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어린 3남매의 그림, 일기, 성적표 같은 것들을 차곡차곡 보관해 두었다.
나중에 시집 장가를 갈 때 주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3남매는 짝을 만나기도 전에 양친을 여의었고, 꽤 오랜 세월 동안 남들 같은 보통의 삶을 살기가 어려웠다.
박근혜, 근영, 지만 3남매.
특히 막내 박지만의 굴절과 방황은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3공화국 시절의 인사들은 물론, 언론인, 학계 인사들도 “비명에 간 부모님을 생각하면……”, “대통령 아들의 허물은 사회의 책임”이라는 말로 이 사회가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기를 기원했고, 심지어 유신에 반대해서 고초를 겪었던 일부 인사들까지 그를 돕고자 나서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휴머니즘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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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손자 박세현.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초롱 같은 동심이 포착되어 있다. ⓒ박세현(박근혜미니홈피) |
그리하여 그는 성실한 기업인으로 돌아왔고, 배필도 만나 보통의 삶을 살게 되었다. 아버지가 40 나이에 본 늦둥이라고 이름도 ‘志晩’이라 했다는데, 그는 2004년 12월 46세가 되어서야 늦장가를 들었다. 색시는 30세의 서향희.
“많은 분들이 염려해 주시고 걱정해 주신 덕분으로 오늘의 동생이 이 자리에 있습니다. 분에 넘치는 사랑과 축복을 받음으로 해서 앞으로 동생 내외는 모범적으로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생 내외가 오손도손 아름다운 가정을 꾸미리라고 믿습니다.”
결혼식에서 누나 박근혜는 가족을 대표해서 감사의 뜻을 두루 전했다.
그날 박지만은 신부와 함께 국립현충원의 부모님 묘소에 가서 인사를 올리며 참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아들 박세현의 출생으로 어엿한 아버지가 되어 활짝 웃었다.
2005년 9월12일생. 고령 박씨 31세손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손자가 태어났다 하여 큰 화제가 되었지만,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고모가 된 박근혜였다.
그는 “世現이에요. 세상에 나타났다는 뜻이죠. ‘짠!’하고 나타나 ‘박 짠’이라고 놀리죠”라고 해서 주변을 한바탕 웃겼다고 한다.
2007년 11월14일 그는 부친의 90회 생신을 맞아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3세가 된 조카의 사진을 올리고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다면 세현이의 재롱을 보시고 많이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소회를 피력했다.
어느 집안이든 혈연의 연속성은 중요하다.
새 생명은 미래이며 희망이다.
누구나 결혼을 하고 자식 낳아 기르는 보통의 삶은 그래서 값지다. (*)
▣ 출판편집인 동화작가 김 인 만
= 작가의 저작권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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