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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책 - 오소후 시인 ‘시를 쓰고 시낭송을 하다’
악마의 술이며 신(神)의 말인 ‘시’는 밥이고 영생하는 작품
 오광오 기자 (발행일: 2016/06/23 22:24:13)


[서울포스트 오광오 기자=]‘악마의 술이며 신(神)의 말이고 영롱한 언어의 사리(舍利)’라 부르는 시를 “시는 밥이다”고 표현하며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짧은 운율에 담아 글로 표현하는 오소후 시인(68)을 만났다.

챙모자를 쓰고 수수한 차림의 그녀는 여행을 통해 시종자를 얻어 와서 아름다운 시로 재창조하여 어린아이부터 어르신들까지 공감하는 작품으로 영생을 꿈꾼다.

후배들의 길잡이가 되어 영원히 기억되는 시인이 되고 싶다는 그녀는 마음속에 있는 수많은 사악(邪惡)을 밀어내기 위해 시를 하루에도 300수 이상 읽고 마음에 담아 덕행(德行) 일치를 실행하기 위해 노력한단다. 가장 최근 작품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침향(沈香)을 듣는다 - 오소후’

가라앉을 수밖에
깊은 심원의 수심 속에 숨어서
몸 절로 향기로워지는 걸

굽이쳐야한다
마음자리 따로 없는 바람인 듯이
혼 절로 향기로워지는 걸

춤을 춘다면
한 올 향연(香煙)처럼 피어오르고
꽃들은 산새처럼 떨어져 내릴까

벗이여
긴 소매자락을 펄럭여 향기를 보라

저 오묘한 한 사람을
정녕 헤아릴 수 없어 듣고만 있노니



오소후 시인은 침향을 꿈꾸고 있었다. 어디선가 향기가 들려왔다. 내음을 맡는게 아니라
문향(聞香)한다는 표현에 파문이 인다.

@ 언제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셨나요? 시를 쓰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오소후 시인 : 광주 옛도청 광장에 체류탄 가스가 터지던 1987년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당시는 모든 문화집회·행사 등이 종결되어 진흙탕 속이었지요. 그럼에도 YWCA에서 진행된 ‘어머니와 어린이 글짓기’ 교실을 통해 ‘다엽(茶葉)’ 동인지를 발간했어요.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6년의 습작기를 거치며 다양한 시를 썼지요. 서사시, 서경시, 서정시, 사춘기 청소년처럼 거칠고 반항적인 시, 수줍은 소녀같은 기행시 등. 훌륭한 시인들의 강좌와 지도를 통해 ‘시’를 정교한 조각과 세공으로 아름답게 재탄생시켰지요. 간혹 신인답지 않다는 표절의혹도 받았는데 결국 유려한 어휘가 문제였나 봅니다. 나만의 스타일의 시를 브렌딩해야 되는데 - 늘 미완이지요.(하하하하 웃음)

@ 문학작품은 소설도 있고 수필도 있는데 특별하게 시를 쓰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오소후 시인 :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문학을 공부하고 지식계층으로서 책임감이랄까?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들이 우리가 사는 시대처럼 암울하고 힘든 세상이 아닌 평화롭고 아름답기를 소망했지요. 작은 화단에 물을 주고 거름도 주며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 나는 두 아이들을 위해 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순수한 마음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지요.

@ 꽃을 가꾸듯 자녀들을 기르신 시인 어머니를 둔 자녀분들이 부럽네요. 시에 대한 영감은 어디서 얻고 있습니까?
오소후 시인 : ‘시는 발견이다’라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그래서 자연과 더불어 마음의 잡초를 뽑아내기 위해 항상 조심하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여행을 합니다.

공자는 시 300수를 읽으면 사(邪)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악을 없애기 위해 하루에 300수를 읽기도 합니다. 시를 읽고 기억하며 시 한 줄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덕행(德行) 일치를 실현하기 위해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 바쳐서 행동하려고 노력합니다. 내 마음을 다스리면서 그것을 시로 표현합니다.

또 여행을 통해 발견한 시종자(詩種子)를 받아와서 잘 키우고 기억에 저장하여 편집하여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현대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잘 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어휘력도 시인이니까 당연히 책임져야하겠지요. 다른 분야 일은 서툴지만 시적 작품을 위해서는 5시간씩 앉아있을 정도로 긴장감을 즐기기도 합니다.

@ 덕을 실천하며 살아가기 위해선 저도 시인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를 써야겠네요. 그럼 시를 쓰기에 좋은 시간이 있나요? 어느 시간에 시를 쓰신가요?
오소후 시인 : 제가 즐겨 읽는 박정대 시인은 밤 11시부터 날이 새도록 시를 쓴다고 합니다. 저는 산사생활을 하며 습관이 되어 주로 2시 30분부터 4시까지 시를 씁니다. 이후엔 머리가 혼미해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지요. 새벽엔 말을 해도 신기(神氣)가 나가고 머리를 써도 안 좋은 것 같아요. 마치 머릿속이 가을볕에 쇠약한 뜰처럼 텅 빈 상태가 됩니다.

하여 새벽에는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고 좋은 진언(眞言)만 해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쓴 시는 참선(參禪)(Zen Meditation)을 통한 시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어휘가 굵다는 지적도 받았습니다. 섬세해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 수많은 사연과 시련을 겪으며 탄생한 아름다운 시를 이 시대에 사는 저희들이 볼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최근에는 ‘도서불감증’으로 책을 잘 읽지 않고 시는 아예 보지 않는데 앞으로 시가 발전해 나갈 방향을 제시한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오소후 시인 : 명시를 읽는 일에 모든 여성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두 아이의 엄마였을 때 그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시를 썼던 것처럼 많은 여성들이 시를 쓰고 낭송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아름다운 소통을 위해서.

저는 우리나라 모국어 대한 광팬이지요. 세종대왕님이 들으면 벌떡 일어날 정도로. 그래서 어머니가 물려 준 재능으로 모국어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10여 전에 ‘양림동 친정에 가고 싶다’란 시로 탄생시켰지요. 이 작품이 현재 ‘양림축제’에서 2회 연속 대상 수상작품이 되었지요. 결국 저로선 영생하는 작품 하나를 남기게 된 것 아니겠어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별숲동인」지 『양림 오거리에 서다』 동인시집까지도 출판하게 되었으니까요.

그 언덕으로 - 오소후

구름다리를 걸어서 가리라

비밀한 고개를 넘어
어깨를 감싸던 언덕으로
옥석을 품은 강물소리 들으며

구름다리를 걸어서 가리라

봄날이 오면
솔바람 부는 언덕으로
종다리 노래를 들으며

구름다리를 걸어서 가리라

사원의 뜰에 이르면
깊은 고요가 기다리고
빈 둥지의 침묵

그 광휘의 언덕에 이르리라

『양림 오거리에 서다』2016 봄호

@ 시사랑에 대한 열정과 모국어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작품뿐만 아니라 시낭송, 동인지 출판까지 가능하게 하셨네요. 귀한 작품을 창작해 주신 열정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시’ 한편을 소개 해 주시다면 어떤 ‘시’가 있을까요?

오소후 시인 :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작품과 이 가림 시인의 시 ‘석류’를 꼭 읽어보라고 하고 싶네요. 위 ‘석류’ 시는 제가 40대 때 책을 읽고 쏟아내지 못한 채 지내다가 만난 시입니다.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이란 표현은 제 심정을 그대로 쏟아낸 듯 했어요. 그래서 저는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이 두 시를 낭송하여 큰 호응을 받았지요.

그러다 백석의 시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50대는 실제로 산사로 들어갔다. 물론 ’꼭 산에 가야만 시를 잘 쓴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웃음)

@ 산사에 가면 공기도 좋고 번뇌도 없어 좋긴 하지요. 스님들도 도인들도 산사에 가는 이유를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라고 하던데요. 선생님께선 산사에 가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오소후 시인 : 일종의 치유지요. 훌륭하신 서정주 선생님이 남긴 작품들인 서정적인 시들만 눈에 들어왔지요. 산사에 있는 동안 저도 스님들과 똑같이 예불을 드렸지요. 사악을 비우고 청정한 마음을 얻기 위함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후배들을 가르치기가 어려워요. 저처럼 따라하라고 할 수 없어서요.

다만 남에게 감동을 줄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으로 시낭송을 합니다. 가슴에 남은 설움이 시를 통해 치유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상처 안은 사람들을 위해 시를 통해 치유할 수 있는 ‘힐링포엠’ 시낭송강좌를 개설했지요.

@ 감동적인 시를 읽고 치유를 한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네요. 올해는 저도 한번 참가해 보고 싶네요. 조금 전에 예를 들어 제1회 2회 ‘굿모닝양림축제’에서 오소후 시인의 시가 낭송되어짐으로 작품이 영생을 한다는 시를 감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시낭송은 언제부터 하셨는지요?

양림동, 친정에 가고 싶다 - 오 소후

어 머 니
지금 어디에 머무시는지요

버들가지에 연두 빛 피는 봄날, 나의 어 머 니
엄마 아빠 모국어를 가르치더니
러브 휴먼 크리스찬 외국어까지 따라하게 하시더니

어 머 니
지금 여기 와 계시는지요

나무가 되어 사람들 앞에 서고
강물이 되어 사람들 앞에 흐르고
밥이 되어 사람들 앞에 놓이라고

어머니의 사랑, 그 끝없는 길을 보여준 그 집
지금 양림동 친정동네는 옛 맑은 물길이 흘러갑니다

버들가지에 밤별이 여무는 가을, 나의 어 머 니
호르륵 호르륵 호르르
아직 잠 못 이룬 산새소리가 풀 섶에 훌쩍이는
사직(祠稷) 숲 속
성성한 이 시대의 화두는 문화의 꽃을 피웁니다

지금 여기 함께 하고 있지요
어머니의 어머니 또 어머니 먼 어머니

억겁의 시간을 긴 끈으로 연대하고
찰라의 공간을 점 점 점찍는 광속의 빛줄기

보고픈 어 머 니
그 뫼비우스 띠를 따라

해, 달, 별과 바람을 데리고
모국어로 시를 노래하며
양림동 친정을 다녀갑니다


오소후 시인 : 우리나라 시낭송대회는 한국일보와 주간한국 주최로 1967년 12월 2일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신시(新詩) 6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되었다. 당시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던 한국일보 장기영사장의 시사랑이 ’67년 주간한국 김성우 편집국장의 제안으로 ‘시 낭송대회’를 그해 12월 ‘시인만세’라는 주제로 열렸다.

나는 1992년 제2회 ‘전국시낭송대회’에 참가하여 서정주의 ‘상리과원’으로 은상을 수상했다. 물론 광주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전국대회에 출천했지요. 최우수상과 금상을 차지하신 분들은 한복 입은 자태나 모든 것이 정말 우아했지요. 뭐 물론 나도 당시 베스트 드레스 상을 수상할 정도로 꽤 우아하긴 했지만...(웃음)

@ ‘시낭송’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오소후 시인 : 단정함과 절제미가 있어야 하지요. 시낭송을 통해 그리움과 애틋함, 절절함, 안타까움을 표현하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선 오장육부에서 흘러나오는 깊은 울림이 있어야 해요. 성악가들이 온몸의 울림으로 노래하여 감동을 주는 것처럼 시낭송가들도 시를 통해 공감과 소통, 그리고 감동을 안겨주는 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세상에서 아름답고 편안한 사람의 목소리로 감동을 주는 ‘시낭송’을 자주 듣고 싶네요. 시에 표현들이 많지만 선생님이 표현하는 시는 한마디로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오소후 시인 : ‘시는 밥이네요.‘ 시는 정신적인 힘을 공급하고 있고 저를 견디게 합니다. 물론 원고료 받는 시인 반열에 속해 있지도 않습니다만 영생을 꿈꾸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지요. 예수님을 믿어서 영생이 아니고 작품이 남기 때문에 영생인 것이지요.

미당 서정주 시 전집(민음사)에 보면 자서문에 68세에 ‘내 나름대로의 정신의 영생이라는 것도 생각할 줄도 알고 사는 사람인지라’라고 쓰고 있지요. 이는 독자가 책을 읽어주고 공감하여 영원히 사랑받는 시인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지요.

현 시대는 장미 시인, 들꽃 시인이라 불리는 시인들이 존재합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자기 자신이 가는 길을 밝히기 위해서 나는 시를 씁니다. 그래서 생각이 긍정의 힘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지요.

@ 그렇군요. 그럼 선생님의 시가 다른 시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오소후 시인 : 처음에 나는 ‘피안의 언어’를 쓴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요. 세상과 조화롭기를 원했지만 내 사주가 조화롭지 못했나봅니다. ‘평정(tranguility)’을 위해서 미얀마를 간 적이 있어요. 마하리쉬라는 미얀마의 유명한 명상가를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였지요. 나의 명상의 끝을 보겠다는 심산이었지요.

이후 인도에도 가고 싶긴 했지만 미루어 두고 지금은 차를 마시면서 ‘다선일미’, ‘다반향초’ 이런 말을 새기고 있습니다. 시가 익어 딱 떨어지는 것을 써야 상처도 없고 사람들에게 잘 먹힌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결국 발효 숙성의 시를 쓰고 싶다는 것이지요.

@ 그렇지요. 발효식품이 건강에 좋듯이 발효 숙성된 시 또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겠지요. 선생님은 광주·전남의 ‘시낭송’ 보급에 선각자적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시낭송 협회가 있나요?
오소후 시인 : 시낭송협회를 만들고자 한 것은 배운 지식을 사회단체에 환원하여 나의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내기 위함이었지요. 서울에 전국재능시낭송협회가 설립된 후 1993년 5월 24일 광주시낭송지회가 구성되었습니다.

협회를 이끌면서 광주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을 절대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지요. 그래서 신앙보다 높은 어머니의 그 큰 사랑을 담아서 5월 24일에 ‘광주어머니시사랑회’를 창립하고 10여년을 활동했지요. 방금 지나온 원각사 주련에서 읽을 수 있듯이 ‘본성은 둥글고 밝다’는 글귀가 바탕이 된 것이지요.

‘어머니의 사랑’을 어떻게 보은하겠어요? 협회 고문까지 지내면서 시 보급에 최선을 다했지요. 시낭송협회 고문시절 재능시낭송협회에서 제작된 「시낭송의 이론과 실제」 책자가 출판되고 공동출연한 시낭송 케이블 방송을 내보냈어요. 2016년 5월 18일 제1회 ‘비움박물관 시낭송회’를 창립하여 매달 진행하고 있어요.

@ 시낭송협회가 더 활성화되어 아름다운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를 바래요. 저도 벌써 선생님 팬이 되었거든요. 오소후라는 필명에 대해서 여쭈어보아도 될까요?
오소후 시인 : 소후는 2000년도 백양사 다정 주지스님이 소후자란 시호를 주셨어요. 법명이자 시호가 되었고 소후자를 줄여서 소후라고 필명을 쓰고 있습니다.

@ 그럼 별숲이란 시호는 어떻게 얻어졌나요?
오소후 시인 :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개명하려고 할 때 불일암 법정스님이 ‘별숲’이란 이름을 주셨지요. 별숲을 한문으로 풀이하면 ‘성림’이 되지요. 하여 오성림이란 이름으로 시를 발표한 적이 있지요. 전원범 시인님을 비롯하여 저를 아는 분들이 비호감이라서 그냥 오영순으로 쓰다가 신춘문예를 하면서 소후란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아명은 5 16 박정희 대통령 시절 호적정리를 할 때 발견된 기록입니다. 면서기가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반달현(弦) 이슬순(洵)인 오현순(15년동안 중학교 때까지 사용)을 오영순으로 잘 못 등재하여 오영순 이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별숲’이란 시호는 ‘스텔라포에머 시낭송회’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지요.

@ 선생님은 시와의 만남은 정말 운명적인 것 같네요.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사연이 있었을까요?
오소후 시인 : 서울로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이지요.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한 골목길에서 등하교를 같이 하던 친구들이 이화여대 숙대 등에 입학하는데 저는 전남대학교에 입학을 했지요. 당시 아버지께서 공무원이셔서 동생도 공부시켜야 하는데 제가 서울로 대학을 가기엔 힘드실 걸 염려하고 저보다는 동생(오영기, 한국외대 스페인어)이 탁월해서 서울로 진학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낭송을 하면서 내 안의 절절함과 그리움, 안타까움이 트라우마처럼 묻어나는 것 같아요. (오소후 시인은 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영롱한 두 눈엔 이슬이 맺혔고 인터뷰하는 내 마음도 오소후 시인의 마음과 동화되어 눈물이 났다. 감정을 컨트롤 하느라 잠시 정적이 흘렀다.)

@ 저도 선생님의 그 열정을 닮고 싶네요. 시인으로서 철학과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십지요.

오소후 시인 : 예전에 나는 시인이 될거라고 꿈을 꾸지는 않았어요. 다만 시가 좋아서 읽었고 느낌을 시어로 표현하다보니 어느 순간 작품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생하는 작품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적극적으로 시를 쓰게 되었고 그렇게 마음 속 열정을 시를 통해 끄고 달래다보니 어느 순간 시인이 되어 있었지요.

아포리즘 하나쯤 남기는 그런 사람이고자 하는데요.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이미 옛 선인들이 한 말이기는 하지만 겪어보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많이 아껴 쓰라‘고 말하고 싶네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보면 ’매일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소나무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똑같이 본다면 그는 시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어요.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선 예민한 감성과 예리한 시안이 필요하지요.

다행히 저는 관찰력을 지닌 실눈이 아버지를 닮았지요. 예전 곽재구 시인께 시를 배울 때 ‘청동거울이 있다. 청동거울 뒤에 녹이 슬었다는 것까지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당시엔 참 어려운 말이었지요. 지금에야 어려운 말씀을 시론으로 삼을 여유가 있지요.

이 ‘깨달음’은 ‘견성(見性)’ 이라는 것이지요. 불교용어지만 시인에게는 공유어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은 시간을 아껴 쓰고 날마다 찰라 찰라 견성(見性)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찰라에 내가 깨달을지, 영혼에 뜨는 별을 볼지 모르는 것이니까요. 윤동주 시인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이 바람에도 스치운다‘ 처럼 말이지요. 아, 그러고 보니 위 싯귀절이 나의 운명이 되었네요(라며 쓸쓸히 웃었다)

오소후 시인은 타오르는 열정을 공간과 시간의 짜임이 정교한 시에 바친다. 오소후 시인의 대표작 ‘양림동, 친정에 가고 싶다’는 어머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그분의 사랑을 표현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다. 근대화 역사마을 양림동이 깊어져 갈수록 그녀도 발효성숙 될 것을 기대한다.

민달팽이가 지난 간 길이 반짝이듯 시인으로 시낭송가의 길을 열어갔던 그녀의 시사랑과 철학이 후배들에게도 반짝이는 길이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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