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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여행자의 의리
 박근하 기자 (발행일: 2010/08/09 02:36:37)

내가 묵고 있는 4인용 숙소에는 이층 침대가 두개 있었다.
문가 쪽 아래층 침대가 내 자리였고,
내 윗 침대에는 니콜라스,
다른 침대 아래층에는 베네수엘라에서 왔다는 아르만도,
그 위에는 스페인인 레오폰도.
그 중에서는 아르만도는 가장 성격이 좋은 여행자에 속했다.
첫날부터 방 친구들을 모두 단합시키더니 며칠 후에는 베네수엘라 음식 파티를 열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파티에 프랑스인인 니콜라스는 와인을 준비했고, 스페인인 레오폰도는 이상한 소스를 준비했다. 한국인인 나는 음식을 먹고 요리솜씨들을 평해주겠다고 했다. 물론 재료비는 더치페이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에는 요즘 페루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클럽에 놀러 가쟨다. 바텐더가 현지인과 즉석 만남도 주선해 준다는데.. 이 녀석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설거지를 부탁한다는 메모와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한밤 중. 나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정말 곤히 잠들어 있었는데 이불위에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허걱..! 아르만도 이 녀석, 술이 떡이 되었는지 내 이불위에 올라와 잠이 든 것이다.
무거운 녀석을 낑낑거리며 옆으로 치웠다. 거실에 가서 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문 앞에서 질퍽한 것이 밟힌다. 방한용 양말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한쪽 발을 들고 잠시 생각해보았다. 암만해도 이 상황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방금 막 내 침대위에 쓰러져 버린 아르만도.
“야 아르만도 이 자식아! 내 침대에서 당장 안 일어나~?!”
철퍼덕~!!!
젖은 양말로 아르만도 얼굴을 때렸지만 이 자식은 취해도 단단히 취했는지 요지부동. 나는 결국 이 무거운 녀석의 몸채와 머리채를 끌어당겨 자기 침대에 돌려놓고야 말았다.
방안에는 세 남자의 술 냄새가 진동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잠을 자려하는데 이번에는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윗 침대의 니콜라스가 코를 고는 소리이다.
내 평생 ‘쾅’ 소리 내면서 코를 고는 놈도 처음 보았지만, 그 소리의 크기가 장난 아니다. 저 코고는 소리에도 잠을 자는 나머지 두 녀석도 결코 평범하지는 않은... 침대 옆으로 몸매 좋은 하얀색 삼각 팬티가 지나갔다. 레오폰도가 화장실을 가려고 팬티차림으로 침대에서 내려온 것이다.
아주 이것들.. 가지가지 한다.

오늘 일정대로 당장 리마를 떠나겠다는 나를 두고 니콜라스는 원망에 찬 말투다.
“리오, 너는 몰랐겠지만 나는 항상 네 일정에 따랐어. 네 여행코스는 물론이고 안데스 산에서 항상 너를 기다렸던 사람이 누군지 알아? 난 네가 아팠을 때 혼자 도시까지 무려 이틀을 히치하이킹 해서 약도 사왔었어. 그런데 넌 숙취에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하루도 못 기다려 준다고 하는구나. 너 정말 이기적인 거 알아?”
“니콜라스! 나 너한테 따라오라고 한 적 없거든? 그리고 왜 우리가 같이 다녀야 하는 건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우리가 연인인줄 알겠다!”
“연인? 연인이라고? 넌 정말 우리가 같이 다녔다고 생각하는 거야? 넌 일방적으로 네 여행만 했었고, 순전히 내가 널 따라다닌 거잖아! 나는 모든 걸 너에게 맞췄다고! 내가 널 왜 따라다녔는지 알아? 난 그저 내 여행이 멋지길 바랄뿐이야. 그리고 네가 멋진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멋진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함께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말이야. 네가 일방적으로 떠나고 해서 헤어진 적도 있었지만 어쨌든 너를 따라다닌 것이 벌써 한 달이 넘어. 페루 아마존 강에서 만난 인연까지 생각하면 거의 두 달째라고. 그 모든 것을 너에게 맞췄어. 게다가 여긴 대도시라고.
이제 한번 헤어지면 다시는 못 볼 텐데. 그런데 넌 단 하루도 나를 위해 늦출 생각을 안 하는구나!”
“자자. 그만하라구 그만. 리오. 우리 그만 협상하는게 어때? 니콜라스가 저렇게 만취해 있는데에는 내 탓도 있으니. 리오 만약 네가 내일 떠나겠다고 약속하면 오늘 점심은 내가 다시 베네수엘라 음식을 대접하겠어. 요리부터 설거지까지. 모두들 공주님을 위해 봉사 할 것을 맹세하지. 아! 그래 너 베네수엘라 전통 인형 탐냈잖아? 이것도 그냥 너 줄게. 리오 설마 우리들이 이렇게 애원하는데 거절한 생각은 아니겠지?”
“야.. 아르만도.. 너 혹시 어젯밤 어디서 잤는지 기억하냐?”
“나? 왜? 어제 밤 잘 들어와 잤는데..”
“너 오늘 아침 문 앞에 있었던 오줌이 누구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번엔 레오폰도가 말참견이다.
“그거 오줌이었어? 난 또 누가 물 쏟았는줄 알았는데.”
“너네들은 물이 그렇게 냄새 나는 거 봤냐? 그리고 레오폰도! 너 어제 밤에 팬티 바람으로 오줌 밟고 돌아다닌 거 알고 있어? 너 그 발로 그냥 침대 들어가서 잤지?”
“자자 그만하자구. 공주님. 네가 하루만 더 늦춰주면 그제 네가 탐내던 스페인 젤리 너 줄게. 그러고보니 너 페루에서 전통치마 사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하루쯤은 쇼핑을 하는 게 어때?”
천하의 웬수같은 니콜라스를 떼어버릴 절호의 찬스가 왔건만. 저들이 이렇게까지 나오니까 내가 너무 의리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몰라! 늬들 맘대로 해! 대신 난 오늘 한국음식점 가서 혼자 맛있는 거 먹고 올 테니까 식사는 각자 알아서 해결하라구!”

그날 밤.. 나는 조금 피곤했다. 정말로 곤히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 음식을 해먹은 세 남자는 무얼 잘못 먹었는지 밤새 지독히도 방귀를 뀌어댔다. 니콜라스는 창문 없는 방안에서 방귀를 뀌며 동시에 코를 고는 묘기까지 선보였다.
내 침대 천장은 니콜라스가 방귀를 뀔 때마다 들썩였으며 레오폰도는 어김없이 삼각 팬티차림으로 화장실에 다녀왔다. 이번에는 내 침대를 들여다보며 “어라? 깨어 있었네?” 라며 흰 팬티를 흔드는 안부인사도 잊지 않았다.
...레오폰도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화답하며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망설임 없이 의리를 버려 주리라.
어차피 내일이면 안 볼 사이. 대체 무슨 마음으로 의리를 지키겠다 생각했던 것인지.
나는 깨달았다. 여행자에게 있어 의리라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영양가 없는 단어라는 것을 말이다.

(박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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