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김문숙·에릭 씨를 만난 것은 서울 군자동에 있는 호프집에서였다. 그들이 독일에서 날아와 강원도를 들러 서울에 머물며 그간의 여행기를 출간하고 자전거 관련 동호회와 각종 행사를 기획할 때였다.

정말 고목나무와 매미같은 부부와 잠깐 한 시간에서 삶의 자유와 여유로움을 느꼈다. 세상의 물적 소유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그들에게 바쁜 핑계로 한국에 머무는 동안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내가 부끄럽다. 지금 한국을 떠나 독일을 거쳐 다시 남미로 향한다고 한다. 부디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기 바란다. -편집부 양기용 기자-

[아래로는 조선일보 기사]

독일인 남편 에릭 베어하임(Wehrheim· 45·건축감리사)씨는 키 196㎝에 몸무게 100㎏이다. 한국인 부인 김문숙(39·회사원)씨는 키 154㎝에 몸무게 44㎏이다. 여행할 때 남편은 허름한 데서 대충 자고, 먹는 데 돈을 아끼지 말자는 주의다. 아내는 아무 거나 대충 먹고, 잠만은 제대로 된 숙소에서 자자는 주의다. 이렇게 시종 일관 서로 다른 부부가 1년8개월간 남미를 자전거로 함께 여행하고는 ‘안데스 넘어 남미를 달린다’(나래울)라는 여행기를 최근 펴냈다.

▲남미를 2년 가까이 자전거로 함께 종단한 뒤 여행기를 낸 에릭 베어하임-김문숙씨 부부. 대조적인 체격만큼이나 취향도 다른 점이 많지만, 길 떠나는 재미에 푹 빠진 점은 똑같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스스로를 ‘자전거 여행가’로 부르는 남편 따라 아내 김씨는 직장에도 사표를 던지고 떠났다. 남미를 택한 건 대학생 시절 볼리비아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베어하임씨가 ‘너무 아름다운 땅’이라고 꼽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부는 2005년 5월 30일부터 2007년 2월 28일까지 꼬박 20개월간 남미 대륙을 남에서 북으로 딱 절반 종단했다. 로데오도 보고, 박하잎과 양파를 곁들인 돼지고기 요리 ‘치차론’도 사 먹으면서,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루 60~70㎞씩 신나게 달렸다.

부부는 ‘아르헨티나?칠레?아르헨티나?볼리비아?페루’로 길을 잡았다. 2만㎞를 달리는 동안 재미있는 일도 많았지만, 사건 사고가 없었을 리 없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아내의 자전거가 트럭에 부딪쳤고, 칠레에서는 남편이 택시를 들이받았다. 교통사고만이 아니다.

볼리비아 부에나비스타시(市)에서 부부는 격돌했다. 남편 주장대로 허름한 방을 잡을 때부터 부인은 이미 짜증이 모락모락 솟기 시작했다. 부인은 저녁을 대충 때우고 눕고 싶었지만 남편은 굳이 “난 오늘 고기를 먹어야겠다”고 주장했다. 꾹 참고 따라간 식당에서 부인이 “한국 가면 매일 대관령에 자전거 타고 올라가겠다”고 하자 남편은 “실천하지도 않을 소리를 한다”고 핀잔까지 줬다. 이튿날, 부인은 이불을 둘러쓰고 드러누웠다. “나 이제 안 가! 기를 쓰고 이만큼 따라왔는데 면박이나 주고…흑!”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부인은 끙끙거리며 일어나 짐을 꾸렸다. 남편이 슬그머니 짐 꾸리는 걸 도왔다.

“집도 절도 없이 지구를 떠도는 여행자 인생에 문득 깊은 회의를 느껴 서러웠다”던 부인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팔팔하게 살아나 현재 다음 코스를 궁리 중이다. 부부는 다음달 23일 아직 못 본 남미 대륙의 위쪽 절반을 종단하기 위해 다시 한국을 떠난다.

여행이 대체 뭐길래, 결혼 14년 차인 이 부부는 그토록 길 떠나는 재미에 탐닉하는 걸까? 부인 김씨는 “지구의 아름다움을 피부 깊숙이 느끼고, 세상의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남편 베어하임씨는 그저 태평하게 씩 웃고 말았다. 이 부부를 친구들은 ‘고목 나무와 매미’라고 부른다. (김수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