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오류마을과 이화마을 들녁을 거닐며
-SPn 서울포스트, 나종화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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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류마을과 이화마을 들녁 ⓒ20120700 세상을 향한 넓은 창 - 서울포스트 나종화 |
베란다 너머로 비친 하늘이 참 곱다.
옷을 주섬주섬 갈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따가운 햇살을 걱정하던 아내도 결국 졸래졸래 뒤를 따른다.
아파트 뒤 들녁 풍경이 청명하여 카메라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스마트폰으로 그걸 담아 카톡으로 친구들에게 보냈다.
늦은 오후라서 햇살도 그리 따갑지 않고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주니 축 쳐져 있던 기분이 금세 살아난다.
" 따라 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어."
아내의 표정도 밝아졌다.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는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1년 가까이 준비한 책 출간을 목전에 두고 출판사 대표의 변고가 있었다.
그땐 괜한짓 했다는 자괴감과 더불어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문을 닫았던 출판사가 다시 일을 시작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전 대표의 유지려니 생각하고 출간준비를 서둘렀다.
이미 탈고도 끝냈고 편집까지 거의 마무리되어 마지막 교정만 마치면 바로 인쇄 할 수 있는 상태였는데 애초부터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내는 것을 도저히 용납되지가 않았다.
그러기를 벌써 세 번째다. 내 능력이 거기까지 밖에 되지 않은 것이 한탄스러웠지만 출판사와 상의 끝에 원고를 다시 쓰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회사일도 바뻣고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서 원고를 다시 쓰는 일은 한달째 지지부진 했다. 그래서 이번 여름 휴가를 통채로 바쳐서 해치울 계획을 세우고 달려들었는데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고 머리에 쥐가 난다는 말이 실감날정도로 두 어시간 매달리다보면 머리가 멍해지곤 한다.
그런 내게 저 푸르른 들녁과 산들바람은 상큼한 청량제가 아닐 수 없다.
대학때였다.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 터미날 다방에서 친구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 여인이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은채였다.
옷차림도 말쑥하고 교양 있어 보이는 예쁘장한 젊은 여인이라서 더욱 당혹스러웠다.
그녀가 나를 찬찬히 쳐다보더니 다짜고짜 3000원을 달라는 것이었다.
범상하지 않은 눈빛과 갑작스런 기세에 눌려 당시 내겐 적지 않은 돈인 3000원을 선뜻 내주었다.
그러자 여인은 핸드백에서 손때 묻은 책 한권을 꺼내더니 추궁하듯 생년월일과 생시를 물었다.
책 갈피를 이리저리 넘기면서 메모지에 뭔가를 부지런히 적어내려갔다.
그리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중얼중얼 무슨 대사를 외우는 듯 했지만 그녀의 또렷한 음성이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내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한결같이 맞는것 같아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20여분 정도 침착하게 얘기를 해주던 그녀가 이젠 할 말 다 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도 이곳에 친구를 만나러 왔는데 내가 자꾸만 눈에 밟혀 마음이 끌려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돈을 받지 않으면 점괘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만난 경험 자체가 워낙에 특이해서 3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그녀가 했던 얘기들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살아보니 그녀의 예언이 들어 맞은 것도 있었고 틀린것도 있고 어떻게 될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도 있지만 이것 하나 만큼은 딱 들어 맞았다.
" 너는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곳에서 살게 될것이다. 니가 사는 동네 뒷쪽으로는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어 늘 그곳을 거닐면서 고향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
위장전입도 할 수 있었고 알박기가 뭔지도 알았고 재개발 지역 딱지라는 것도 살 수 있었고 집은 강남이나 분당같은데 장만해야 가격도 많이 오르고 아이들 교육 여건도 좋다는 것을 훤히 꾀고 있었으면서도 무슨 운명에 이끌린 것 처럼 재태크나 부동산 투기와는 동떨어진 지금 사는 이 동네에 집을 장만하게 되었다.
서울에 있는 사무실까지 30분 남짓이면 출근이 가능하고 아파트 뒤로 나가면 푸른 들녁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늘 그곳을 거닐면서 고향을 떠올리니 그녀의 예언이 정확히 들어 맞은 것이다.
다시 그런 경우가 주어진다해도 나는 이런 곳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14 년간 이 들녁이 내게 준 바람과 저 푸르른 하늘과 맑은 구름을 어찌 값으로 매길 수 있으랴.
그리고 이 들녁은 지칠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보태 주었다.
비록 핸드폰으로 찍은 거지만 하늘과 노을이 좋아 사진이나 나누고 싶었는데 그만 넋두리가 되어버렸다.
(나종화 객원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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