명찰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 결국 좋은 산세가 좋은 절을 만드는거다.

남도(南道)로의 외출은 봄을 기다리는 객들에게는 가슴벅찬 일이다. 해남,강진 등에 자리한 햇볕 따스한 대지와 유서깊은 터전과 낯익은 듯 낯선 풍경은 객을 설레게한다. 역사의 흔적들은 그 앞에 선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작용이 있다.


너무나 익숙해서 있는지도 몰랐던 곳, 북한산에도 그런 곳이 있다. 따져 보면 굳이 멀리가지 않아도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의 절들이 북한산 자락에도 몇몇이 있다. 승가사의 마애불 앞, 문수사의 동굴, 금선사의 앞마당, 진관사의 대웅전, 삼천사의 마애불 등이 묘한 평온감을 준다. 북한산에만 해도 자칭 유서깊은(?) 사찰이 30여개 이상 존재하고, 예전에 건재하다 지금은 사라져 절터만 남은 곳도 10여개가 있다.

사찰이 있다 사라진 터를 폐사지라고 한다. 북한산을 수백번 다녔어도 폐사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우연히 옛 삼천사의 절터를 보게되었다. (현재 있는 삼천사(三千寺)는 옛삼천사(三川寺)와는 이름도 다르고 위치도 다르다.)

이끌리듯 가게 된 용출봉과 용혈봉 밑에 자리잡은 옛 삼천사 절터. 이 잘생긴 봉우리들은 절터에서 보면 완연히 다르다.또한이 봉우리들이 절터를 색다르게 만들기도 한다. 절터를 새롭게 만나는 느낌은 의식보다 무의식에 가깝다.

가끔 꿈이 현실보다 더 생생하고, 무의식이 의식을 압도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오를 수 없는 암릉은 의식의 상상력을 자극하다 끝내 무의식으로 침잠된다. 어느 길이란 걸 가봤다는 것은 그냥 지나쳐 갔기에 가봤다고 하는 것이지, 그 길에서 내가 모든 것을 느끼고 향유해 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수많은 길이 봄이면 봄대로, 여름이면 여름대로 철마다의 향취가 있는데다, 똑같은 계절이라도 시간대에 따라 다르고, 비오면 비오는 대로, 눈오면 눈오는대로 매번 달라지는 그 모습을 나는 단지 의식적으로 안다하고 경험해봤다고 할 뿐, 진실한 경계는 우리의 의식적 관념과는 거리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경험하고자 하는 것은 의식적인 것의 심연에 존재하는 무의식적 경험일지도 모른다. 절터, 그것도 사라진지 몇백년 되는 절의 터를 답사한다는 것은 깊은 무의식의 표면을 건드리는 것이리라.


삼천사 옛 절터는 남도의 느낌이 난다. 겨울의 끝, 아직 이른 초봄의 싸늘함조차 사라지게 하는 적막한 무언가가 있다. 머나먼 남도의 향기처럼 몇백년 전의 시간을 단숨에 거슬러 오르게 하는 초월감. 이 서늘한 공적(空寂) 속에서 남도의 봄기운과 향기를 맡는다.

최소한 수백년은 되었음직한 석축 위 절터에는 아무 것도 없다. 상수리나무와 참나무와 잡목 만이 잔바람 속에 흔들리고 있다. 원래 절터의 기단부인 석축을 향하는 길은 조그만 오솔길이다. 가는 길엔 기와조각과 항아리조각이 밟힌다. 지금은 철수한 군부대의 시멘트 구조물 같은 흔적도 곳곳에 보인다. 이런 인공물로 인해 애시당초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 좋은지도 모르겠다.

절터에는 거대한 무형의 기운만이 있다. 그나마 남은 절의 흔적이란 바닥에 깔린 기와조각이 전부인 곳.

'없음'이란 존재는 참 묘하게 사람을 부추긴다. '없음'을 '존재'라 하기엔 어폐가 있겠지만, 사실 없기 때문에 찾아 헤매는 것 아니겠는가. 그것은 욕망의 또다른 모습일 수도, 없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이겨낼 대리만족일 수도 있겠다.

남도 사찰의 번듯한 모습이 삼천사 옛절터에 남아 있을 수 없다. 이곳은 개수되고 개축된, 지금도 진행 중인 끊임없이 바뀌어가는 현존하는 사찰이 아니다. 보물과 국보의 탈을 쓴 현대화 된 관광명소가 아니다. 기와 파편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항아리 조각 하나에서 없음의 이유를 찾는 것. 그 '없음'으로 인해 새로운 '있음'이 부여된다.

잘 만들어진 장편소설과 같은 대서사로서 우리를 시간에 대한 사색으로, 무상에 대한 의미로 이끄는 곳이 바로 절터가 아니겠는가.

없음의 미학이 결국 있음의 뚜렷함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것. 흔적 없음으로 인해 흔적을 찾아가게끔 된다는 것. 서사 혹은 아이러니가 수시로 작동하는 곳. 그래서 낯설기만 한 이 곳에서 이 낯섬의 배후에 숨어있는 의미를 묻게 된다.

해가 뜨고 지고, 구름이 있다가 사라지는 곳. 나무 그늘 속에 잠긴 절의 옛그림자. 홀로 남아 동쪽 어느 봉을 응시하는 귀부(龜趺) 만이 산을 채운다.

三川의 시냇물은 어느 순간 말랐을거고, 마른 우물은 흙 속에 사라져갔다. 과거가 현재를 규정하고 현재가 미래를 규정해왔듯이, 이곳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과거는 지금 어디에 있는걸까. 그리고 무엇에 대한 갈망이 흩어진 돌조각 사이로 1000년 남짓의 유적을 남기게 된 것일까.



2차. 삼천사지 답사 / 흔적 2012/03/31 00:46

삼천사지(三川寺址)는 현재 있는 삼천사(三千寺)에서 계곡 상류 쪽 용출봉에서 증취봉까지의 기슭에 위치한다. 삼천사지와 현재 있는 삼천사는 굳이 말하자면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는데, 현재의 삼천사(三千寺)는 1970년대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마애불이 있는 위치에 중건하였다.

< 삼천사(三千寺) 경내에 있는 마애불 - 보물 657호 >

일전부터 용출봉, 용혈봉의 산세가 좋아서 접근로를 찾은 적이 있는데, 그러다 우연히 삼천사지를 만나게 되었다. 삼천사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나, 자료를 찾아보니 의외로 많은 조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최초의 탐방조사는 1963년에 이루어졌고, 1999년~2004년에 본격적인 조사를 거쳐 2005년~2007년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그외에도 1995년에는 불교잡지에 실릴 정도로 오래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끈 절터였다.

발굴조사 결과 대형 석조(石槽)와 동종(銅鐘), 연화대좌(蓮花臺座), 석탑기단석(石塔基壇石),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의 비명(碑銘)이 남아 있는데, 그 중 동종은 보물로 지정받아 현재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최근 발간된 삼천사지 소개 자료에 의하면 삼천사지는 총4구역으로 나뉜다. 그중 가장 큰 절터가 있던 구역을 1구역으로 명명하고, (大智國師) 법경(法鏡)의 비(碑)와 귀부(龜趺)가 있던 곳을 4구역으로 하였다. 2구역은 1구역의 하류에 위치하고, 3구역은 4구역의 하류에 위치한다.

삼천사에 대한 옛기록은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에 언급되고 있다고 하는데,그 기록에 의하면 한때 3000여명의 승려가 수도할 정도의 큰 규모였다고한다. 옛기록에 삼천사의 천자는 川으로 표기되었는데, 발굴조사 결과 대지국사의 비편에서도'川'으로 표기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18세기 이후의 기록에는 '千'자로 바뀌어 현재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삼천사는 고려시대 법상종(法相宗)의 일맥이었는데,대지국사 법경(1020년 왕사, 1034년 국사로 임명됨)이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법상종은 삼장법사로 알려진 당(唐)의 현장(玄裝)과 그 제자인 규기(窺基)에 의해 세워진 종파로서 법(다르마)의 상(相)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법의 성(性)을 추구하는 화엄종 등과는 교리체계가 다르다. 특히 유식(唯識)으로 알려진 정교한 철학체계를 체계화, 완성했다는 점에서 인도불교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려시대 법상종을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법상종이 미륵사상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유식5부 논서의 저자로 알려진 미륵에 대한 신앙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입수한 자료에 의거하여 1Km 이상 광범위하게 산재한 삼천사지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우선 1구역에 위치한 원래 삼천사의 중심이 되는 절터를 오른다. 기단부의 석축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연구자료를 보니 삼천사는 16세기 중반까지 법맥을 잇고 있다가 적어도 1745년 이전에 폐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석축이 후대에 또다시 개축되었는지는 명확치않다. 다만 절터의 규모가 상상외로 크다는 것이 느껴진다.


석축위로 오르니 절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건물이 었었음직한 널따란 절터가 나타난다. 그 위로 용출봉, 용형봉, 증취봉이 3형제처럼 나란히 서있다.


가만히 앉아서 초봄의 풍광을 느껴본다. 언젠가 이곳에 와있었던 것은 아닐까. 낯설면서도 낯익은 공간의 묘함이란...

아래쪽에 해당하는 2구역쪽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직접 가는 길이 없어서 풀숲과 바위 틈을 헤치고 전진한다. 좀 작은 규모의 석축이 여기저기 산재되어 있다. 이곳은 혹시 암자가 아니었을까.


조금 더 풀숲을 헤치고 진행하니 멀리 중간 규모의 석축이 보이고, 그 아래로 채석장인 것으로 추정하는 돌무더기가 쌓여있는 곳에 이른다.


돌이 잘린 곳을 보니 그리 오래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최근의 흔적인지도 모르겠다. 이 지역은 한 때 20여년 이상 군부대지역이었으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추정하기기 어렵다.

다시 1구역에 해당하는 큰 절터로 돌아왔다. 3, 4구역을 가기위해 지형을 살펴보았다. 초행길임에도 사람이 다닌 흔적이 희미하게 나마 남아 있어서 길을 찾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3구역은 4구역 가는 중간에 위치하는데 작은 절터에 해당하는 석축이 보이고 그 위로도 무너져내린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여기도 이미 발굴작업이 완료되었는지 정비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접근로는 무성한 풀과 낙엽에 뒤덮여있다.

마지막 구역인 4구역으로 향한다. 4구역은 삼천사지 발굴의 핵심이 되는 곳이다. 3구역과 4구역 사이에는 조그만 능선이 있어서 능선 너머로 내려서니 중간 규모의 절터가 나타난다. 이곳 역시 이미 발굴이 끝났으며, 기단부를 가지런히 정비까지 해놓았다. 그럼에도 석재 사이로 잡목들이 자라나서 폐사지의 황량함을 더하게 만들었다.


절터를 돌아보니 길을 잃은 느낌이다. 여기는 과연 어디인가?
4구역은 다시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아래에 위치한 절터와 위쪽에 있는 대지국사(大智國師) 탑비의 터가 그것이다.
폐사지에서 증취봉 쪽으로 조금 오르니 마침내 거대한 거북이와 만난다. 있는지도 몰랐던 이 거북이가 1천년을 버텨온 거북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가슴이 시려온다.

이 거북의 정확한 이름은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귀부(龜趺)"이다. 비의 받침대가 되는 거북이다. 비는 사라져 파편만 남았지만,거북은 홀로 1천년을 살아남았다.

귀부의 조성시기는 11세기로 추정한다. 화강암 재질로서 크기는 높이(137.5Cm), 너비(240Cm), 길이(270Cm)이다. 몸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 모양이다. 연구자료를 보니 신라하대 이후에 등장한 용두형 귀부라고 한다.

신라하대 귀부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1) 입에 물고있는 여의주가 없음, 2) 거북의 등에 연잎 비슷한 조각선이 새겨짐, 3) 귀갑 안에 王자가 새겨짐, 4) 목과 다리에 용처럼 비늘이 조각된 것이라고 한다.( 출처 : 정지희, "북한산 삼천사지 대지국사 귀부연구", 2009.)

이런 전문적인 설명은 굳이 필요없을 것이다. 산속에서 갑작스레 조우해 보아야만 아는 느낌은 그보다 더욱 직관적이다. 그래서 이런 직접적인 마주침은 소중하고도 오묘한 것이다.


쌓은 것은 무너지고
얻은 것은 사라지며
모인 것은 흩어진다.
三川의 범종은 바람소리로 화했고
三川의 川은 마른지 오래며
大智의 智는바램조차 없다.
大智와의 천년기약 어느덧 다했다 해도
모든 중생이 부처 되고 나서야
나 龜趺는 바다로 향할지어니
돌미륵은 어느 때나 한소식 전해올까나.


호접몽(胡蝶夢) 같은 귀부몽(龜趺夢) 삼매에 빠져, 용출봉에서 증취봉까지의 삼천사지 답사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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