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서울포스트 눈으로 다루고 있는 특종 - 한반도 내 '사건' 몇 가지
-SPn 서울포스트, (마이 네임 이스) 량기룡(梁奇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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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대와 화살 장착에서 활대 왼쪽에 화살을 올리는 것이 '옳은 방법(사진 위)'이고, 활대 오른쪽에 올리는 '우리국궁 방식은 틀렸다(사진 아래)'. 이런 자세로 우리 국궁이라고 하다니... 낯 부끄러운 대사건이다. - 2015년 4월12일, 황학정을 찾은 필자의 활대 잡은 모습(비교). ⓒ서울포스트 자료 |
첫째, 김정희가 발견해 자신의 글씨로 새겨 넣고 심정했다는 북한산비 는 신라진흥왕순수비 가 아니다
550년대 비석에 있어서 양식은 삼국 모두 뭉퉁한 바위에 글자를 새길 정도이며 북한산비처럼 정교한 비석 모양은 한반도에서는 800년대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해 고려시대(중국의 송나라 대)때 극치를 이룬다. 더군다나 김정희가 뜬 탁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당시 이 같은 일을 청나라 비공인 사고에 먼저 기록함으로써 조선에 알려졌다. 추사체의 거장이라고 우리가 배운 김정희의 글씨는 그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서체가 아니고 전체적인 글씨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예서체 다. 우리나라 서예체의 70% 이상이 이 글씨체로, 근대에 와서 철저히 우상화 된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리뷰에 추기할 사항: 비석(표석)이 중요하게 여겨져서 정교한 양식이 된 것은 고려시대(아무리 빨라도 통일신라 때), 특히 옥개석(덮개석, 비신의 머리돌)을 따로 제작해 씌운 형태는 고려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때는 옥개석 대신 이수 를 만들었고 비신 과 이수 를 따로 또는 한몸으로 제작했다. 자료에서, 우리나라는 백제 멸망 직후에 건립된 부여의 당(唐)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가 가장 이른 예.
또한, 감악산 몰자비(무자비)를 동국대학교수로 구성된 조사팀이 답사하여 북한산비-진흥왕순수비 와 비슷하다고, 이것도 진흥왕순수비일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을 학계에 발표했으나 인정되지 않았다. 참, 공직자와 마찬가지로 생각의 폭이 편협하고 경직돼 있으며 무식한 게 교수 다.
둘째, 불암산 학도암 관음보살좌상 은 명성황후 초상이다
이 (여자)관음보살상은 명성황후의 발원에 의해 조각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황후 자신이 '나를 새겨라'고 하지 않았겠지만, 화승은 분명 여성의 앉음세(양 무릎을 포갠)를 새김으로써 명성황후를 바위에 초상화했다고 난 본다. 학도암은 황후가 임오군란으로 궁을 빠져나와 장호원 으로 피신가는 중에 머문 곳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황후의 시주에 의해 불사가 일어난 절이다. 학이 도래했다는 학도암은 학이나 왜가리가 날아들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 아니다. 아마도 황후를 학 으로 비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조선의 활쏘기 자세는 틀리게 전해왔다
활쏘기를 다루기 전에 이명박정권 때 일어났던 천안함 침몰에 관한 판단은 외부폭발에 의함이 아니고 뭔가와 직접 접촉에 의한 침몰로 본는 견해에 변함이 없고, 그 이전 독도 문제는 1945년 까지는 조선 땅이지만 1945년 이후엔 미국의 묵시적 동조(가쓰라-테프트 조약 센프란시스코 조약 ? 이 조약은 전쟁 피해국인 조선과 중국이 배제된 채 미-일 간의 회담)에 의해 일본땅이라는 견해다.
먼저 이런 특종 기사의 주제부터 시원하게 밝혀 놓는 게 좋을 것 같다.: 현재 우리나라 활쏘기(국궁)은 엉터리다. 가장 중요한 활대에 놓인(얺인) 화살의 위치가 정통 궁술과 반대며, 효과적인 힘의 역학과도 배치된다. 이는 시급히 교정해야 할 문제다.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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