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유럽만큼 복잡한 지역도 없다. 세계사를 들여다보면 골치가 아플 정도로 국경과 민족과 인종이 뒤섞였고, 그 가운데 순혈주의를 내세우거나 기독교(로마 카톨릭) 종파로 전쟁을 일삼는 모순을 가진 지역도 유럽이다. 지금은 아프리카 흑인까지 마구 뒤섞인 상태다. 1,2차세계대전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니 정리가 될 수 없는 지역이다.
기원후부터 유럽을 크게 훑어 보자면, 그리스,터키 가 300년 정도 평정했고, 약 400년 정도 로마시대를 거쳐, 독일의 전신인 동로마제국(프로이센=프러시아)이 1000여년 지속된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를 거치며, 프랑스 가 나폴레옹 시대에서 유럽을 장악했고, 독일 히틀러 가 잠시 유럽대륙을 접수했다가, 소련 이 승전국의 전통을 잇지만 1989년 독일통일 이후, 1991년 고르바초프 가 개혁,개방을 수용하며 소련은 스스로 붕괴되고 만다.
[※ 제2차세계대전은 인류의 전무후무할 전쟁 잔혹사로, 독일과 소련과의 전쟁(독소전쟁)이 주를 이루고 나머지는 들러리에 불과하다. 독일군 600만명 중 500만명이 동부전선 소련과의 전쟁에서 죽었고, 민간인 포함 2600만명의 소련인이 죽었다. 이는 2차대전 전 희생자의 60%라고 한다. 히틀러 가 잔인했다면, 루스벨트 와 처칠 이 잔인했고, 스탈린은 더 잔인했다.]
이 틈에서 2차대전 패전으로 분단되었던 동서독을 하나로 통일한 나라가 독일이고 통일전후 수상이 헬무트 콜 수상이다. 당시 독일 통일에 가장 반대한 유럽국가는 영국. 영국은 유럽에서 대륙을 지배하지 못했지만 해외에 영연방국가를 두거나 많은 식민지로 곳곳에서 프랑스 와 충돌이 있었다. 나폴레옹 몰락도 러시아원정실패와 영국과의 전쟁패배였다. 전승국 영국이 1815년 나폴레옹 을 세인트헬레나 섬(영국령)으로 유배를 보냈다.
잠깐, '프로이센(프러시아)'은 훗날 비스마르크 수상 과 빌헬름1세 황제 에 의해 1871년 프랑스 를 굴복시켜 독일제국의 주축이 되지만, 이전까지는 유럽에 있는 수 십개의 독일연방국가의 하나였다. 당시 독일연방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덴마크,네덜란드... 즉, 이탈리아 남부만 빼고 유럽대륙 전역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때의 독일제국 지형이 지금의 (독일 주도) 유럽연합이다. 이전 히틀러(오스트리아 태생)가 독일제국재건을 위한 무모한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지만, 현 유럽연합탄생은 통일독일이 바탕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독일 통일은 유럽에서 평화를 약속해 미국의 호의를 얻었고, 경제적으로 힘든 소련의 지지를 받았다. 미국은 대신 중동지역에서 이권을 챙긴 구도가 되었다. EU가 탄생되었다가 탈퇴한 영국은 독일과 썩 좋은 사이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이해관계만 대립했다. 사실, 브렉시트(Brexit)는 유럽대륙에 별 영향력이 없었던 영국 역사로 보면 당연한 결정이라고 난 본다.
독일통일, 소련붕괴, 유럽연합탄생 등 유럽의 굵직한 역사적 현장에 늘 있었던 오늘 헬무트 콜(Helmut Josef Michael Kohl , 1930년 4월 3일 ~ 2017년 6월 16일) 전 총리 타계소식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2008년 젊은 관료와 재혼했지만, 2001년에 타계한 그의 전 부인 한넬로레 콜(Hannelore Kohl, 1933년 3월 7일 ~ 2001년 7월 5일 - 하넬로레 하네롤네 하넬로어 한네로레 하네로레) 개인의 슬픈 가족사나 그녀의 애틋한 사랑도 회자된다. 마인츠외신종합연합에 따르면, 한넬로레 여사는 지적인 외모와 세련된 매너로 독일 국민의 사랑을 받아 왔으며 독일 언론으로부터 최장수 총리 재임 기록을 세운 남편 콜 전 총리의 정치적 업적을 더욱 빛나게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단다.
세상엔 진정한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 '정의'도 없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정의인가 명확이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 현재 국가 법적인 민주공화국은 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러시아,중국,한국,브라질,남아공,이집트,필리핀.. 등을 포함한 사회주의 국가 등 몇 나라 안되고, 왕권세습 왕정국가는 영국,일본,캐나다,스페인,네덜란드,덴마크,스웨덴,핀란드,태국,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 등 자본주의 국가가 주를 이룬다. 참으로 곤혹스런 모순이다.
오늘날 독일이 통일되고 유럽연합이 탄생된 것을 보고, 프랑스 가 나폴레옹시대를 꿈구는 건지 스트롱한 최연소 대통령 마크롱 을 탄생시키는 것을 보고, 절대왕정이 철통같이 존재한 지구상 대부분 국가에서 과연 민주주의가 무슨 소용있는가, 인구폭탄을 맞은 지구촌은 갈수록 더 큰 비극에 노출되는데, 평화와 평등과 인권과 자유가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데, 대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오늘 콜 수상의 자료를 들여다보며, 같은 분단국인 한국은 통일을 위해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미국과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 는 왜 한반도를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겨 놓을려 하는가, 많고 복잡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龍)
= 아래 기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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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유럽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를 잃었다"...'독일 통일의 아버지' 헬무트 콜 전 총리 타계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 | 게티이미지코리아
[경향신문 자료=] 그는 독일의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사랑을 받았고, 적도 많았고, 일화도 많이 남겼다. 무엇보다 그는 한 시대의 상징이었다.
헬무트 콜은 전후 재건기를 거쳐 통일을 준비하던 시기 독일을 이끈 지도자이자, 세계사에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었다. 콜의 ‘정치적 수양딸’로 불렸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지금까지 12년간 집권하면서 21세기의 독일을 이끌고 있다.
‘독일 통일의 아버지’ 콜 전 총리가 루드비히스하펜의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17일 일간 빌트 등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콜은 2010년 담낭 수술을 받고 2012년 심장 수술을 받은 데 이어 2015년에는 장 수술과 고관절 치료를 받는 등 노환에 시달려왔다. 여러 차례 위독설이 나돌던 콜은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전후 독일의 최장수 총리이자 유럽 통합의 상징인 그의 사망 소식에 세계가 애도를 표하고 있다. 지그마어 가브리엘 독일 외교장관은 “독일의 위대한 정치인이었고 무엇보다 위대한 유럽인이었다”고 추모했다.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콜을 기리며 EU 건물들에 조기를 게양하라고 지시했다. 콜과 함께 탈냉전의 혼란스런 시기를 보냈던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어느 지도자들보다 먼저 성명을 내고 “자유의 진정한 벗, 전후 유럽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 중 한 명이라고 내가 생각해온 인물을 잃게 됐다”고 애도했다.
콜은 1982~1989년에는 서독 총리로,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뒤부터 1998년까지는 통일 독일의 총리로 16년간 재임했다. 격동의 시기를 보내면서도 장기간 지도자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위기와 선택의 순간이 닥칠 때마다 보여준 ‘뚝심’과 ‘배포’ 덕이었다.

1987년 6월 12일 당시 독일 총리였던 헬무트 콜(왼쪽)이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가운데)과 함께 베를린 장벽을 둘러보고 있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1930년 독일 중서부 루트비크샤펜의 보수적인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콜은 16세에 기독민주연합(CDU) 청소년당원이 되면서 일찍부터 정치에 발을 들였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고, 39세에 라인란트의 최연소 수석장관이 됐다. 3년 후에는 기독민주연합의 대표가 되면서 서독 정계의 핵으로 떠올랐다.
그 후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정치인으로 살아오면서 그의 뚝심이 가장 빛났던 때는 두 개로 갈라졌던 독일이 하나가 되던 순간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어떤 정치인이나 학자, 시민도 예상치 못한 속도로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30년 동안 동·서독을 가로막고 있던 콘크리트 벽이 무너질 당시 콜은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으로 동독 사람들이 넘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가 “실례지만 지금 바로 돌아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고 곧바로 귀국한 일화는 유명하다.
바르샤바를 떠나는 순간, 그는 독일을 갈라놓았던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들을 겨냥해 “독일인의 생존에 대한 어떠한 간섭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통일이라는 열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며 곧바로 베를린으로 날아가 “우리는 한 민족(Wir sind ein Volk)”이라고 천명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정치력을 보여준 것은 베를린 장벽 붕괴 뒤 혼란 속에서도 20일 만에 ‘통일 독일을 위한 10개항’을 발표한 것이었다. 독일이 하나가 되는 것을 처음부터 모두가 반긴 것은 아니었다. 통일된 독일이 다시 군사강국이 될까 두려워한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 주변국들의 견제는 만만치 않았다. 콜은 외교 수완을 발휘, 독일 통일에 긍정적이었던 조지 H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렇게 내놓은 것이 ‘10개항’이었다. 뒤에 콜은 “부시는 통일로 가는 길에서 우리의 최대 동맹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10개항’은 동독과의 정치협상의 최종 목표가 통일이며, 독일 통일은 유럽 통합의 틀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동독에 자유·비밀선거를 도입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세운다는 것뿐 아니라, 동유럽 국가들도 유럽 통합에 함께 해야 한다는 원대한 구상이 담겼다. 그의 생각을 틀 삼아 EU는 동유럽 국가들을 끌어안았다. 콜이 ‘통일의 설계사’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콜이 세운 이 원칙은 무엇보다 독일의 부상을 경계하던 유럽의 이웃들에게 ‘독일은 평화의 벗’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1983년 4월 22일 영국 런던의 총리공관에서 헬무트 콜 당시 독일 총리가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오른쪽)와 정상회담을 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콜과 대처는 재임 시절 유럽 통합 문제를 놓고 견해차가 커서 설전을 많이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 뒤에는 모스크바를 세 차례 방문,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담판을 벌였다. 고르바초프는 결국 “독일 통일은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며 물러섰다. 하루에도 수천명이 넘는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넘어오면서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통일을 너무 급하게 밀어붙이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었다. 콜은 “속도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길로 가는 것일 뿐”이라는 답변을 남겼다. 안팎의 경계와 우려를 물리치고 독일을 ‘통일이라는 열차’ 위에 올린 그는 회고록 <나는 조국통일을 원했다>를 통해 이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전쟁이 다시 유럽을 휩쓰는 것을 막기 위해선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 콜은 유럽 통합에도 앞장섰다. 유럽이 하나의 화폐로 연결되면 평화가 정착될 것이라 생각해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유로화 도입을 적극 추진했다. 2013년의 인터뷰에서 그는 “유로는 유럽과 동의어다. 역사상 처음으로 (서)유럽에서 전쟁이 사라졌다”고 평했다.
동독 정부의 부대변인이던 메르켈에게 통일 독일의 초대 여성청소년부장관직을 맡겨 중앙 정계로 끌어올린 사람도 콜이었다. 메르켈은 소신대로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정치 스타일에서도 콜을 그대로 닮았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 가지는 못했다. 1999년 기독민주연합의 비자금 스캔들이 불거졌다. 메르켈은 정치적 아버지인 콜을 쳐냄으로써 위기를 돌파했다. 콜은 명예대표직을 내려놓고 평당원으로 백의종군하다 2002년 9월 정계에서 은퇴했다. 메르켈은 2005년 사민당으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아 총리에 올랐다.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 타계 소식에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내놓은 애도 성명.
콜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이었고, 때론 권위적이었고, 여러 지도자들과 트러블을 빚었다. 극우파 네오나치들이 아프리카에서 온 난민들과 터키계 이주자들의 집을 불태울 때에는 늑장대응을 해 우익 폭력을 방치한다는 비난을 들었다. 체코나 폴란드 같은 동쪽의 작은 나라들에게 독일의 정책을 강요해 반발을 산 적도 있다.
콜의 임기 내내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와는 유럽 통합을 놓고 의견 차이로 공방을 벌였다. 2005년 콜은 자서전에서 “1989년 12월 독일 통일을 지지한다는 성명서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대처의 분노는 끓어올랐다”고 적기도 했다. “마거릿 대처가 화를 내며 ‘독일을 두 번이나 때려눕혔는데 이제 그들이 돌아왔다’고 말한 일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썼다. 대처뿐 아니라 독일 내에서도 정치적 반대파에게 독설을 퍼붓거나 성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적으로도 순탄치만은 않은 인생을 살았다. 41년간 함께 했던 첫 부인 하넬로어는 2001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08년 35살 연하의 마이케 리히터와 결혼했으나, 말년에는 마이케에게 사실상 감금당한 채로 지낸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넬로어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뒀으나 아들들 모두 정치와는 거리를 뒀다.
< 구정은 기자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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