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잘 보존된 지역의 역사, 포트 니스퀄리의 교훈
-SPn 서울포스트, 권종상 자유기고가
원래 공식적으로 휴가가 시작되는 날, 아이들을 데리고 찾은 곳은 타코마 Tacoma 였습니다. 워싱턴주에서 인구수로 보자면 시애틀, 스포켄에 이어 3위인 큰 도시지만, 사실 스포켄이 최근 인근 지역을 합병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실질적 인구 2위의 지역이지요. 그리고 지역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입니다. 시애틀의 관문인 시택 공항 Sea-Tac International Airport 은 바로 '시애틀 Seattle 과 타코마 Tacoma 의 중간에 위치했다'는 뜻으로 이리 이름지어졌고, 공항 옆 맥미킨 하이츠라는 곳이 아예 '시택'이라는 이름을 가진 독립 시가 되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타코마엔 한인들의 애환도 많이 서려 있습니다. 워싱턴주에서 가장 먼저 집중적인 한인타운이 생긴 곳, 그리고 정식으로 가장 먼저 '한인 타운'으로 인정받은 곳이 타코마 남쪽의 레이크우드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군부대들이 산재해 있고, 미군과 결혼해 미국 땅을 밟고 이곳에서 정착의 뿌리를 내린 생활력 강한 한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시작하여 한인타운의 뿌리가 고착됐고, 자생적인 한국 마켓이나 종교기관들도 생겼습니다. 미국 각 도시마다 한인들의 삶의 애환이 어린 역사적인 이야기들이 많지만, 타코마 역시 그런 도시 중 하나인 셈입니다. 개인적인 역경들을 넘어서 주류 사회에서 당당한 위상을 획득하고 그 독특한 문화를 주류 문화에 섞는데 공헌한 사람들이 바로 타코마에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진 타코마의 시장은 메리 스트릭랜드. 아버지는 흑인이고 어머니는 한인입니다. 그러나 소수계로서 보이지 않는 벽들을 뛰어넘었고 재작년엔 재선에 성공, 시정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 도시의 이름도 그렇고, 시애틀도 그렇고, 워싱턴주엔 원주민들의 이름이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곳들이 많습니다. 백인 위주의 역사책에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지만, 두워미시 족의 추장이었던 시애틀은 사실 적지 않은 이곳 부족들에게 비겁자로 낙인찍혔고, 미국의 다른 지역들에서처럼 시애틀과 그 인근에서도 원주민들은 피를 흘리며 백인들의 정복전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시애틀은 화친주의자였고, 그 점 때문에 백인들에게 칭송받게 됩니다. 두와미시 부족 연합은 워싱턴주의 다른 부족들과는 달리 땅을 내어주고 보호구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었지요. 대신 그들은 연안 어업권과 사냥권 등을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부족을 막론하고 원주민들은 카지노를 세워 백인들의 돈을 공략하고 있지요. 아, 물론, 안타깝게도 백인들 대신에 한인을 포함한 많은 아시안들이 그들의 부를 늘려 주고 있다는 지적도 있긴 합니다만... 어쨌든 인디언들은 합법적으로 도박장을 만들 수 있는 권리도 얻어 내었고, 그것은 오늘날 그들이 자기들의 문화를 보전하고, 자기 부족 출신의 변호사들을 만들어 내고, 나름 그들의 조상들이 입었던 그 엄청난 참화에 대한 댓가를 조금이라도 가져올 수 있는 원천이 되어주고 있는 것 같긴 합니다.
아무튼, 역사가 짧은 미국에서는 이런 것들과 관련된 많은 사료들을 되도록이면 잘 보관하려 하는 편입니다. 되도록이면 그 당시의 유적이나 사료를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공개하고, 역사적 유류품들에 대해서도 해석을 덧붙이기보다는 그 쓰임새만을 드라이하게 나열해 놓는 편입니다. 판단은 우리에게 시키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이들의 침략의 흔적이기도 했을 것이고, 무역의 흔적이기도 했을 '포트 니스퀄리 역사박물관' 에 다녀 왔습니다. 뭐, 이것도 민속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몇년 전 아내와 함께 다녀 왔던 중세 영국 마을의 분위기처럼, 이곳 역시 주민들과 자원봉사자들이 그 당시 복장을 하고 사람들을 맞으며 그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날은 아내의 성당 신심 단체에서 소풍이 있던 날이었고, 그 때문에 함께 모여 소풍을 즐기고 음식을 나누고 하느라 이곳을 찾았었는데, 저는 늘 가 봤던 오웬 비치나 포인트 디파이언스보다는 이 기지에 관심이 더 있었습니다. 보통 포트 Fort 라는 이름이 지명에 붙으면 이곳이 군대가 주둔하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간에 요새나 보루가 설치되어 있었던 곳임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서북쪽 끝의 주인 워싱턴 주에 무엇 때문에 많은 요새들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우선은 영국과 계속됐던 적대적인 관계 때문이기도 하고, 영국령인 캐나다가 바로 워싱턴주와 이웃하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든지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뤄질 수도 있다는 긴장감이 실제의 위협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이 알래스카를 구입하기로 결정하면서 상황이 더 심각해집니다. 영국으로서는 캐나다까지도 미국이 실제로 위협한다고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이는 서북미 북단에 미국이 실제로 많은 요새들을 세우게 만들었으며, 심지어는 워싱턴 주 뿐 아니라 오리건 주까지도 이런 요새들이 계속 이어지게 됐습니다. 참고로, 지명에 포트 Port 라는 말이 붙으면 이곳은 분명히 항구지요. 한국어의 같은 표기 때문이긴 하지만 포트가 F로 시작하는 Fort 의 경우엔 그 지역에 요새가 있었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 드립니다.
그런데 이 요새는 다른 곳과는 달리 영국 자본이 직접 세운 요새였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서북미를 실질적으로 개척한 힘은 모피에의 욕심이었습니다. 인디언들과의 교역에 있어서 모피와 세공품들은 꽤 중요한 상품이었고, 이 때문에 이곳 저곳에 모피 교역을 위한 기지들이 설치됐습니다. 오늘 다녀온 포트 니스퀄리 역시 이런 이유에서 생겨난 백인들의 정착지였으며, 세워질 당시 퓨젯 사운드라고 불리우는 이 지역 최초의 잡화점, 곡물 저장고, 대장간 등이 생겼고 사람들은 이곳까지 말을 타거나 해서 꽤 오랫동안 여행을 한 후에야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웠던 것은 이 당시에도 커피는 주요 교역품이었고, 도자기 같은 것도 영국에서 꽤 많이 수입됐으며, 술은 매우 제한적으로 들어왔다고 하는군요.
1832년, 포트 랭글리와 포트 뱅쿠버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교역을 하던 런던의 허드슨 베이 컴퍼니의 수석 교역 책임자 아치볼드 맥다널드는 레이니어 산을 발원지로 하는 니스퀄리 강을 며칠간 탐험하면서, 이곳과 그 인근에 교역 중개를 위한 장소를 하나 만들어 볼 것을 검토하게 됐고, 이에 따라 이듬해에 지금의 위치에서 바다 쪽으로 1마일 정도 가까운 곳에 원래의 요새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1830년대 말부터 가죽 교역량은 줄어들었고, 또 새로 정착민들이 유입하고 심지어는 철도까지 개통된 마당에서 이 회사는 더 이상 모피를 기반으로 한 교역 산업으로는 재미를 볼 수 없다는 판단을 했고, 이에 따라 이곳을 종자와 생필품을 판매하는 포스트로 그 존립 목적을 바꿔 놓았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군대가 상시 주둔하지 않았던 몇 안되는 요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1840년, 이들은 보다 정착민들과 가까운 곳에서 거래를 하기 위해 요새를 현재 위치로 옮깁니다.
1846년, 미국과 영국은 캐나다와의 국경 문제를 확정짓는 조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영국이 더 이상 미국에 현실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지역으로 새로운 정착민들이 쉽게 이주를 결정하는 배경이 됐습니다. 결국 이곳을 미국 연방정부가 허드슨 베이 회사에 당시 65만달러를 지불하고 구매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1930년대 두퐁 사의 소유가 됐다가, 이 회사가 1940년, 타코마 시에 이 지역 자사 소유 부동산을 아예 기부해 버립니다. 물론 그것은 세금 관련 문제도 있었을 것이지만(자본가들에겐 악명 높은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대통령을 하던 시절입니다. 미국의 호시절... 듀퐁 사가 절대로 자발적 기부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쨌든 타코마 시는 이곳을 단장하여 역사 공원으로 개장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겁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해 봤던 것이고.
그 당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 놓은 방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에 교회라도 가려면 한 여름에도 거의 갑옷에 가까운 무게의 옷들을 입고 신앙생활들을 했을 거란 짐작이 충분히 갔습니다. 요즘 세상에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이런 저런 그 당시의 생활상들을 보면서, 저는 무척 재미를 느꼈고 이 당시의 모습에 대해 그려보는 것 자체가 상상을 자극했습니다만, 아이들은 따분해 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면서 지난 해 한국에 갔을 때, 다섯 발자국 걸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엄마 때문에 짜증났었다면서 그 때 자기들이 느낀 불만을 제게 토로해 대었고, 아내는 아내 나름대로 왜 사진을 함께 찍는 것이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강변했으나... 역시 이제부터 아이들이 장가가고 자기 애들이 생길 때까지는 우리가 함께 여행하고 사진 찍는 것이 쉽지는 않겠다, 그런 생각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가 짧은 나라여서 그런지, 스스로 보존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많은 나라. 그리고 일견 사소해보이는 것들까지도 보존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나라. 그리고 그것을 국민들에게 되돌아보도록 하면서 자기들이 역사 안에서 만들어 온 사건에 대해 잘잘못을 판단해 놓을 수 있도록 해 놓은 나라. 이런 면에서 볼 때 미국은 우리가 말하는 '해 저물어가는 제국' 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있으면 어쨌든 자기들 내부에서는 그것을 공론화하고 고치려 하고, 나름대로 역사 안에서 교훈을 찾으려는 것을 보면 더욱 확실해집니다. 물론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온갖 불공정한 짓을 다 하는 이들의 이중성에 배신감을 느낄 때도 많지만... 적어도 이들은 소수의 권력자들이 자기들의 이익만을 위해 국가를 마음대로 굴리려고 하는 걸 방치하지는 않으니까.
이리 이야기하고 나니, 참 많은 감정들이 교차합니다.
시애틀에서...
▣ 재미교포, 자유기고가
(권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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