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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강남 신사동 안창호 선생의 '도산공원'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3/01/03 11:50:00)

[탐방] 강남 신사동 안창호 선생의 '도산공원(島山公園)'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1973년 망우리에서 옮겨와 조성된 도산공원 ⓒ20130102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도산공원을 찾았다. 한창 장사가 잘 될 때는 강남일대를 누비고 다녀 익히 알고 들렀던 곳인데, 오늘 오랜만에 찾은 이유는 민족에 대한 좀 더 진보한 성찰이랄까.

그런데 몇 해 전과 달리 동상이 스텐레스(?)상으로 바뀌었고 선생의 품위나 표정도 전혀 민족 지도자답지 않게 고증없이 제작되어 있다. 또 공신력 있는 어느곳 자료에는 그의 부인이 김혜련으로 잘못 소개돼 있다.

▲ 부인 이혜련(李惠鍊)여사와 가족사진 ⓒ자료
[이하 자료 검색 등=]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1878∼1938)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한 후 1899년에는 고향 평안남도 강서군 동진면에 한국 최초의 남녀공학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했다.

이후 190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가 다음해 로스앤젤레스 동부 리버사이드로 이주, 농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한인들에게 일거리를 알선해 주고 영어와 성경(개신교) 공부를 했다. 1905년 미주 한인 최초의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고 '공립신보'를 발간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귀국, 이갑·양기탁·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했다. 같은 해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평양과 대구에는 '태극서관'을 건립하여 출판사업을 벌였다.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감금되었다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 1912년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신한민보'를 창간했다.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에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 등을 지냈고 서재필·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1921년 분열된 임시정부 통일에 힘쓰다가 실패하자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국민회와 흥사단(興士團) 조직을 강화했다.

1924년 난징(南京)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고 1926년 다시 상하이로 간 그는 1928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하였고,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일본경찰에 붙잡혀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되었고, 1938년 3월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

망우리에 안장되었다가 73년 부인의 유해와 함께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島山公園)에 이장되었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여. 2001년 8월 11일 미국의 리버사이드시는 시청 앞 광장에 안창호 선생의 동상을 세우고 이 날을 '도산 안창호의 날'로 선포했으며 2004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안창호 우체국이 생겼다.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은 '민족개조론'을 기본으로 하며,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근간으로 민족혁신을 이룩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민족혁신은 자아혁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자아혁신은 바로 '인격혁신'이라 보았다.

그는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격의 혁신을 강조하고, 자아혁신은 곧 자기개조로 연결되며, 자기개조는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정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개개인의 인격혁명으로서의 자아혁신은 곧 자기개조이며 자기개조가 곧 민족개조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는 주인정신(主人精神)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보았다. 대성학교의 교훈을 주인정신으로 설정한 것도, 주체·독립·책임을 의미하는 주인정신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자기개조와 민족개조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안창호 선생은 점진학교·대성학교·동명학원 등 3개의 교육기관을 설립했는데, 이 가운데 대성학교의 건학정신은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에 있었다. '인격의 육성'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대성하는 인물을 기른다는 정신이 안창호 선생의 교육이념이었다.


ⓒ서울포스트

※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 : 내가 군생활 때 읽었던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1892∼1950 문인,언론인)의 이 책은, 이광수가 1922년 『개벽』에 발표한 논설문으로, 민족성의 개조(改造)를 역설한 글이다.

필자가 보기엔, '민족개조'라는 논조는 20세기 초 열강의 침략을 받은 세계 피지배국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진, 소위 '자아비판'으로 이해해야 한다. 피지배국이 스스로 정신상태를 개조하지 않으면 같은 역사가 반복된다는 논리로, 당 시대에 너도나도 뼈를 깎는 개혁과 개조를 강조했던 분위기였다.

이 점에서 안창호의 '민족개조론'이나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같다. 저변에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강조한 것도 똑같다. 두 사람 다 조선독립에 힘쓰다가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안창호는 이듬해에 죽고, 이광수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후 이광수는 우리 스스로 독립할 수 없다는 절박감과 패배주의에 젖어 한 지식인으로 시대의 한계에 봉착했다. 그리하여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민족의 성격적 결함이나 인종적 열악함 때문으로 보고 민족 해방운동이나 독립운동 등이 쓸 데 없는 투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족개조론'의 한 귀절에서 "나는 차라리 조선민족의 운명을 비관하는 자외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 비관상태를 극복하는 것이 '개조'라고 보았고, 이를 위해 '우선 나부터 개조하자'는 뜻을 가진 사람들을 확대시키고자 했다. 또 실천 내용으로서 "정직하자, 근검저축하자"는 등등의 발전적인 항목들을 제시했다.

결국 안창호와 이광수를, 한 사람은 애국자요 한 사람은 친일 매국노로 나눈다는 것은 부끄러운 역사의 결과이지 오늘날 우리가 함부로 이중적 잣대로 댈 일은 아니다.

5.16후 박정희 대통령도 '민족개조'를 주창하며 경제발전을 이뤘다는 사실도 상기해야 한다. (龍)

ⓒ서울포스트
▲ 근래 새로 건립된 동상이 오히려 어색하다. ⓒ서울포스트
▲ 몇 해 전까지의 동상(銅像)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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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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