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노래에 얽힌 사연
-SPn 서울포스트, 심천 자유기고가

둘이 걸어가던 남포동의 밤거리
지금은 떠나야 할 슬픔의 이 한 밤
울어봐도 소용없고 붙잡아도 살지 못할
항구의 사랑
여희야 잘 있거라 영희야 잘 있거라
-항구의 사랑-

필자는 가요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어떤 것은 공연히 쥐어 짜기도 하고, 괜히 비틀고, 꺾고 또 지겹게 단순 반복하고 등등, 흠을 잡자면 한이 없다. 그러면서도 매주 비디오 ‘가요무대’를 빌려다 듣는다. 그 노래가 유행하던 시대상이 그리워지기도 하고 또 우리네 애환이 녹아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일을 할 때 반주 삼아 그저 틀어 놓는 게 일쑤다.

서두에 적은 노래 가사도 속되기 이를 데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희야 잘있거라 영희야 ----”라는 구절을 듣는 순간 ‘아!!!!! 그 친구! 남 중현! - - -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살아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가슴이 메어지듯 쓰려 온다.

1950년대 중반. 경북 상주 농잠고등학교 뒤 철도관사. 필자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방학이라 집에 와 있었다. 새로 이사 온 앞집 선로수장네 집. 필자 또래의 젊은 학생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밭을 메고 있었다. 서로 처다 보며 씩 웃는 것으로 모든 인사를 대신했다. 이름은 남 중현이라 했고 김천고등학교 2학년이라 했다. 이렇듯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며 친해지자 이제는 주로 남산에 올라가 이야기 꽃을 피우곤 했었다.

어느날, 중현이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 - - - - 영희야 잘있거라, 영희야 - - -” 하고 노래를 부르며 필자를 놀려대고 있었다. 필자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야! 너 뭐하는 거야?”라고 항의를 해도 계속 놀려대기만 했다. 그러더니, “너, 요 전날 보니까 영희라는 여학생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 같던데?” “아! 그 여학생, 난 또 뭐라고. 송 역장댁 정희 친군데 정희가 집에 있느냐고 묻길래 모른다고 한 것 뿐이야” 그러고 보니 뭔가 좀 이상하긴 했다. 정희네 집을 뻔히 알면서 왜 필자한테 물어 봤으며 집에 있는지 없는지 필자가 어찌 안다고 물어 봤을까?

중현이는 ‘영희야 잘있거라’를 가끔 ‘영애야 - - ‘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필자는 6.25 때 상주중학교 1학년이었고 부산 ‘일광’이란 곳으로 피난을 갔었다. 중현이는 김천중학교 2학년으로 부산 친척집에 피난 가 있었다고 했다. 이웃에 영애라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너무나 천사처럼 예뻤지만 말도 한번 못 붙여보고 수복된 김천으로 돌아 왔었단다. 그래서 필자를 놀릴 때는 ‘영희야 - -’ 로, 혼자 흥얼거릴 때는 ‘영애야 - -’ 로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중현이는 김천고등학교 2학년으로 대대장을 하고 있었다. 대대장이라 함은 요즈음 총학생대표와 같은 것으로 당시 각 중고등학교를 학도호국단 대대로 호칭했기에 그렇게 불렀었다. 대대장들은 흔히 ‘어깨’들과 잘 어울려 다녔다. 중현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천에서 꽤 설쳤던 것 같다. 키도 훤칠하고 귀공자 스타일이라 여학생들에게 인기도 대단했었다.

어느날 그는 상주시내를 한번 돌아 보고 싶으니 같이 좀 가보자고 했다. 같이 시내를 다니다가 “어이쿠!” 하면서 갑자기 뒤 돌아 가자고 했다. 김천에서 손 좀 봐준 상주 어깨가 저기 있으니 얼른 피하자고 했다. 자세히 보니 우리 고등학교 1년 선배 였다. 서울 갈려면 꼭 김천을 거쳐 가야 했으니 서로 알고 지내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 인사 시켜 주겠다고 해도 기어이 돌아 가자고 하면서 “저기 - -, 영희- - ”하면서 내 소매를 잡아 끌었다.
“아까부터 저쪽에 서서 너를 한참 보고 있었단다. 낯이 익은 여학생 같아 지금 생각해 보니 영희야”
죽어라고 달려 갔지만 어느 골목으로 살아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현이에게 속은 것은 아니었는지? 허우대는 멀쩡한 그가 “영희야 잘 있거라 - - -” 만 흥얼대고 있었다.

중현이와 둘이서, 달리는 GMC 트럭에 뛰어 올라 타고 화령에서 양계장을 하는 친구네 집에 가서 삶은 계란을 배터지게 먹고 몇 날 몇 일 동안 닭 똥 냄새가 지워지지 않던 일, 남산 풀밭에 누워 쏟아지는 별을 보며 꿈을 키우던 일, 김내성씨가 쓴 ‘철가면(몬테크리스도 백작의 번역물), 박계주씨가 쓴 ‘순애보’ 등을 둘이서 하루 저녁에 다 읽어버린 일 등등 이제는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필자의 일생에서 중현이 만큼 마음이 서로 잘 맞았던 친구도 극히 드문 것 같다. 무엇이던지 제의하면 서로 받아 드렸고 서로가 상대를 위해줄 줄을 알았으며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았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 중현이네는 다시 김천으로 이사를 갔다. 그 후로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1년 재수해서 고대 법대에 들어갔다는 말을 풍편에 듣고는 있었다. 그의 부친께서 일직 타계 하신 일, 중장비 사업을 한다는 말 등등 친구의 친구를 통해서 서로 안부는 알고 있었다. 그러고는 어쩌다 소식이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중현아! 어디 있니? 정말 보고싶구나! ‘영희야 잘있거라 - - -’ 네 목소리로 다시 한번 듣고 싶구나. (2007, 7, 22. 심 천)

▣ 재미교포 자유기고가 (심 천-민영일)

[NEWStory makes History - 서울포스트.seoulpost.co.kr]
'서울포스트' 태그와 함께 (상업목적 외) 전재·복사·배포 허용 (*포털 다음 에 뉴스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