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사적에서 보물로 지정된 '서울 살곶이다리'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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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곶이다리 옆 간지(干支) : 丙辰十月日, 資福, ?將片國?, 石手 金重哲 [병진십월일, 자복, ?장편국?, 석수 김중철 ⓒ20140817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서울살곶이다리'는 활 쏘는 곳, 화살꽂이 에서 → 살꽂이 → 살곶이 로 변화했다. 한문으로 箭串橋 '전관교'라고 하며, '전곶교'라고 다 알려져 있다.
[*箭串 : 箭 화살 전, 串 땅 이름 곶, 꿸 관, 꿰미 천, 꼬챙이 찬. 예) 羊肉串(양육천 yáng ròu chuàn), 虎尾串(호미곶)]
이는 일화에서 유래하는데, ① 이성계가 한양천도 전, 이쪽에서 매사냥(지금도 일대에 매봉산이 있음)을 즐겼다고 한다. 당시 가끔 무학봉(무학대사에서 유래한 봉우리, 인근 무학여고 옆에 있음)에 올라 새를 쏘면 한천(중랑천) 도요연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자연스럽게 새가 활맞아 떨어진 곳을 '화살꽂이 → 살꽂이 → 살곶이' 로 불리게 되었으며, 뚝섬(독도纛島 - 독섬→둑섬)일대를 '살곶이벌'로 부르게 되었다.
②이방원(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함흥으로 내려가 은둔한다. 그러나 태종의 끊질긴 회유에 이 다리를 건너오던 중, 이성계가 아들 태종쪽으로 쏜 '화살이 어디에 꽂혔다'해서 유래되었다.
살곶이다리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 58번지 일대며 한양대학교 바로 아래에 있다. 여기는 한강(漢江)과 만나는 한천(漢川 중랑천) 하류 지점이며 해방 후에도 있었던 저자도(楮子島)가 한강 개발로 사라졌다.
1967년 12월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12월, 사적을 해지하고 보물 제1738호로 지정했다.
살곶이다리는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와 한반도 남동부를 잇는 주요 교통로에 세워진 다리로, 현존하는 조선 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길며, 분분한 호칭에 대해서는 '제반교(濟磐橋)', '전관교(箭串橋)', '전곶교(箭串橋)', '살곶이다리' 등으로 불린다.
또 완성연대는, 서쪽 가운데에 걸쳐진 장대석에 '병진십월일(丙辰十月日)'이라고 새긴 간지(干支)가 새겨져 있다. *丙辰十月日, 資福, ?將片國?, 石手 金重哲 [병진시월일, 자복, ?장편국?, 석수 김중철] 이라는 글자로 보아, 각종 문화재 소개 자료에 소개된 '병자년'이 틀린 것을 서울포스트 가 확인했다. [성종 13년(1482)에 완공했다는 설과 중종 11년(1516)에 완공했다는 설]
[※ 아래 틀린 자료 표기 :
1.
... 살곶이다리는 성종 때 시공하였으나 완공된 것은 중종 때였다...
2.
...이 다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리 서쪽 가운데에 걸친 장대석 표면에 병자년이라고 새긴 간지가 눈에 띈다. 중종 11년(1516)이 병자년에 해당되는 만큼 이 해에 다리를 완공하였다는 표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강 생활문화), 2006,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재를 봐 오면서 문화체육관광부 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문화재청 의 분투를 바라지만 문화융성위원회 까지 생겼는데 변한 것은 없다. 누구 말마따라 문화엉성위원회 가 맞나? (龍)
[자료 등 참고 = 조선시대때 국가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던 곳. 이곳에 다리를 만든 것은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이었다. 세종 즉위 후 태종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기고, 살곶이에 있는 낙천정(樂天亭)과 풍양이궁(豊壤離宮)에 수시로 행차하였다.
세종 2년(1420) 5월 태종이 공사를 계획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방치하다가, 다시 백성들의 필요성으로 성종 6년(1475)에 (살곶이)다리를 완성시킬 것을 양주목(楊州牧)에 명했다고 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考)》에 따르면 성종 13년(1482) 한 승려가 방법을 고안하여 다리를 완공하자, 왕이 이를 치하하고 다리가 집과 같이 평평하여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 하여 ‘제반교(濟盤橋)’ 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렇게 완성된 살곶이다리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장석판교(長石板橋) 중 가장 큰 규모의 다리가 되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하면서 살곶이다리의 일부를 가져다가 석재로 썼다고 한다. 1913년에 다리 윗면을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보수하였으며, 1925년에 서울 지방의 을축년 대홍수로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간 채 방치되다가, 1972년에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동쪽 콘크리트 교량을 이었다. 2009년에는 성동구가 발굴조사를 거쳐 재복원했다.]
▲ 살곶이다리 옆 간지(干支) : 丙辰十月日, 資福, ?將片國?, 石手 金重哲 [병진십월일, 자복, ?장편국?, 석수 김중철 ⓒ20140817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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