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반짇고리를 정리하다가 나의 '추억 발자취'를 발견했다. 전혀 의외의 것이 내 손에 들어 왔다. 그것이 어떻게 어머니 소품 속에 있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 추억을 담고 있는 그것은 바로 '중학교 때 받았던 연애(?)편지'다.


수십 통의 펼쳐보니 웃음만 나올 이야기가 많았다. 순수했던 시절이라 서로의 성적을 걱정해 주고 다른 친구들의 눈이 두려워 조심하자는 이야기, 중간고사 잘 보라는 격려, 공부 열심히 하기 위해 헤어지자는 이별소식, 다른 친구들과의 오해를 풀어 달라는 부탁, 좋은 시가 적힌 편지, 그리고 내 마음을 찡하게 한 것은 나와 가장 친했던 죽마고우의 여자 친구가 중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로 저 먼 나라로 갔는데 그 아이의 편지도 있었다.

유난히 얼굴이 하얗고 무척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던 아이였다. 내가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그 아이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우리 넷은 같이 공부도 하고 자전거도 타면서 어울렸었다.

이제 불혹의 나이에 각자의 위치에 서 있고 가깝게 만나지도 못한다. 어디에서 무엇을 한다는 정도의 소식은 몇 다리를 걸쳐서 간간히 들어왔었다. 이제 그 시절의 정감은 마음에만 있을 뿐 현실에서는 추억이다.

나는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에 처음으로 이성에 대한 걸음마를 시작했다.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였다. 어느 날, 저녁 시간에 학교 후문으로 나오라는 죽마고우의 연락이 왔다. 그곳에 가보니 같이 과외를 받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 여학생 둘이 있었다.

나와 그 친구들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과외 선생이었던 외삼촌에게 지도를 받고 있었다. 내가 "무슨 일인데"라고 묻자 죽마고우 친구가 대뜸 "이 얘들이랑 친구하자"고 말했다. 나는 "친구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친구냐"고 되물었다. 친구들이 합창하듯이 웃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일이 있은 후에 동창생들을 보니 이성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여자 친구와의 만남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 교복 세대들이 나눈 편지 속에는 풋풋한 정과 순수함, 그리고 가슴을 훈훈하게 하고 친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우정 코드'들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 당시는 누구나 문학 소년소녀였다. 어느 날 받은 편지는 이런 내용이다.

친구에게
만물이 잠든 이 깊은 밤.
주위는 조용하고 달님만이 외로이 거닐고 있어.
이 깊은 밤에 너는 무얼 하고 있을까?
하루를 반성하며 일기를 쓰고 있을까?
아니, 책들과 씨름을 해야지.
너의 편지를 읽고 난 왠지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더구나.
왜 너는 자포자기를 하려고 그러니.
지금 이 시절, 즉 중3은 모든 것에 대한 불만과 실망이 쌓이게 돼.
그것을 참고 견디며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거야.
Gown Ho야! 이처럼 크나큰 일을 해쳐나가는 너의 용기를 보고 싶구나.

열심히! 열심히 공부하여 희망찬 미래가 있기를.

아마도 이 편지는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미래를 고민하며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인 것 같다. 그 친구는 항상 격려와 위로의 말을 많이 해주었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부터 귀엽고 깜직한 외모로 여러 친구들이 좋아했던 친구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된다. 나는 키가 작아서 두 번째 줄에 앉게 되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같은 분단의 맨 앞자리에 앉았다. 나는 키가 더 작아 그 친구와 앉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마 돌이켜보니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더구나 내 짝꿍이 된 친구는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항상 누런 콧물이 흘러내리는 아이였다. 숨을 들이마시면 누런 콧물은 마치 열차가 터널을 들어가듯이 들어갔다가 잠시 후면 다시 나오곤 했다. 36년이 흐른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할 정도다. 그렇다보니 앞자리의 그 친구가 상대적으로 더 좋아졌는지도 모른다.

대학 다닐 때 신촌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시절 짝꿍 친구를 만났었는데 처음에는 못 알아 봤다. 미인형 얼굴에 늘씬함까지 갖춘 세련미 넘치는 미대생이 되어 있었다. 난 한참 동안 버스 안에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또 다른 편지를 보니 이렇게 씌어 있다.

벗에게
여름방학을 뜻있게 보내길.
친구, 이 소녀는 지금 무엇을 써야할지 모르겠어.
네가 떠난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단다.
“공부 열심히” “몸 건강히”
이 두 개의 말은 죽어도 지켜야되.
내가 꼭 부탁하는 말이야.
친구 안녕!

그리고 다른 예쁜 종이에는 '우정'이라는 시가 적혀 있다.

나 부족하여 무엇을 드릴까요?
내가 천재라면 지식을,
내가 목동이라면 귀여운 양을 주련만
나 부족하여 무엇을 드릴까요?
내가 줄 수 있는 건
오직
진정한 우정뿐입니다.

아마 이 편지는 내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갈 때 받은 편지 같았다. 그 여자 친구는 이처럼 언제나 나를 깊은 우정으로 대해준 친구였다. 지금 내 기억으로는 그 여자 친구는 나에게 자신의 괴로운 사춘기 마음을 전해주었던 것 같다.

친구들에게 받은 오해 때문에 괴로워했고 공부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갈등하고 있던 아이였다. 그리고 나는 성적이 상위권에 있었기 때문에 혹시나 자기로 인해 성적이 떨어질까 걱정해주기도 했었다.

이 여자 친구에게서 나는 첫 선물을 받았었는데 그것은 손으로 직접 짜서 만든 볼펜꽂이였다. 흰색과 녹색실로 만든 볼펜꽂이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가지고 다녔었다. 그리고 내가 해준 첫 선물은 아마 책으로 기억된다. 시집과 시를 적을 수 있는 노트였다. 우리들의 우정은 그렇게 서로를 염려해 주면서 커져갔다.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칼럼니스트 자유기고가 나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