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하게도 내가 처음으로 만난 삼국지는 책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삼국지에 대한 말 을 워낙 많이 들었기에 고약한 심사가 있는 편인 나는 남이 좋다고 하면 (그것도 이구동성으로) 왠지 관심이 없어지는 성격이어서 삼국지를 그냥 오락으로서 즐기는 책쯤으로 여긴 나머지 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97년인가 98년인가에 TV에서 방영하는 삼국지를 보게 되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나는 삼국지로 눈을 뜨고 삼국지로 잠자리에 들었다. 말로만 듣던 유비, 관우, 장비, 여포, 조조..그리고 제갈 공명. 인물 하나 하나의 특징과 하나 하나의 사건들에서 인간사의 모든 교훈이 담겨 있었기에 나는 삼국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막내가 어렸고 시아버님도 계시고 해서 그 시절엔 정말이지 나의 하루는 전쟁(?)의 연속이었는데도 삼국지를 보지 않으면 하루를 마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등장 인물 가운데서도 특히, 그리고 누구나 좋아하는 인물, 제갈 공명. 나는 그가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을 당시에 그렇게 젊은 나이인 스물여덟 살이었음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큰 인물의 삼고초려를 받을 정도면 인생을 제법 살아 본 나이의 인물일 줄 짐작했는데 그렇게 젊었다니..

그 때부터 제갈 공명이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내 가슴은 설레임으로 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깃털 부채(백우선) 하나만 들고서도 온갖 전쟁 무기들을 일거에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그 엄청난 지혜와 통찰력과 치밀함..

그래서 조금은 다른 예일지는 몰라도 ‘펜이 칼보다 세다’는 말을 이 제갈공명이 확실히 증명해 보였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삼국지를 지은 나관중의 위대함, 더 나아가서 그런 인물을 배출한 중국은 내가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의 목록에 오르게 되었고 특히 영화에 나오는 풍경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기도 했다. 찬란했던 옛날의 역사에 비해 지금의 중국을 떠올리면서 언젠가는 용이 되어 올라갈 민족이라고까지 생각이 미쳤으며 뉴스 기사에서도 미국이 가장 경계하는 나라가 중국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당연하다고까지 생각했다.

한 사람의 위대한 작가가 얼마나 자기 조국의 이름을 빛낼 수 있는지, 그리고 경제로 세계에 이름을 드러내고 있는 선진국도 결국 문화가 앞선 국가보다는 영원하지 못하리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영화를 보면서 나의 신(신에 도전했던 남자), 나의 우상, 나의 애인, 공명도 결국 정해진 운명을 이겨내지 못하고 전투에서 패한 후 병들어 죽어갈 때는 너무나 안타까워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오장원 전투에서 제갈 공명이 사마의에게 화공으로 거의 다 이긴 듯한 상황에서 안타깝 게도 비가 내려 사마의를 살려 주게 되는 것을 보면서 아! 역시 공명은 인간일 수 밖에 없고 하늘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을 용납하지 않는구나,라고 운명이란 것을 생각했다.

그 때 사마 의를 이겼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런 제갈공명이 보통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인간’임에 불과했다는 이야기 이기에 나는 더욱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만약 신으로서 그런 인생을 살았다면 그건 당연한 것이니까 마찬가지로 유비, 관우, 장비, 조자룡의 죽음을 보면서도 정의와 의리와 신의를 생명처럼 여겼던 그 영웅호걸들도 인간이란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실수와 실패를 격으면서 죽어갈 때에도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 존재도 아닌,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못한 나는 당연히 죽음을 저항없이 받아들 여야 할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 이후로 나는 공명에게 빠져서 세월을 보냈다. 현실의 나는 아주 작은 부분을 담당하고 살고 있고 또, 역사 발전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일개 匹婦이지만 내 가족과 나 자신이 보다 충실하고 겸손해진다면 그것 하나만으로 그 영웅들과 그리고 나의 공명에게 보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서 .

그후 독서하기 싫어하는 내가 [공명의 선택]이라는 세 권자리 책을 읽었다. 공명이 등장하는 부분부터 삼국지의 내용이 대부분 들어 있다. 그리고 작년에는 [도덕성 우선의 리더십]이라는 공명을 두고 정치와 연관지은 책도 읽었다.. 그리고 큰 애가 초등하교 시절에 읽었던 [이야기 중국사]라는 3권짜리 시리즈를 모두 읽었다. 그만큼 삼국지와 공명은 나로 하여금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궁금하게 만들 었다. [공명의 선택]은 역시 소설이긴 하지만 공명을 흠모하는 유재주라는 작가가 공명을 보다 사실에 가까운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역사적인 자료와 고증을 거쳐서 지은 책이었다.

적벽대전에서 공명이 제단 위에 올라가서 바람의 방향을 돌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공명이 이미 겨울에도 간혹 동남풍이 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오나라 에 대한 유비 측의 공을 높이기 위한 계략으로 묘사를 했으니까 삼국지에 비하면 작가가 표방한대로 공명이 보다 덜 허구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상을 추구하려는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인 공명은 보통의 인간 같으면 당연히 조조처럼, 유선을 제치고 자신이 왕좌에 앉았을 것인데 선대왕인 유비에게 신의를 지킨 공명은 유선이 매우 모자라는 어린 왕임에도 승상의 자리를 지키며 자신을 알아주고 전폭적으로 신뢰해준 유비에 대한 보은을 하려고 성공의 보장도 없는 중원으로의 북벌을 여섯번이나 시도했던 겸손하고 순수한 인간의 전형이었으며 그러한 사내에게 어찌 마음을 뺏기지 않을 여자가 있겠는가.

거기에 칠종칠금의 맹획의 경우를 보듯이 그 엄청난 인내와 지혜로움,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자만하지 않으려 했고 또한 매사에 공평무사를 생명 처럼 여겼던 제갈공명. 그래서 내 이상형의 남성을 말하라고 하면 나는 주저없이 제갈 공명을 첫손가락으로 꼽는다. 물론, 소설 속에 나오는 공명은 훨씬 포장이 많이 되어 있지만, 그래도 삼국지의 절반만 깍아서 인물을 그려봐도 그만한 남성은 쉽게 찾아지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그 후 상상속의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길을 걸었고 그를 생각하면서 미소짓고 행복해 하곤 했다.

중국의 야담에 이런 것이 있다고 한다.(이야기 중국사에서)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운 개국 공신인 유기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평소 제갈공명을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여기고 있었던 터였다. 자신은 명태조로 하여금 천하를 통일하여 명나라를 일으켜 세웠는데 비하여 공명은 겨우 천하를 삼분하는 데 그쳤으니 자신보다 못하면 못하지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천하를 두루 구경하고 다니다가 옛 촉한 당에 들어서서 공명의 사당이 있는 곳에 들어서게 되었다. 제왕이나 위인들의 사당을 참배하려면 신분의 높고 낮음의 구분없이 모두 사당에 이르기 전의 일정 거리에서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가 서 있는데 그는 말을 탄 채로 통과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하마비를 통과하려는 순간 말발굽이 땅에 달라붙어 말이 옴쭉달싹도 못하였다. 할 수 없이 유기는 말에서 내려 종자로 하여금 그 밑을 파보도록 하였다. 그랬더니 땅속에서 유기를 훈계하는 듯한 글발이 나왔던 것이다.. “때를 만나면 천지도 함께 힘을 도와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만 , 운수가 없으면 영웅의 계략도 들어맞지 않는 법이라오.” 유기는 머리를 한 대 된통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고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그런 후에 공명의 묘소에 들어선 유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명이 지리에 어둡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공명의 묘소 뒤쪽에는 제왕지지(제왕이 묻힐만한 자리)가 될만한 큰 명당자리가 있는데도 공명은 그것을 모르고 보잘 것 없는 묏자리에 자신을 장사지내게 하였으니 공명은 역시 자신보다 못한 인물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유기는 공명의 묘소에 참배를 하고 일어서려는데 이번에도 무릎이 땅바닥에서 떨어지질 않는 것이었다. 다시 종자를 시켜서 그 밑을 파보게 하니 “충신은 죽어서도 제왕의 곁을 떠나지 않는 법이라"라는 글발이 나왔다. 유기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끼며 드디어 자신의 오판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前無後無 諸葛武候!(전무후무 제갈무후) “유사 이래 현세에 이르기까지 공명만한 사람이 없고 역사가 이어지는 영원한 앞날에서도 공명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