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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테마여행]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위해 떠나는 여행 - 파키스탄 훈자
 온라인팀 (발행일: 2016/03/02 18:44:35)

[세계테마여행]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위해 떠나는 여행 - 파키스탄 훈자
-SPn 서울포스트, 온라인팀


[※ 이 글과 사진(여행기)는 네이버 포스트 에 소개된 김남희 여행가의 글입니다. 불편한 사항이 있으시거든 메모 남겨 주십시오. = 서울포스트 편집자]


살구꽃 핀 산골 마을에서 한 달하고도 보름을 머문 적이 있다. 도시는 아득히 멀리 있었고, 설산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소박한 음식과 정직한 노동으로 다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이었다. 가파른 골짜기를 깎아 만든 수로가 실핏줄처럼 마을 구석구석 뻗어있었고 빙하가 녹은 물이 수로를 통해 흘러갔다. 그 물에 기대어 사람들은 살구나무를 키우고 밀과 감자를 심었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오면 골짜기 전체가 희끗희끗한 살구꽃으로 뒤덮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골짜기의 색이 어제보다 조금 더 진해져 있었다. 봄볕이 무르익을수록 골짜기는 소녀의 볼처럼 발그스름하게 물들어갔다. 내가 서있는 곳이 인간계인지 천계인지 알 수 없는 풍경이 축복처럼 펼쳐졌다. 


파키스탄과 중국을 잇는 1천2백 킬로미터 길이의 도로 카라코람 하이웨이 북쪽에 자리한 훈자 계곡이었다. 해발고도 2천5백 미터의 고지였고 주변으로는 7천 미터가 넘는 설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봄이 오면 환하게 빛나는 설산의 이마 아래 살구, 복숭아, 체리, 사과, 아몬드 나무의 꽃들이 다투듯 피어났다. 



눈앞의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자주 한숨이 나오곤 했다. 과연 여행자들이 훈자를 ‘블랙홀’이라 부를 만했다. 한 번 들어오면 제 발로 빠져나가기 어려워 여행 일정이 쉽게 어그러지는 곳으로 꼽혔다.


훈자에 45일을 머무르는 동안 내가 한 일은 매일 똑같았다. 마을의 어느 숙소에는 한국인 여행자가 만든 서가가 있었다. 한글로 쓰인 100여 권의 책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훈자로 여행을 올 때마다 조금씩 실어 날랐다는 귀한 책이었다. 매일 아침, 출근하듯 찾아가 책 한 권을 골랐다. 책을 들고 꽃 핀 살구나무 아래로 갔다. 계곡이 한 눈에 들어오는 명당 자리를 골라 돗자리를 깔았다. 살구 나무에 기대어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일기를 썼다.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나면 어깨 위로 분홍색 살구꽃잎이 떨어져있고는 했다.


그렇게 살구나무 아래 앉아있으면 동네 할아버지가 말린 살구씨 한 움큼을 건네주거나,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주곤 했다. 요란하지 않게 다정한 사람들이 나눠준 살구씨를 오물거리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하루가 갔다. 가끔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과 어울려 굴렁쇠를 굴리며 놀기도 하고, 손을 잡고 집으로 이끄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가 끼니를 구하기도 했다.


 아이들 손에 끌려 따라 들어간 집에서.



‘한 조각 꽃이 져도 봄볕이 깎이거늘 바람 불어 만 조각 흩어지니 시름 어이 달래랴. 스러지는 꽃잎 내 눈을 스치는 걸 바라보노라면 상한 몸이나마 술 한 모금 머금지 아니할 수 있으랴.’ 두보는 당나라의 기우는 국운을 가슴 아파하며 <곡강이수>를 썼지만, 나는 살구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봄 풍경이 사라질까 하루 하루 애가 탔다.


살구나무 아래서 빈둥거리는 일이 지겨워지면 몸을 일으켜 수로를 따라 걸었다. 마을 구석구석 이어진 수로의 옆으로는 꼭 한 사람이 걷기에 좋은 오솔길이 나있었고, 걸어가는 내내 나지막한 돌집과 살구나무가 따라왔다. 늘씬하게 뻗은 미루나무 꼭대기에는 장대를 뻗어 걷어내고픈 구름이 걸려있고는 했다. 밤하늘의 별과 살구꽃 자욱하게 피어난 계곡과 정 많은 사람들 덕분에 마음이 내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석 달 열흘쯤 머물다 보면 이번 생에 지은 죄마저 다 씻어낼 수 있을 것 같이 맑은 봄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흘려보내는 날들이 필요하다. 무엇으로든 채우려 애를 쓰던 마음을 내려놓고, 비워내는 시간. 여백이 있어야 다시 채울 수 있을 테니까.


P.S.

지상에 천국은 없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에. 지나친 기대를 품고 훈자를 찾아간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다만, 모든 여행자는 자신이 여행하는 지역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열린 마음으로 찾아간다면 모든 여행지가 자신만의 천국이 될 수 있다.


[Travel Tip]

1. 훈자는?

훈자는 길기트발티스탄 주, 7790미터의 라카포시 산 아래로 흐르는 훈자 강을 따라 형성된 계곡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배경 스케치를 했던 곳이라 일본인 여행자들이 먼저 찾아오기 시작했다. 훈자 계곡의 중심지는 발팃 성채가 자리한 카리마바드. 교통이 편리하고 숙박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주변을 돌아다니기에 좋다.


2. 찾아가는 길

파키스탄과 중국을 잇는 1200킬로미터의 카라코람 하이웨이 위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속도로의 애칭은 ‘하늘길’.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길기트를 경유해 훈자까지는 보통 20시간 내외가 걸린다.


3. 주의사항

- 최근 몇 년째 파키스탄 북부는 치안이 좋지 않다. 파키스탄은 현재 여행 제한 국가이므로 안전해지면 여행하자.
- 파키스탄은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다. 여성 여행자라면 긴 팔에 긴 바지를 입어 몸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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