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영광 법성포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3박4
강진 다산초당의 정약용선생 자취까지 곁들인 아름다운 가을 여행!
-SPn 서울포스트, 장팔현 칼럼니스트
가을 향기 물씬 나는 호시절에 3박4일 전라도 여행을 다녀왔다.
청심회 회원들 십여 명이 모임 이름처럼 맑은 마음으로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굴비로 유명한 법성포에서 하하호호 하는 동안 구름 낀 가을날은 1박2일 끝나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맑아졌다.
대합잡기 체험으로 시작된 모임은 시낭송과 장기자랑에 이어 즐거운 친목시간으로 이어졌다. 좋은 추억 만들고 꽃게 철이라 모두는 선물 한 아름 들고 귀가했다. 지금 잡히는 게는 수게이지만 살이 꽉 차 맛이 좋았다. 1kg에 10,000에서 12,000원에 판매되었다.
영광군 법성포에 들릴 때마다 풍성한 인심과 백수 해안도로 등 멋진 풍광에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여행길이 된다.
1박2일 아쉬움을 뒤로하고 필자가 몇 해 전 쓴 ‘高麗충신 張夏평전’에 일부 묘사된 인연이 있어 순창으로 장건섭 시인 겸 기자와 함께 달렸다. 목적지는 동계면 구미리 남원양(楊)씨 집성촌이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시골 길을 달리고 달리니 드디어 구미리에 도착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그렇다. 청와대 뒷산인 북한산처럼 생긴 무량산(586.4m)이 턱하니 버티고 서있어 낯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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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미리 전경 |
때는 바야흐로 고려 공민왕 4년(1355년) 2월 전국에서 인재를 뽑는 과거시험이 개경 궁궐 안에서 치러졌다.
이때 을과 3인과 병과 7인, 동진사 23인 등 총 33인이 예부시에 급제했다. 장하의 과거급제 동기로는 유명한 우현보가 병과로 이름을 올렸고, 1372년 김문현을 함께 탄핵한 이보림(경주인)이 동진사에 급제했다. 아울러 남원 출신 양이시도 장하와 함께 동진사에 급제한 동료이다.
장하(張夏) 공은 실제적인 결성장씨 시조 격이요, 양이시 또한 공기록에 남겨진 확실한 남원양씨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당시 급제자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을과(乙科)- 안을기(安乙起)․이천기(李天驥)․김승덕(金承德)
병과(丙科)- 정무(鄭袤)․민경생(閔慶生)․우현보․함승경(咸承慶)․최복하(崔卜夏)․이원령(李元齡, 廣州人 李集으로 개명)․
전익(全翊)
동진사(同進士)-장하(張夏)․이보림(李寶林)․조경덕(曺敬德)․정습인(鄭習仁)․전영이(田永儞)․서문철(徐文哲)․권주(權鑄)․이륵(李勒)․신계령(申繼齡)․송공서(宋公序)․양이시(楊以時)․염국보(廉國寶)․권군보(權君保)․오사충(吳思忠)․한의(韓義)․최반(崔磐)․전자이(全子怡)․송언충(宋彦忠)․임효선(林孝先)․김제민(金齊閔)․이영(李穎)․이심(李深)․한달한(韓達漢)
양이시가 과거급제 후 받은 왕명(王命, 조선시대는 교지)은 지금도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왕명은 과거에 급제했다는 합격증이자 신분증으로 이를 홍패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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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이시 홍패 |
양이시 급제 홍패는 보물 제725-1호로 1981년에 지정됐다.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에 사는 후손 양대우(楊大雨)씨가 소장하고 있다하며 관리는 국립전주박물관이 맡고 있다. 양씨는 양이시뿐만 아니라. 우왕 2년(1376)에 실시된 과거(을과)에 급제한 양수생(楊首生)의 홍패까지 소유하고 있다. 참으로 조상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다 할 것이다.
필자는 결성장가로 장하 공과 과거동기인 양이시 공의 흔적을 찾아 구미리를 찾은 것이다. 실로 660년만의 해후인 것이다.
양이시 양수생 부자는 이성계의 조선개국을 반대하다 비운을 당했다 한다. 하마터면 절손(絶孫) 될 뻔했던 남원 양씨였으나 오늘날 명문으로 남게 한 것은 양이시의 며느리인 숙인(淑人) 이씨(李氏) 덕이라고 전한다.
본래 개성 출신인 이씨 부인은 우왕 2년(137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던 양이시의 외아들 양수생과 결혼한다. 그러나 운명은 양이시의 며느리에게 가혹하게 다가왔다.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시아버지와 남편을 한 해 사이에 잃는 불행을 당한다.
더욱이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친정에서는 남편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개가를 권했지만 임신한 몸을 이끌고 개경에서 순창으로 천리길을 걸어 내려와 후손을 번창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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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원양씨 후손과 함께 |
구미리를 떠나 순창읍으로 향했다. 여행을 즐기는 안주인이 한옥 고택을 꾸며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하는 금산여관이란 곳이다. 색다른 컨셉과 아늑한 분위기로 요즘 알음알음으로 각광받는 곳이다.
다음 목적지는 강진으로 정했다. 원래 서울 사는 친구의 부탁으로 가볼 요량이었다. 친구의 부친이 30 여 년 전 사둔 땅 천여 평이 있는데 가보라는 거였다. 가는 도중 영암을 지나는데 빼어난 경관의 월출산이 자꾸만 자기 모습 찍어달라며 보챈다.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번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방해물은 지나는 차들이 아니라 경관을 해치는 전기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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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출산 |
하여튼 굽이굽이 돌아 강진에 이르니 영랑생가가 먼저 눈에 띄었다. 신문학파로 순수시를 지향했던 김윤식 시인의 생가가 옛 추억을 더욱 충돌질했다. 그 옆에 있는 시문학파기념관을 둘러보고 다시 친구 땅 찾아 교촌리로 차를 몰았다. 도중에 다산선생 첫 유배지란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일단 친구부탁부터 알아보고 들리기로 한다.
교촌리에 이르러 마침 최씨 문패가 걸린 집 할머니란 분이 30여 년 전 기억을 떠올리며 번지수를 찾아주어 보았더니 밭은 이미 대나무 숲으로 변해있었다. 세월 무상을 느끼고 다시 다산선생의 첫 유배지인 사의재(四宜齋)에 들러 사념에 잠긴다.
다산선생은 신유박해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를 당한 후, 다시 조카사위인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강진으로 옮겨 유배생활은 계속되었다. 백서사건으로 강진에 첫 발을 디딘 곳이 사의재 터였다. 이때 주모 모녀가 극진히 모셨기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고 수많은 저서를 남기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때문에 사의재란 명칭이 나왔고 근처에 모녀상이 세워진 것이리라. 이런 저런 사색을 하며 사의재 안에 있는 식당에서 동동주 한잔에 유배지 생활을 떠올리며 수많은 상념이 오갔다.
한참 머무르다 다시 다산초당으로 달린다. 정약용선생이 그나마 강진읍에 있을 때는 조금은 나앗을 것 같은데 다시 강진 내 시골 산중턱으로 쫓겨 가는 신세가 되었다. 필자 또한 정처 없는 유배자 신세가 되어 초당으로 차를 몰았다.
높진 않지만 약간 험한 길을 올라서야 다산초당이 보였다. 크진 않지만 늠름하고 기품 서린 향기를 내뿜으며 버티고 서 있었다. 도중엔 작은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고, 굵은 참나무와 전나무가 쭉쭉 뻗은 다리를 선보이고 서 있었다.
한동안 상념에 빠져 있다 시 한 수 읊어 본다.
다산초당(茶山草堂)
-清浪 장팔현
험한 길 한 걸음 한 걸음 오르시면서
산중에 얼마나 한 맺힌 눈물 삼키셨나요?
강진골 사의재(四宜斎)도 못 미더워
깊은 산속 초당으로 내쫓은 그 옹졸함도 탓하지 않으리라!
화려한 궁궐에 천여 명의 선비가 있다한들
권력의 눈치 보며 유구무언, 상갓집 개만도 못하리란 것은 짐작이 갑니다만......,
선생 비록 의로운 소신 지키며
초당에 묻혀 허허로운 세월 속에
글 쓰고 후학들 가르침에 성심을 바칠 뿐이니 무엇이 부럽다 할 것인가?
초당 오를 때 땀방울 닦아주던 계곡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건만 선생의 숭고한 뜻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흐를 뿐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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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산초당 |
실학자요 시대를 앞서가던 천재 다산선생을 떠 올리며 암울했던 당시를 그려본다. 초당을 내려와 다음 갈 곳을 정하다 보니 땅끝마을이 만만한 거리로 판단됐다. 이내 굽이굽이 시골 도로 달리며 반도의 끝을 향한다. 반도의 막내 사랑스러운 땅끝마을.
해남 땅 끝에 다다를수록 다도해와 산길이 숨바꼭질 하듯 절묘하게 아름답다. 숨었다가 나오기를 월출산이 달을 가슴에 품듯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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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땅끝마을 |
도착하고 보니 30분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손님이 적어서 그런지 모노레일은 오늘 끝났다 한다. 다도해는 물론 저 멀리 보길도도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차를 가지고 보길도로 들어 가 볼까 하여 선착장에 가보니 배도 마지막 배가 출항했단다.
아뿔싸! 좀 더 빨리 올 걸......., 주변 풍경에 눈이 멀어 쉬엄쉬엄 왔더니, 윤선도 선생 흔적 찾아 가보려던 보길도행은 여백으로 남겨두기로 하고 다시 송지호를 거쳐 광주 쪽으로 차를 몰았다.
3박 4일 호남권 여행은 작가의 영혼을 살찌우는 풍부한 자원이 되었다. 하여튼 회덮밥 한 그릇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즐겁고 행복한 남도 여행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홀로 여행하다 보니 고독함은 둘째고 밥 먹기가 곤란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탕이나 회가 먹고 싶어도 2인분 이상이 아니면 거절하기 때문이다. 1인가구가 점차 늘어가는 추세고 일본에서도 보면 수박은 물론 쌀도 소량 단위로 포장해서 팔고, 배추도 4등분으로 판매하는데, 왜 우리는 1인분으로 량을 줄여서 팔 생각을 안 하는지, 좀 아쉬웠다.
(장팔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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